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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장계 - 심양에서 온 편지, 서남동양학자료총서 ㅣ 서남동양학자료총서
소현세자 시강원 지음, 정하영 외 옮김, 이강로 감수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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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를 상고해보면 다 아시다시피 두번의 반정(뭐 서인들하고 인조의 입장에서야 반정인 것이고 당한 사람입장에서야 엄밀히 말하면 쿠데타겠지만요)이 있어죠. 한번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옥좌에 앉은 중종 그리고 뒤를 이어 광해를 몰아내고 깃발을 꽂은 인조가 있었습니다. 중종이야 후대인들이 알다시피 상당히 운좋은 사나이였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연스럽게 옹립되면서 왕에 자리에 올랐지만 인조의 경우는 중종과는 사뭇 다른 행태를 띠고 있습니다. 연산군이야 폭정(뭐 이에 대한 평가도 사실은 분분하지만요 대체적으로 연산군이 좀 심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을 거듭하면서 사실 대내외적으로 반정의 명분이 충분히 갖추고 있어지만 인조의 경우는 상당한 무리수가 있었죠. 그래서 말도 안되는 숭명배청, 패모살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몸소 반정에 앞장서서 옥좌에 앉은 경우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말이 많은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key는 양대호란을 겪으면서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 라는 치욕을 겪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선사에서 임금이 자기 앞마당을 뛰쳐나간 경우가 인조말고 임진왜란때 선조가 있었죠. 그래도 선조는 줄행랑은 쳤어도 인조처럼 대놓고 항복하진 않았죠(뭐 둘다 오십보백보이긴 마찬가지지만요) 그래서 후대인들에게 더욱더 무능한 임금으로 낙인찍였던 이유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인조라는 군주가 최악의 군주로 손에 꼽히는 것은 아들(소현세자)와 권력다툼(말이 권력다툼이지 사실상 일방적인 의심의 발로였죠)을 하면서 죽음(다들 아시겠지만 독사설이 거의 맞을듯 합니다)으로 몰아갔다는 점이 더 그의 평가를 최악으로 하게되는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으로 회복되기전에 다시 맞은 호란은 그야말로 조선이라는 배를 거의 수장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국가경제는 물론이고 민심의 이반 그리고 왕세자를 비롯한 왕실을 볼모로 머나먼 이국땅으로 보내는 대의명분의 추락을 가져왔던 것이었습니다.
<심양장계> 는 바로 병자호란이후 심양으로 볼모살이하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봉림대군(훗날 효종)등의 살아있는 기록물입니다. 특히 세자 시강원의 관원들이 심양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장계형식으로 조선 본국의 승정원에 보고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는 진귀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이미 '조선왕조실록' 을 통해서 기록문화의 진수를 보여준 이들이기에 세자가 있는 심양에서 조선조정에 올리는 보고서는 그야말로 세세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그날 있었던 거의 모든 일을 보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심양 분조(뭐 분조라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 실상 對청의 외교적인 활동을 주관했다는 점에서 크게 틀린표현은 아니라고 보여져서 전 분조라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의 활동사항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세자일행이 영구 귀국하기 마지막 1년분의 기록만 없을 뿐이지 볼모로 가 있는 전기간에 걸쳐 심양생활의 모든 모습을 엿볼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심양장계> 는 이처럼 기록물로서의 가치와 더불어 당시 청나라와 외교적으로 첨예하게 부딛쳤던 사안들(주로 병력의 지원, 병참의 지원, 전쟁통에 끌려갔던 조선인들의 환속문제등), 그리고 당신 조선과 청의 정관계에 있었던 인물들의 상세 명세, 전란이후 청과 조선의 역학구도와 조선의 경제상태등 많은 부분에서 당시대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열거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심양장계> 가 돋보이는 이유는 조선시대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볼모생활을 하면서 심양분조를 이끌어었던 소현세자 사단의 활약상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은 아무래도 군주 위주로 작성되었기에 세자시절(혹은 후계자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적을 수 밖에 없지만 심양장계의 경우 거의 군주에 준하는 수준으로 그 동태를 작성하고 있기에 실록에 배제되었던 소현세자에 대한 이미지를 반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뭐 역사에 가정이 있을수 없지만 만약에 소현이 그대로 왕위를 승계했다면 조선 역사상 통들어 가장 많은 족적을 남기는 군주가 되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드네요(물론 소현이 왕위계승을 했다면 조선의 정책과 외교등 국가전반에 걸쳐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겠지만 단순하게 기록물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 의미는 상당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심양장계에는 역관 정명수에 대한 힐난이 많이 보입니다. 조국을 배신하고 청나라에 붙어 각종 이권과 내정간섭에 일등공신을 하는 정아무개에 대해 다들 분개하고 있는 내용이 자주 보입니다. 뭐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만고의 역적이지만 어디까지는 이런 시각은 인조를 비롯한 쿠테타세력의 시각이지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속이 후련한 배신행위이지 않을까라는 씁쓸한 생각도 들게 합니다. 또한 심양분조에 활당되는 민생고 지원이 줄어들면서 직접 농업과 상업에 손을 대야만 했던 점들이 짠하게 다가옵니다(이런 와중에서도 인조는 정말 배부르고 등따시게 지냅니다) 특히 소현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이왕 하는일 시강원 관리들과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농경기법에 대해서 논의 하는 장면들은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이러한 볼모생활이 오히려 귀국후 자신의 목줄을 조여올줄은 꿈에도 몰랐을테니까요... 또한 심양장계는 공식적인 기록이자 소현세자 개인의 사생활 역시 어느 정도 담고 있어 어름짐작이지만 당시의 소현을 재구성해볼 수도 있습니다. 바로 밑의 동생인 봉림대군(훗날 효종)의 귀국기간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서 부부인까지 대동하게 하는 노력(비록 자신은 홀몸으로 조선을 다녀왔지만요 그리고 여담이지만 훗날 봉림은 철저하게 세자빈 강씨의 애타는 손길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권력은 무섭다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원손인 석철과의 이별 장면, 주전화와 주화파의 거두였던 김상헌과 최명길의 구제를 위한 다방면에 걸친 로비, 심양분조 인원을 감축하여 본국으로 송환하고 청국에 잡혀온 이들을 차출하여 관소인원으로 충당키 위한 조치(워낙 환속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 큰 관계로 부득불 편법을 동원하게 됩니다)등 분조정부 차원을 떠나서 개인 자격으로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국땅에서 건강상태가 그리 좋지 않는 현실에서 조선의 세자라는 직분을 십분발휘한 상태였습니다.
<심양장계> 는 인조조에 발생했던 양대호란이후(특히 병자호란) 동북아시아의 정세변화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 실록상의 공식적인 분위기였던 반청 내지는 북벌의 고상한 이미지 보다는 얼마나 청나라에 굴복했는지 그 실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선본토의 분위기는 심양분조와는 사뭇 달랐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 현실적인 판단이었고 실상의 모습은 공물의 숫자 하나에까지 미운털이 박히지 않도록 노심초사한 모습등에서 볼 수 있듯이 냉혹한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일국의 세자가 직접 챙겨야만 넘어갈 수 있었던 외교적 마찰, 공물에 대한 검수, 군수지원 독촉압력, 포로해방, 본토 정책 변명(사실 장계를 보노라면 은근히 슬쩍 본국이나 심양분조의 관리들이 소현세자가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를 읽을 수 있습니다)등 그야말로 수치란 수치는 다 겪으면서 나름 슬기롭게 대처하는 심양분조의 활약상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소현세자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