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지난 세월을 회상하기보다 한번쯤은 앞으로 살아가야할 할 세월의 무게를 제단 하고픈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 즉 누구에게나 살아온 날들보다 길수도 있고 짧을수도 있는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기 마련이고 한편으로 줄어들는 나날들을 겪으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을 맡기도도 한다. 과연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어떤 의미이며 또한 어떤 의미로 지금의 삶을 지배하고 있을까...

장기기증과 관련된 복제인간들의 슬픈 운명과 사랑을 그리며 삶과 죽음, 인간의 존엄성을 진지하게 성찰한 소설 <나를 보내지마>로 이미 국내 독자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는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또 다른 삶에 대한 리뷰이자 보고서로 다가온다. 35년간 달링턴 홀이라는 대저택에서 집사로 근무한 주인공 스티븐스의 회록을 중심으로 인생을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야지 보람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그 어떠한 해답을 던져주지 않고 있지만 스티븐스가 지내온 삶의 궤적보다 그에게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남아 있는 날들에 대한 희망섞인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한평생 집사라는 직업(특히 최고 일등급 집사)으로 자신의 삶보다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인의 삶을 살았던 그는 아버지의 운명의 순간도 같이 못했고 자신을 바라보던 한 여인의 시선마저도 철저히 외면했던 오로지 집사라는 직책에 충실했던 사람이다. 그렇다고 감정도 매마른 사람은 아니지만 항상 그에게 개인적인 삶보다는 주인을 모시는 공적인 삶이 우선이었고 그런 삶에 대해서 다 한순간도 의심해본적이 없는 완벽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이런 스티븐스의 철저하고도 규치적인 삶을 나레이션하면서 오히려 책 제목과는 상반된 지나 온 나날에 대한 비중을 강하게 표현하는듯 하다. 그리고 내러티브의 전반적인 비중 역시 과거의 시점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과거의 지난 온 날들 속에서 암시적으로 미래의 삶인 남아 있는 날들의 모습을 군데 군데 심어놓고 있다. 주인공 스티븐스의 집사라는 직업처럼 겉으로 화려하게 들어나지 않고 항상 그늘 아래서 있는듯 없는듯 그러나 꼭 있어야 하는 자리처럼 작가는 지난 날들 속에 앞으로 남은 날들을 그렇게 보일듯 말듯 묻어놓고 있다. 이것은 스티븐스이 대저택의 집사라는 임무에 충실하여 빡빡한 하루 일과를 보내면서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일과의 마무리인 시점이 저녁의 나레이터에서 작가는 남아 있는 나들에 대한 암시의 덫을 깔아놓았다. 특히 작가는 덫을 깔아놓고 독자가 걸려들든 그냥 지나쳐 버리든 염두에 두지 않고 무던하게 내러티를 완성해 나간다. 어쩌면 이런 점이 독자들에게 오히려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해서 더 많은 궁금증을 증폭시키지도 모른다. 난생처음 6일이라는 여행을 떠나 이제 다시 달링턴 홀로 복귀해야하는 시점에서 바라본 저녁하늘은 그동안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대저녁에서 바라보던 그 저녁하늘과 다를게 없는 똑 같은 풍경이었지만 지나온 날의 저녁과는 사뭇다른 느낌으로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그 자신이 지켜왔던 신념들에 대한 회의감 보다는 오히려 희망적인 삶의 한 귀퉁이를 느끼게 된다. 작가는 지난온 날들 그리고 남아 있는 나들에 대해서 무슨 거창한 메타포를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지나온 날보다 남아 있는 나날들이 더 소중하고 의미있을거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의 잣대 또한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집사라는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스티븐스의 삶과 그리고 앞으로도 그 일을 충실히 해 나갈거이라는 점에서 과거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차별성을 제거해 버렸다고 해야 겠다. 

지난 세계대전속에서 영국정치무대의 모든 것을 보고 겪어왔던 스티븐스의 삶이 현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살아야할 나날에 비해서 결코 더 비중이 있고 소중했다는 생각자체에 대한 수정은 있을만정 이 세가지 삶의 중요도는 결코 다를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나름대로의 좋고 나쁜점을 정량화한 수치로 기억한다. 그러나 작가는 <남아 있는 나날>을 통해 그러한 상념들이 그다지 의미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삶이란 마치 집사들의 삶처럼 보일듯 말듯 하면서도 항상 그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지금도 그리고 과거에도 물론 남아 있는 날들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영화까지 만들어졌다고 한다. 물론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내심 작품을 읽으면서 스티븐스에 가장 어울리는 배우로 안소니 홉킨스와 프리 모건 프리먼을 연상케 하였다. 홉킨스의 카리스마와 고집스러운 자기확신과 프리먼의 어리숙한 자애로움의 이미지가 집사로서의 역활에 가장 근접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막상 확인해 보니 홉킨스가 주연했고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될 정도로 수준급의 영화였다는 점을 알게되었다. 그 만큼 원작의 작품성이 뛰어났다는 반증일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인생이라는 거대하면서도 웅장한 메타포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거품을 확 걷어 내고 마치 가장 소소한 일상이 삶의 축이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매력있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물론 제2차세계대전을 전후로 계급과 문화와 사회의 부조리등 다양한 흥미거리도 제시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내일의 아름다운 삶을 위해 잠시 쉬어 가는 오늘 저녁이야말로 진정한 남아 있는 나날의 시작임을 깨닫게 하는 잔잔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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