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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도전 1 - 하늘을 버리고 백성을 택하다 ㅣ 정도전 1
이수광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 군덕수출서물(君德首出庶物) 임금의 덕은 만물 위에 뛰어나야 한다.""
"" 인군지성임현이성기공(人君至誠任賢以成基功) 임금은 정성을 다하여 어진 인물을 발탁해야 공을 이룬다.""
우리가 알고 있는 왕조국가는 군주 일인이 무소불위의 권력과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군주를 중심으로 군주을 위하여 모든 정책이 결정되고 시행되는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세계사의 대부분의 왕조국가들이 이러한 시스템을 견지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민본주의라는 패러다임 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속의 국가들 대부분이 그 수명이 길지 못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나, 수나라등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단명한 왕조를 수도 없이 보아왔다. 그런데 이에 비해 조선이라는 왕조국가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장수를 누렸다. 그럼 왜 조선은 왕조국가인데도 장수할 수 있었을까? 누구나 한번쯤은 이러한 생각을 가져봤을 것이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철저한 신분사회를 유지했다? 집권층을 제외한 나머지 민중들의 역사적소명 내지 의식이 철저히 사장되었다? 글쎄 절로 갸우뚱해지지 않는가. 한마디로 미스테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시리즈>로 독자들에게 익숙한 작가가 이번 작품에서 바로 그 해답을 던져주고 있다. 바로 <정도전>이름 석자에 조선의 장수의 비결이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삼봉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모 방송국의 대하드리마 방영과 때를 맞추어 대한민국 정치판을 뜨겁게 달구었던 내각책임제가 이슈화되면서 세인들의 관심에 들어 왔다. 그동안 역사는 정도전을 어린 세자를 옹립하여 자신의 권력유지에 집착하다가 분연히 일어난 이방원에게 제거된 간사한 소인배 정도로 기억되어 왔다. 또한 조선시대 정조와 고종대 이전까지도 정도전이라는 이름 석자는 역모에 준하는 금기사항 그 자체였던 것이 사실이다. 왜 조선은 정도전에 대해서 500여년 동안 금기시해 왔던 것인가? 그가 그렇게 죽을 죄를 범했던 것일까? 끝까지 고려의 충심을 위해 죽은 정몽주는 향후 조선의 문묘에 배향이 되었는데 오히려 조선개국의 1등 공신인 정도전은 역적의 수괴로 남아 있어야 하는 걸까?
아마도 그 해답은 왕조국가라는 조선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의 소유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 방석등을 제거한 사건을 역사에서 우리는 정변이라고 부르지 않고 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는 난이라는 개념을 反이 正에 대해 도전할 때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난으로 규정한다. 이런 측면에서 조선은 이율배반적인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사가들의 정확한 역사적 기술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만큼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역사적 비중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분명 타이틀은 역사소설이 맞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소설보다는 역사에세이 혹은 정도전 평전을 접하는 느낌을 지울수 없게 하는 작품이다. 작가 역시 팩트에다 약간의 픽션을 가미한 소설이라고 밝혔지만 왠지 픽션의 부분마져도 팩트로 받아 들여지게 하는 작가의 필력이 놀라울 정도이다. 특히 신권정치를 표방했던 정도전의 사상을 반영하듯이 이 작품의 무게중심은 이성계나 정도전의 반대측에 있었던 이방원에게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도전을 비롯하여 정몽주, 이숭인, 하륜등의 신권에 가까이 있는 인물들의 내면과 사상을 부각시켜 자칫하면 누구나 아는 뻔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기존의 작품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방향을 흘러갈 수 도 있었던 구도를 새롭게 정립했다는 것이다. 마치 정도전이 살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처럼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굵직한 사건들 보다는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토록 빛을 발하는 달빛처럼 은은하고 무덤덤하게 내러티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그래서 더욱 더 소설 같지 않는 소설인 것이다. 여말선초와 정도전에 대해서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섬세하게, 꼼꼼하게 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아마도 조선건국에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라면 조선은 그 수명이 길지 못했을 것이다. 이성계나 그 후임인 이방원의 능력이나 성격을 보더라도 답은 뻔하게 도출된다. 정도전은 비단 자신은 역적의 누명을 쓰고 사라졌지만 정도전이라는 이름 석자가 조선왕조를 장수의 길로 접어들게 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왕권과 신권의 적절한 줄다리기를 통해서 왕조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중에 하나가 바로 정도전의 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삼봉은 살아서 60년를 채 살지 못하고 갔지만 죽어서 500년을 조선과 함께 살았다. 그가 당초 설계했던 조선의 밑그림은 요동정벌 하나만 제외 하고는 거의 다 반영되어 조선의 뼈대를 이루었고 이러한 정책들을 바탕으로 장수를 누리게 된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의미가 없지만 간혹 이러한 책을 접하게 되면 한번쯤은 해보기 마련이다. 삼봉이 살아서 요동을 정벌했으면....
모처럼 픽션과 팩트를 넘아들면서 재미있게 읽어 나간 소설이다. 또한 한편으로 지금 이나라의 위정자들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으로 보여진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볍다" 라는 삼봉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