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TV의 역사사극에서 왕왕 김종서와 황보인등을 어린 단종을 끼고 도는 원상들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선 수양은 왕권강화라는 천명을 위해 부득이 하게 정변을 감행하는 고도의 의지력의 인물로 비쳐진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계유정난으로 보위에 오른 세조때부터 김종서에 대한 평가나 기록들이 거의 금기시 되어버렸다. 우리는 역사를 흔히 승자들의 기록이라고 부리기도 한다. 이러한 면에서 절재 김종서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언급자체는 세조이후 무려 300년간이나 금기되다가 영조에 의해 공식적으로 신원되기 까지 하나의 공공연한 비밀같은 존재였기도 하다. 단종1년에 발생했던 계유정난을 발판으로 보위에 오른 수양대군은 그야말로 조선시대 최고의 군주라고 일컫는 세종의 가장 아픈 아킬레스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할아버지 태종의 권력욕을 그대로 물려받은 수양대군은 마이키아벨리식의 권력창출과 유지에 온힘을 쏟은 형이다. 이후 세조의 피로 대통을 물려받은 조선의 군주들에게서 김종서의 위치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음이 틀림없다. 비록 계유정난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당대나 후대에서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자체를 부정하기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左윤덕 右종서라는 세종대의 평가 처럼 6진을 개척한 당시 大虎라는 별칭처럼 김종서는 오랜시간을 북방에서 보냈고 북방야인들을 정벌하고 지금의 국경을 이룩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 이러한 그의 이미지는 김종서장군이라는 무관으로 각인되어왔다. 하지만 김종서는 엄연한 문관 출신이며 사간원과 좌부대언(좌승지)등의 요직을 거친 앨리트였다. 김종서를 무쪽으로 이끈이는 다름아닌 세종이었다. 세종은 김종서에게 직접 활과 화살을 내려 항상 소지하도록 하는등 김종서의 상무정신이나 그 기질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 적임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결국 세종의 이러한 선택은 대성공을 거두면서 북방의 안정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김종서는 태종부터 단종까지 4명의 임금을 모신 충신이었고 특히 문종의 고명대신이기도 하였으나 왕위에 뜻을 둔 수양대군과 권력에 목숨을 건 출세주의자 한명회가 만들어낸 조선 초기 최대의 비극인 계유정난으로 인해 역사뒤로 사라짐과 동시에 시대의 금기로 남게 된 것이다.
저자는 계유정난의 근원적인 뿌리를 문종의 죽음에서 부터 찾고 있다. 저자의 전작에서도 밝혔듯이 문종의 죽음 역시 많은 의문 부호를 가진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의정부 대신들과 그 어떠한 협의되 되지 않는 국왕의 치료과정이나 약방제조의 뒤에 수양이 존재했다는 사실등에서 수양의 야욕은 어쩌면 자신의 형 제거에서부터 시작된 것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문종 사후 벌어지는 일련의 행보에서 보듯이 마치 짜여진 각본과도 같은 행동을 통해서 단종과 단종을 지지한 신하들을 옥죄여 가면서 결국 계유정난으로 자신의 세상을 만들게 된다. 계유정난 숙부가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쫒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다는 도덕적인 문제보다는 개국이후 공신들의 나라였던 조선을 엄청난 피의 댓가를 치루고 왕권강화를 이룩하고 모든 악역을 자처했던 태종과 이후 세종조를 거치면서 확립된 헌정질서를 송두리채 바꿔버리는 역사적 후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수양은 김종서나 황보인등이 어린 임금을 끼고 신권을 강화하기 때문에 왕권강화를 명목으로 쿠테타를 일으켰지만 세조의 등극과 동시에 다시 조선은 공신들이 넘쳐나는 시대로 역행했던 것이다. 그가 그리 원했던 보위였지만 정작 왕권강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생전에도 공신들의 세상이었고 자신 사후 등극한 예종의 죽음에도 이러한 공신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패해는 계유정난과 상왕복위사건등을 양산된 공신들은 예종과 성종 그리고 연산군을 거치면서 하나의 거대한 권력집단인 훈구파로 사림들을 살해하는 피의 사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시대 당쟁의 출발점은 이미 계유정난을 통해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그다지 모순은 아닐 것이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은 조선 초기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종서라는 인물을 통해서 재조명된 세종,문종,단종,세조시대를 재고찰함으로서 역사서의 행간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비단 승자의 기록을 역사라고 하지만 아무리 승자라도 모든 기록을 왜곡할 수 없듯이 그들의 흔적은 여기저기 남기 마련이고 후대의 우리는 이러한 퍼즐들을 제대로 맞추어 올바른 역사를 바라봐야 할 것이다. 북방개척의 주인공이자 고려사편수의 수장이었던 역사가 김종서의 대한 평가는 당시 시대의 금기사항으로 남을 만큼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비정상적인 권력창출이 가져오는 후유증은 세조이후 발생하는 역사적 사건들과 왕실의 비극등도 문제이긴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로인한 일반 백성들의 고통이었다는 점에서 김종서가 죽을때 까지 지키고져 한 것은 똑바로된 역사의 흐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