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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사 - 나운규와 수난기 영화
최창호 지음 / 일월서각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한국 영화사 - 나운규와 수난기 영화>>는 처음 북측에서 출간을 책을 다시 남측에서 재 편집하여 세상에 나운규에 대한 삶을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대체로 영웅적인 인물들의 생물학적 삶이 짧듯이 춘사역시 36세라는 박명으로 요절한 인물이다. 나운규하면 우리는 <아리랑>이라는 영화가 머리속에 오버랩이 되듯이 단순한 영화감독 & 제작자라는 도식에 사로 잡혀있다. 사실 그에 대한 연구자체가 그리 방대하지 못하다 보니 학술적인 접근이 극히 미비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춘사는 영화제작자감독 이전에 일제강점기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독립투사의 전력도 가지고 있는 특이한 인물중 하나이다. 물론 그 시대에 지각있는 사람들이라면 항일독립투쟁에 뛰어든다는것이 상식적인 행위였을 것이다. 춘사는 무장투쟁을 통한 항일에서 민족영화를 통한 항일로 노선을 변경하게 된다. 아마도 3.1운동이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경영에 대한 변경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춘사의 이력이 특이하듯이 그의 삶 또한 거침없는 독설과 주관으로 일관되었다는 것이 당대 인물들의 평가중 하나 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만의 소신과 신념이 있어기에 민족영화라는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남북공히 공통된 의견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의 요절이 남북한 공통의 테제를 반영해주고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1940년이후 시작된 지성인들의 친일화라는 점을 비켜갔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그의 요절이 후대의 역사적 평가에서는 축복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한국 영화사와 북한 영화사에서 공통으로 시조격으로 추앙받는 나운규 민족의 한을 영화라는 콘텐츠로 승화시켜 민족의식 고취에 누구보다더 강렬한 메세지를 민중에게 심어 주었던 그가 해방이후 분단된 조국에서는 그 평가가 폄하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좌우의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잊혀졌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춘사에 대한 평가와 삶의 재조명이 이루어진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지금의 영화인들의 문화적사고에 대해서 논할 근거는 없지만 춘사만큼 영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영화인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런점이 춘사가 한국영화사에 미치는 영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