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傳 4 - 무너진 왕실의 화려한 귀환 한국사傳 4
KBS 한국사傳 제작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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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물론 역사뿐만 아니라 다른 여타의 학문또한 마찬가지이겠만 역사라는 독특한 분야는 시대에 따른 연표중심의 이해방법과 각 왕조별 이해방법, 커다란 역사적 사건중심으로 이해하는 방법, 마지막으로 인물중심으로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사실 그동안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많은 학자들이 노력을 하였으나 아직까지도 역사대중화는 거리감이 먼것이 사실이다. 역사는 사실 따분한 학문이다.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를 현대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안타까움과 분노 그리고 실망등을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역사는 현대의 지침이고 미래를 엿볼수 있는 거울이다. 역사는 돈다는 말이 있듯이 그동안의 역사는 반복을 해왔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인식해야 하는 것도 이런 면에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역사이해의 가장 쉽고 빠른 길은 인물중심으로 더듬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물을 이해하다보면 그 인물의 배경으로 한 앞뒤의 시대상황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인물중심의 역사가 주는 보너스는 다름 아닌 역사적 상상력의 배가이고 흥미의 자극일 것이다. 그러면에서 한국사전 시리즈는 역사대중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테마별 인물설정을 단순한 흥미위주보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서술했다는 점과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할 수 있는 여백이 있어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같다. 

이번 시리즈는 왕실과 관련된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시대별로 보면 고구려 고국천왕과 산상왕 양대에 걸쳐 왕후를 지낸 우씨, 신라 왕자의 신분으로 중국선사들 중에서 우뚝솓은 김교각, 국내최초의 금동사리보관함의 비밀을 제공한 백제의 위덕왕 창,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있는 공민왕과 노국공주, 불운한 군주 광해군, 한중록의 저자 혜경궁 홍씨, 정조의 손자 효명세자, 그리고 조선의 유일한 왕의 생부 흥선대원군의 삶을 통해서 그 당시의 시대상황과 역사적 사실들을 하나씩 파헤쳐 가는 역사여행을 떠나게 된다. 항상 역사서책을 접할때면 느끼게 되는 점이 있다. 만약이라는 가정일 것이다. 물론 역사엔 만약이라는 가정이 있을 수 없지만 왠지 역사를 볼때마다 이런 만약이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게 마련이다. 그 만큼 아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역사로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지만, 그래도 아쉽기는 아쉬운 것이다. 

이번 인물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이는 개인적으로 광해군과 효명세자 두사람이다.

7년전쟁이라는 유사이래의 환란에서 그나마 국토를 보존할 수 있었던 일등공신중에 하나가 바로 광해군이다. 정작 군주라는 작자는 피난과 피난을 거듭하고 결국에는 해외망명이라는 곰수까지 두고 있는 상태에서 분조를 이끌고 전장으로 나가서 정신적인 버팀목 역활을 했던 이가 바로 광해군이다. 오죽했으면 명나라에서도 은근히 왕권의 이양을 바라는 메세지를 전달했을 정도로 그의 정치력을 뛰어났다. 비록 비극의 시작이었지만. 옥좌에 앉아서도 대동법등의 실시라는 개혁과 명과 청사이의 실리적인 외교로 7년전쟁으로 타판난 조국을 지키려고 무던히 노력하였던 군주였다. 광해군을 폄하하는 쪽에서는 중심없는 외교활동과 영창대군의 죽음, 그리고 인목대비의 서궁유페등의 폐단을 지적할 수 도 있지만 그러한 일들은 조선역대왕조에서 무수히 많았다는 점에서 큰 비중을 둘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인조 반정이 없고 광해군의 치세가 이어졌다면 조선은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7년전쟁과 양대 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실리와 명분에 둘다 큰 손상을 입고 내리막길로 질주하는 브레이크 없는 기차와 같았다. 그와중에 정조라는 마지막 희망이 있었지만 그의 본의아닌 죽음으로 인해 사실상 조선이라는 국가의 운명은 다했가고 있었다. 그 마지막에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있었다.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등극한 순조는 사실상 힘이 없었고 안동김씨를 위시한 세도가의 손아귀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다. 순조도 이를 의식한듯 세자를 통해 대리청정을 시행하게 되고 효명세자는 그런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외척의 단절 및 왕권강화 정책을 펼치게 된다. 다름아닌 궁중음악과 춤을 통한 예악정치를 펼치면서 마지막 개혁을 시도할려고 했던 것이다. 조선절정기의 세종이 그랬듯이 예악을 통한 국가기강의 확립과 개혁을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반대세력의 의도였는지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고 이후 조선은 그야말로 진흙탕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번 왕실중심의 인물들은 특히 권력에 관심이 없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배제된 인물이다. 비록 권력이라는 냉정한 잣대에서는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도 있지만 그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은 진행형이었던 것이고 올바른 길을 가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들의 노력은 결국 후대의 역사진행방향을 봐서도 결코 틀린 선택이 아니였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절반의 성공밖에는 이루지 못하였지만 그런 인물들이 있어기에 역사라는 긴물줄기가 끊기지 않고 이어졌던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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