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 앞의 잣나무 - 중국 10대 선사 禪기행
정찬주 지음, 송영방 그림, 윤명숙 사진 / 미들하우스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뜰 앞의 잣나무
중국 10대 선사 禪기행


세계 3대 종교중에 하나인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지는 가장 오래되었고 그 동안의 역사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가장 친숙하게 다가왔던 종교가 바로 불교일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 종교적인 목적은 뒤로하고도 선사를 방문해 봤을 것이고 선사의 풍경소리를 들으면서 얼굴에 붇히는 시원한 바람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 가끔은 그런 한가롭고 여유로운 광경이 불교에서 말하는 불국정토의 세계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가지면서.. 

개인적인 생각으로 불교는 타 종교에 비해서 난이도가 상당한 종교인것 같다. 우선 경전의 해석에서 부터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선 상당한  가 필요하고 고승들의 선문답이나 계송에 이르면 정말 이게 무슨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들 정도로 쉽지 않는 종교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불교만큼 간단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 종교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부처는 먼곳에 있지 않고 바로 내 자신이 부처라는 단순한 정의가 그 어떠한 계율보다 명괘하게 들려서 좋은것 같다. 물론 이 처럼 간단하기 때문에 한없이 어려운 것이 바로 불교의 가르침이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필자가 중국 10대선사를 기행하면서 마주치는 10인의 고승들에 대한 해탈과정을 세월의 벽을 넘어서 재현하고 있다. 특히 중국산사들의 화보를 첨부하여 마치 수천년 고행의 길을 걸었던 그들의 자취를 한편의 드라마로 보는듯한 착각을 가지게 한다.  

달마,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 마조, 조주, 임제 이들중 사실 내가 아는 이는 달마와 혜능 그리고 임제선사 정도이다. 그 나머지 선사들은 처음 들을 만큼 불교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달라마 서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말로 유명한 달마 그리고 아직까지 우리의 민속신앙에서 각종 재앙의 퇴치로 인식되어 있는 달마, 불교를 믿던 안믿던간에 집이나 사무실에 한장쯤 걸려있는 그의 초상화등을 통해서 달마는 친숙한 인물이다. 하지만 달마가 중국선불교의 시조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는이들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달마를 시조로 이어지는 선불교의 맥이 결국 신라시대 구산선문으로 이어지고 최종적으로 조계종으로 맥을 한다는 것에서 달마는 어찌보면 불교계에 한 획을 긋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들 10인의 선사들의 삶을 보면 과연 무엇때문에 한평생을 그리 힘들게 살아갔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대게의 경우 신분적인 열등감도 없는 집안의 출신도 많았지만 그네들은 왜 그렇게 고행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걸었을까 하는 생각, 해탈을 해야 한다는 목적의식도 없이 그저 정진하는 그들의 삶을 나와같은 범인은 감히 이해할 수 없지만 달마가 제시했듯이 本來面目, 진정 그대는 누구인가라는 명제의 해답을 찾기위한 자신과의 투쟁이자 고행의 길을 걷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 그리고 부처, 해탈을 향한 수행 마지막으로 참진리를 터득하는 과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법승이라는 제도적인 기법이 아님을 이들 선사들은 일갈하고 있다.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진정 나는 누구인가의 해답은 바로 나 자신이 불법승이고 바로 내가 부처이기 때문에 멀리서 찾지 말라는 말이다. 그 옛날 석가가 보리수나무밑에서 깨달음을 알았듯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멀리 있지 않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비록 선사들이 전해주는 계송이나 법문은 나같은 범인들로서는 이해할 수 가 없다. 불교에 입문해서 오랜 수행을 거치고 있는 수행자들도 아직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가 드문정도이니 우리같은 범인이 이해했다면 그 또한 거짓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단 하기 확실한 것은 진리는 멀지 않는 곳에 있다는 점과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명제를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명제의 해법은 누구나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만큼 진리를 향한 올곧은 진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임제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심지어 부모를 만나도 부모를 죽여야만 해탈할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이말이 바로 진리를 자신밖에서 구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일갈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임제의 隨處作主 立處皆眞(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는 곳마다 진리의 땅이 되리라) 사자후 한마디에 해탈과 진리의 해답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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