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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 조선 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 - 기행문 ㅣ 겨레고전문학선집 15
강항 지음, 김찬순 옮김 / 보리 / 2006년 10월
평점 :
看 羊 錄
조선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
그 동안 소중화라 자부해오던 조선 그리고 왜를 북방의 여진,거란보다 더 하찮은 오랑캐로 치부했던 왜국이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때는 조선군주중에서 가장긴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세종대왕보다 더 많은 시호를 받은 선조대에 와서 명나라를 친다는 명분하에 조선을 침범하게 된다. 바로 조선역사상 첫번째 시련인 7년전쟁의 시작인 임진왜란의 발발이다. 그동안 조선은 세종조부터 왜국에 대한 견제와 회유등을 통해서 왜국과의 외교를 진행하여 왔으나 선조조에 결국 동서당의 분당으로 인한 견해 차이로 사전 전쟁의 기미를 알고 있으면서 아무 대책없이 전란을 맞이 하게 된다. 임진란 발발 초기 조선은 그야 말로 속수무책으로 국토를 유린당하고 군주가 피난하는 일생일대의 초위기에 내몰리게 된다. 준비되지 않은 일방적인 침략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너무나 많은 댓가를 지불하고서 깨닫게 되지만, 이후 명군의 원조와 해양에서 이순신의 활약, 그리고 민초을 비롯한 의병들의 활약으로 반기의 기회를 마련하게 되고 전쟁은 소강기의 상태로 접어 들게 된다.
선조 정유년(1597년) 형조 좌랑을 지내던 강항(자:태초, 호:수은)은 고향인 영광으로 휴가를 떠나게 된다. 왜와 명은 조선을 배제한체로 강화협상을 진행하고 선조는 이에 격분하여 신하들과 최일선의 장군들을 독려하게 된다. 이 와중에 이순신은 명령불복종으로 한양을 압송되고 직권삭탈당한채 구금되게 된다. 풍신수길의 마지막 결전으로 이해에 다시 전란이 발발하게 되니 이 사건을 임진왜란 별도로 정유재란이라고 사가들은 명명하고 있다. 정유재란시에 강항은 다시 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의 휘하에서 투쟁활동을 하기 위해서 전 가족을 동반하여 이동하던중 불행하게도 왜전투함에 납포되어 포로의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들과 아버지등을 잃고 자신도 포로가 되는니 자결을 길을 선택할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결국 왜국으로 송환되게 된다. 조선 부산포를 거쳐서 대마도를 경유하여 결국 왜본토로 압송되게 된다. 1600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3년간의 포로생활을 했다.
간양록은 당초 강항이 건차록(巾車錄)으로 발간하였다. 건차라는 것이 죄인을 태우는 수례를 가르키듯이 강항은 불가피하게 포로가 된 자신을 죄인으로 치부하여 귀국후에도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 묻히어 후진양성에만 힘쓸정도로 강항 자신에게는 부끄러운 기록이나 후대에 그의 제자인 윤순거에 의해 건양록을 개칭되었다. 이 책은 왜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직접 눈으로 보고 느꼈던 왜국의 실상을 포로신분이라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선조에게 상소를 올린 내용과 왜국의 지리, 관직, 정치, 종교등의 전반적인 왜국사정을 정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실로 가치있는 책자이다. 그리고 귀국후 다시 종합적으로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물론 종전과 그의 귀국으로 인하여 간양록의 가치를 폄하할 수 도 있지만, 오히려 종전이후 정확히 히데요시의 사망과 그 이후 정세에 대한 판단부분에서는 강항의 예측이 틀림없었다는 점이 후대역사가 말해주고 있을 만큼 시의 적절한 관찰과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포로의 신분으로 왜국에 체류하였지만 유학자이자 전직 관료였다는 점이 강항이 적국에서 적국의 상태를 파악하는데는 유리한 점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그런 위치에서 왜국의 지리와 문화 나아가서 정치를 파악할수 있는 혜안이 있어기에 이 책의 가치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강항은 적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직접 자신으로 눈으로 많은 모습을 보게 된다. 그동안 하찮은 오랑캐로만 치부했던 왜가 어찌보면 자신의 조국 조선보다 더 발달해 있는 상황을 인정하기 싫어겠지만 현실은 현실인것이다. 그는 귀국후 조정에 올리는 상소에서 왜국의 현 주소를 사실 그대로 보고하였고 그에 대한 대응방법을 몇가지 제시하기도 하였다. 타국과의 통상방법이나 당파를 초월한 우수한 장군들의 기용 및 군인들의 자립위한 토지경작문제등 제시한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있을수 없지만 이 때 강항의 정책을 받아들였다면 양대 호란은 피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아가 일제의 강점 같은 국치 또한 발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포로신분으로 적국에 억류되어 있었지만 강항은 역시 조선의 선비다운 기질을 발휘했다. 일본 성리학의 단초를 여는데 기여을 하였고 그 자신 역시 일본을 철저히 알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의 기록에서 보면 당신 일본의 실권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막부을 연 인물들의 세세한 평가나 일본의 직제 및 성의 축성방법 그리고 백성들의 사고등 마치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강항은 기록하고 기록했다. 적지에서 목숨을 담보로 이러한 기록을 조선을 보내는등 비록 창, 칼을 직접손에 들고 전장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현대식 전투로 표현하면 정보전의 대가다운 행동을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록이란 대게의 경우 후대의 평가를 받게 된다. 더욱이 시간이 흘러 역사적 사건을 경험했을 경우에 그 빛을 발하게 되는것이다. 강항의 간양록은 당시 소중화라는 역시에 사로 잡혀있던 조선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대단한 기록이었다. 당시에는 군주나 정책입안자들에게 등한시 되었지만 불과 100년이내에 조선이 다시 전쟁의 한가운데 서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7년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는 당시 전쟁의 참혹함을 알수 있는 자료를 징비록이나 난중일기등을 통해서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전쟁의 도화선이 된 왜국의 실상에 대한 기록은 강항의 간양록이 유일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지금도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하는 사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