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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3 - 기록 아래 숨겨진 또 다른 역사 ㅣ 한국사傳 3
KBS 한국사傳 제작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평점 :
한국사 傳 3
한국방송공사에서 한국사에 대한 뿌리를 인물중심의 열전형식으로 방영하는 한국사전 시리즈 그 세번째 책이다. 대게 역사를 접하는 방식이 군주중심의 역사가 대부분이다. 물론 문자발명이후 역사기술에서 절대군주국가의 중심인 군주에 대한 기술이 절대적일 수 밖에는 없는 것이 현실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역사인식을 하는 과정중에서 시대의 흐름을 기년체형식으로 나열해가면 파악하는 방법이 가장 쉽게 그리고 정리된 형태로 역사인식을 하는 방법이지만 그 당신 인물을 연구하면서 인물중심으로 역사을 인식하는 방법 또한 역사서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이번 책은 백제의 무령왕, 조선최초의 청정을 행한 정희왕후, 비운의 여성문장가 허난설헌, 의병장 곽재우, 서학의 대부 이벽, 발해의 대무예와 대흠무, 가사의 최고봉 정철, 세종대왕에 관한 일련의 사건과 시대상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무령왕 백제의 중흥군주이다.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왕의 죽음(개로왕)을 맞이하여 백제는 일대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왕비와 왕자를 일본으로 피신시키고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하면서 백제는 제기의 발판을 마련하게되고 그 중심에 무령왕이 있었다. 우리에게 최초로 지석이라는 무덤의 주인을 알게 해주었던 무령왕 그는 백제의 중흥의 일으켜세웠고 백제문화를 정점에 있게 했던 장본이었다. 그런 점에서 군주의 역활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왕이다
정희왕후 세조의 비이자 예종의 어머니 그리고 성종의 할머니 그녀는 당초 수양대군의 배필이 되는 과정에서 부터 범상치 않는 삶을 예견했다고 볼 수 있다. 언니의 혼처를 가로챈 당돌한 소녀에서 계유정난시 남편의 갑옷을 직접챙긴 당찬 여인으로 그리고 조선 최초로 청정을 시행한 철의 여인으로 역사에 남는다. 그리고 무멋보다 그녀가 역사에서 후한 점수를 받는 것은 권력에 대한 속성을 제대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청정을 거두고 그까지 권력에 관여하지 않고 성종의 큰 버팀목이 됨으로써 세종조 이후의 전성기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남편과 두아들을 먼저 보낸 비운의 여인이었지만 조선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여인이기도 하다
허난설헌 아마 그녀가 좀더 생존했다면 신사임당을 능가하는 조선의 여류문장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여인이다. 비록 조선의 철저한 가부장제도하에서 그 빛을 읽었지만 중국의 학계에까지 그 명성을 떨친 그야말로 천재작가가 아니였나 싶다. 천재는 요절한다는 속설을 유감없이 보여준 여인이지만 그래서 더 그녀의 문장이 후대에 남게 된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의병장 곽재우 7년전쟁의 화마속에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켜낸 몇안되는 인물이다. 백성들에게 신망을 받고 자기 신념하에 고국에 목숨을 초개같이 던지 사대부였다. 관군은 도망간 상태에서 자비를 털어 의병을 조직하여 육상전투에서 최초의 승전보를 안겨주고 진주대첩등과 같은 수많은 전장에서 진두지휘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조의 의심과 당쟁의 여타 속에 유배를 당하는등 많은 고초를 겪었다 아마 그 또한 이순신처럼 전장에서 전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벽 조선 천주교전파에 가장 공이 큰 인물중에 하나이다. 천진암모임을 주도하고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 세례를 받아 오게 하는등 그는 천주교에 대한 신념을 포기 하지 않은 신지식인이었다. 비록 집안의 반대와 아버지의 회유로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자살아닌 자살을 택한 그는 아마도 교리마저도 그의 죽음으로 지켜내지 않았나 싶다
대무예/대흠무 우리에게 발해사는 아지까지 미개척분야이다. 그 만큼 사료도 부족하고 아직까지도 발행의 강역에 대한 제대로된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대조영의 아들과 손자로 이 두 군주는 가히 세상에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할 정도로 국력에 대한 자신감과 고구려의 후예라는 힘이 있었다. 당나라도 넘볼수 없는 그런 강국으로 발해을 이끌어갔던 것이다. 급기야 당에서도 그 국력을 인정하여 해동성국이라 칭하지 않았는가? 지금처럼 동북공정해서 고구려 발해을 자국의 역사로 왜곡할려고 하는 중국을 보고 있으면 그 옛날 발해를 세우고 키웠던 우리 선조들의 지략을 다심금 생각나게 한다
정철 국어교과서에 가사의 달인으로 표현되는 그가 실상 당쟁의 화신이었다는 점은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만큼 권력의 비정함과 무서움을 정철을 보면서 다시금 알 수 있는 것이다. 너무나 권력지향적이었던 그는 결국 그 권력의 정점에서 추락하였고 그 한이 각종 별곡으로 후세의 문학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는 아닐까 싶다.
세종 조선역사를 통틀어 조선과 세종은 동일시 되는 단어중 하나이다. 사실 조선은 세종조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닐것이다. 세종조에 이루어진 것이 결국 왕조의 마지막까지 큰틀의 변화없이 그대로 이어졌다는 점이 그의 미래를 보는 혜안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민본정칙의 표상으로 그리고 언론정치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자주의식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해준 그런 군주이다
역사는 분명 한두명의 인물에 의해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사에 이처럼 족적을 남기는 인물들에 대한 올발은 판단과 그들의 삶을 재조명할 수 있는 것 또한 제대로된 역사관을 가지는 방법임에 틀림없다. 결국 역사는 인물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런 인물들이 모여서 역사라는 큰 틀이 형성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