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 - 보수의 피로 개혁을 갈망한 비운의 군주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의 군주열전 시리즈 마지막인 정조편이다. 정조에 대한 평가내지 시각은 대체적으로 개혁군주, 비운의 군주,  실지적 조선의 마지막 군주등으로 보는게 보편적인 평가이고 시각인것 같고, 사극에서 다루워지는것도 그런면 일색인게 사실이다. 저자는 앞선 시리즈에서도 표방했지만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군주들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했다는 점이 색다르다.

태종,세종,성종,선조,숙종에 대한 평가도 그런면에서 상당히 신선함을 느낀다. 물론 역사평가는 주관적일수 밖에 없고 항상 후세의 선입간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그러면에서 정조에 대한 저자의 평가 또한 그 일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선 정조는 임오년의 변란 흔희 임오의리(사도세자죽음)와 영조의 유혼에서 상당히 고민하고 방황했던 인물이다. 그 제위 24년간 끊이없는 노론벽파와의 싸움에서도 알수있듯이 사를 따르자니 공이 무너지고 공을 따르자니 아비가 울고... 아마도 역대 조선군주중에서 가장 비통한 군주였음은 더할 나위도 없다. 그러면에서 정조에게 충복이 절대 부족했다는 점도 있다. 세손시설 대리청정을 둘러싼 암투와 힘들게 제위에 올를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악역을 맡은 정순왕대비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을것이다. 물론 다른 대안은 없었지만...

정조즉위식날 '나는 세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했지만 결국 훙하는 날까지 임오의리에 대한 자신의 분풀이는 하지 못했다. 물론 정조도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됀다. 탕평이 아닌 정국은 결국 조선이라는 나라자체를 뒤흔들것이라는 것을 결국 정조가 선택한것은 적과의 적절한 동침이었다. 규장각을 세워 세종조의 인재풀을 형성할려고 무던히 노력했고 노론,소론,남인등 적절히 인사배치하여 당파에 치우치지 않게 이끌어갔다. 사실은 정조제위기간내내 3정승의 자리는 어느 한 당파가 차지한적이 없었다.

단지 정조는 자신의 반대파에 대한 공격을 군사(군주와 스승이 일치한다)로서 다스릴려고 했다. 물론 조선시대 통틀어 정조만한 석학은 없다. 그러다보니 신하들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게 아마도 임오의리에 대한 분풀이는 아니었을까..

정조시대는 유달리 역모와 변괴가 많았던 시절이다. 제위에 오르고 10년간 매년 역모고변에 시달리고 결국 이복동생인 은전군의 사사로 까지 이어지는등 정국자체가 혼미한 상태였다. 물론 그 만큼 정조의 반대세력이 깊게 박혀 있었다는 반증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슬기롭게 지켜나 갈수 있었던 건 정조의 군사정신이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정조의 정치기반이 안정되고 친위세력이 자리잡은 제위 16년부터가 본격적인 개혁정치로 나아가는 기간이었으리라 그런걸 보면 정말 역사엔 가정이란 없나보다. 그로부터 체10년을 못넘기고 훙하였으니.. 영남만인소 이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을 본격적으로 추승하고 수원화성신도시 건설을 통한 벽파에 대한 공격수위를 높인다. 그리고 신해통공이라는 금난전권의 폐지를 통해 상업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오고, 인조때 부터 대두된 서얼형통을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한다. 그를 통해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등의 인재를 발탁하고 미래의 브레인으로 키운다.

정조는 서학(천주교)에 대해선 상당히 관대한 입장이었다. 적어도 진산사건 내지는 신해박해(윤지충의 어머니 신주를 불살은 사건)이 있기 전까진 서학에 대한 정조의 입장은 경학을 소홀히 하여 생겨난 폐단으로 인식했던것이다. 군사라 자부하는 정조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을것이다. 선비들이 경학을 등한시 하니 폐관이나 서학들이 고개를 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학서적의 분서을 명하기도 하며 특히 남인들중에 서학과 관련되 인사들에게 반성문을 제출하게 하고 그것으로 사태 확산을 막고자 했다. 뒤에 문체반정을 통하여 올바른 학문 정학,경학을 내세우면서 서학의 정치화를 적극막았던 점 또한 그의 학문적 깊이가 느껴진다.

정조는 역대 군주중에서 현란한 말솜씨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실록에 의하면 신하들과의 면대자리에서 주고 받은 말은 주로 정조의 말 일색이다. 이 역시 스승이 제자를 나무라는 투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정조는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컷던것이다.

하지만 정조의 죽음으로 그가 가지고 있던 꿈은 일시에 물거품으로 변해버린다. 순조 등극후 정순왕대비의 수렴으로 철저하게 정조흔적 지우기에 나서 결국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 점은 정조또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그 만큼 친위세력을 키우지 못했다는 점 소론, 남인, 시파등 정조에게 우호세력 또한 정조의 유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는 정조는 이상형을 꿈꾸었을지 모른다. 물론 개인적인 가족사 문제등과 맞물려 있지만, 이역시 수신제가와 치국평천하를 별개의 개념으로 인식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 아쉽다 못해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정조 사후 사실상 조선이란 국가는 와해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흔희들 정조의 죽음에 대하여 독살설등 의혹의 여지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단지 실록상으론 독살설에 대한 의심이 없지만, 거야 노론벽파입장에서 서술한 실록이니 신빙성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다고 해야할까....

   
 

 정조의 죽음은 실은 조선의 죽음이었다. 정조의 개혁실패는 조선의 개혁실패였다. 그는 전환기에서 방향을 찾지못하고 방황했다. 그의 방황은 조선의 방황이었다. 그이 죽음으로 조선의 방황은 멈추었다. 그것은 쇠퇴의 길이었고 국망이 길이었다.

 
   
저자의 표현대로 정조의 죽음으로 조선은 사실상 끝을 맺는다고 봐야할것이다. 순조이후 등장하는 세도정치의 시대 그리고 왕가혈통이라고 엄밀히 말하기 힘들 왕위계승, 다시한번 역사의 가정이 있다면 정조가 좀더 제위기간에 있었더라면 향후 역사는 정말 어디로 흘러갔을까 그가 원하던 만천명월주인옹을 이루진 않았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