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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조선의 지존으로 서다 - 타고난 절대군주가 뿜어낸 애민의 카리스마 숙종의 진면목 ㅣ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7년 8월
평점 :
숙종하면 자연히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조강지처를 내치고 첩을 사랑한 군주로 그리고 여색을 즐겼던 군주로 떠오른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잘못된 편견이다. 숙종에게는 정비가 폐비장씨(장희빈)을 포함하여 4명이 이었고, 후궁은 5명으로 비교적 다른 군주에 비해서 많은편도 아니다. 역시 야사나 사극을 통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팽배하기 때문이라 생각든다. 그래서 역사는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이 한번더 드는 것이다.
숙종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태종과 세조에 이은 왕권강화에 전력을 다한 군주이고, 본인스스로 당파에 빠져있는 신하를 속된말로 가지고 논 군주라고 해야할까. 한마디로 철권왕이었다고 보는게 가장 타당한 평가라 할 수 있다. 제외기간중 3번의 환국을 통해 남인에서 서인으로 다시 서인에서 남인으로 그리고 남인에서 서인으로의 정권교체를 홀로 단행했고 제위 말년 서인 소론에서 노론으로 다시한번 더 정권을 교체할 정도로 당시 신하들에게 가히 절대적 왕권을 행사한 임금이다.
숙종의 이런 정치배경엔 물론 남인과 서인의 명분싸움이 극에 달해 왕권보다는 신권을 우선시 하고 국정보다 당리당략에 치중한 나머지 정치의 실종으로 인한 자업자득의 결과라 봐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숙종의 정치적 감각과 냉철한 판단 그리고 정치지향적인 성격과도 부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숙종은 어린나이에 즉위했지만 바로 친정할 정도 기본적인 정치수업을 세자시절부터 받아왔고 선왕이 현종때의 예송논쟁을 통해 할아버지인 효종을 차자로 규명하는 신하들에 대해 넌저리 날 정도 반감을 키워왔던것도 사실이다.
즉위즉시 송시열계열의 서인을 내치고 효종을 적장자로 인식한 남인을 등용하지만 남인의 정치능력이 떨어짐을 간파한 이후 바로 경신환국을 통하여 서인을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등장시키는등 오로지 왕권강화의 일념하에 환국을 통하여 당파정쟁의 잇점을 취하는 정치를 단행했다
숙종조에는 특히한 역모사건은 없었다. 당쟁에의한 무고의 변은 있어지만 그런만큼 정치가 안정되었고, 특히 백두산정계비와 울릉도의 자국영토선언등을 통하여 국경에 대한 명확한 경계를 확정짓었고, 상평통보를 적극 유통시키므로 상업의 활성화를 도모했지만 그 그늘에는 농업의 몰락 또한 가져온게 사실이다. 또한 태조계비 신덕왕후의 소생 방석,방번의 신원 및 사육신의 신원과 단종의 신원을 통해 과거와의 화해를 추진했다.
숙종은 인조반정이후 처음으로 원자와 세자를 밟아 국왕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런 만큼 탄생때부터 지존이라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자존심을 가지고 제위에 오른 군주였다. 그런 군주에게 왕권에 대한 일말의 도전은 용납되지 않았고 그 결과 잦은 환국으로 결국 사림들의 피의 향연만 가져온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인조의 천륜을 저버린 소현세자의 독살이후 조선시대의 왕조는 아들 품귀현상을 겪는다 특히 정비소생의 대군 품귀현상이라고 할까? 소현세자의 동생인 효종또한 외아들 현종밖에 없었고 현종또한 숙종이라는 외아들 하나 숙종역시 왕비를 넷이나 맞이했으나 결국 경종밖엔 얻지 못하고 무수리 출신의 영인군(후일 영조)를 얻은게 고작이었다 할 정도로 소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저주 아닌 저주를 받았다고 할 정도다.
숙종시대를 크게 보면 숙종과 송시열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인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의 긴장감 넘치는 대결 구도를 이끌어가면서 숙종은 남인과 서인사이에서 저울질하면서 정치를 끌고 나갔고 결국 숙종의 승리로 장식했다. 하지만 자신 사후 후계구도에서 경종과 영조사이에 확실한 선택을 하지 못한 관계로 정말 피바람을 일으키고 군주독살이라는 악의 대물림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된다.
조선 당쟁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시대 그리고 그런 당쟁을 자신에게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만든 군주 바로 그가 숙종인것이다. 조선시대는 숙종 시대를 분기점으로 영,정조시대에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역사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간다. 그 만큼 숙종이라는 군주의 가치가 절실하게 더 느껴지는 이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