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여자, 착한 남자
이만교 지음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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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는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르는 첫눈이 왔고, 난 또다시 밤에도 선글라스를 써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가끔 살풋거리는 바람에도 눈알이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는데 조리개를 잔뜩 잡아당겨도 보고 눈꺼풀로 슬쩍 바리케이트를 쳐보아도 소용없이, 진물이 날 정도로 눈이 시다. 운전대를 잡고 나 몰라라 눈을 꾸욱 감아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여, 어두컴컴한 밤에 어두컴컴한 안경을 쓰고 어두컴컴한 길을 더듬다보니 삶조차 어두컴컴해지는 듯한 느낌 지울 수 없다. 내 시간은 왜 간드러지게 하늘하늘해지는 법이 없지.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읽으며 꽤 쓸만하군, 했고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를 읽으며 머꼬? 이 치 꽤 웃기네? 했던 바로 그 작자의 작품집 <나쁜 여자, 착한 남자>. 여섯 편의 중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에는 각자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바보처럼 착하고 순정하며 어느 한편으로는 외곬수이기까지 하다. - <걸리버 여행기>를 읽으며 중간중간 머리 식힐 겸 읽은 것이라 내용이 두서없이 쌓였다.

나쁜 여자 착한 남자 - ‘착하게 살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은 순수란 병약한 자위일 뿐일세.’ 맹목적인 착함을 비꼬거나 추궁하면서 은연 중 그러한 착함을 동경하는 작가의 ‘착함’이 묻어나는 이야기.

농담을, 이해하다 - ‘말하자면 일종의 농치 혹은 농맹’인 ‘나’는 적당한 때에 눈치 보며 박수 치는 관람객처럼 남들이 웃으면 따라 웃는 게 일상화되어 있다. 물론 기혼자들이 애인 운운하는 소리가 농인지 진담인지조차 구분하지 못 한다. 그런 내게도 농담처럼 애인이 생기고 이제야 ‘나’는 생이 꾸며내는 농담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눈빛과 마주치다 - ‘세상과 에누리 없이 화해’하며 산다고 자부하던 내게 혼돈이 찾아든다. 나와 다른 이가 중첩되기도 하고 무화되기도 하면서,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이 나인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인지, 장자의 나비라도 목도했단 말인가.

그녀, 번지점프 하러 가다 - ‘좁은 집구석이 그 어느 겨울바다보다도 더 넓고 막막’하게 느껴지는 순간 아내들은 자신의 존재감에 허탈해진다. 거울을 보면 친정 엄마가 피로하게 서 있고 남편에게 그녀는 찬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존재찾기에 나선 그녀가 선택한 방법이 번지점프였다는 것이 깜찍하다. 사진 찍는 미청년의 수작에 은근한 기대로 부풀었던 그녀는 여자친구와 함께 사라지는 그의 등을 보며 생각한다. ‘이건, 강간당한 것보다 더 지독해!’

투레질 - 언젠가 한번쯤은 와본 듯한 장소, 언젠가 한번쯤 맞닥뜨린 적 있는 듯한 사람들, ‘세상은 존재하는 숫자만큼 다양한 게 아니라, 패턴 숫자만큼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어쩌면 우리여도 좋고 아니여도 좋은, 무수한 패턴 속에 던져진 미물은 아닐까.

너무나도 모범적인 - ‘나’는 깜찍하고 끔찍할 정도로 교과서적이다.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느님은 절대 속일 수 없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솔직한 자백 뿐이다. 그것이 비록 고자질이란 이름으로 힐난을 받을 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우리 동네 으뜸 말썽꾼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눈속임이 필요하다. 게다가 ‘나’는 누구에게도 의심 받지 않을 만큼 모범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작가의 말이 너무 거창하다. 냉혹한 세상과 세상의 기만성을 비웃고 경고하고 싶었다는 그는 자신이 좀 더 냉정하지 못했던 것이, 잔혹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단다. 간지럼 태우기로 세상을 비꼬는 그와 노는 것이 조금 지겨워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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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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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첫사랑 Y는 여러모로 나와는 닮지 않은 사람이었다. 성취 욕구는 너무 강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심각하게 좋아했으며 우울의 문턱에는 가본 적도 없고 문학적 소양이라고는 은물로 눈을 밝히고 찾아봐도 없는 사람이었다. 첫만남에서 나는 그를 흘려버렸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그의 웃음이 보기에 좋았고 세 번째 만남에서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새 나는 그의 밝음에 동화되어 수소풍선처럼 퐁퐁거리며 날아다녔다. 그와 함께 사람들과 섞이는 것이 흥겨웠고 그 속에서 나누는 은밀한 애정에 자주 잔소름이 돋았다. 그의 직설적 화법이 세상 어느 상징보다도 달콤하고 감동적이어서 눈물 글썽이는 일도 잦았다.
“너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바칠 수 있어.”
그가 쓴 첫 편지는 이랬다. 편지를 읽으며 그동안 내가 남발했던 비유와 상징들이 얼마나 지루하고 가식적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수식어가 배제된 채 던져지는 고백은 얼마나 당당하고 황홀한가.

베르톨트는 작가다. 그의 수상은 홍보 효과를 노린 한 기업의 전술이고 그 회사의 사장은 베르톨트가 어떤 인물인지, 그가 다루는 작품들이 어떤 류의 것인지, 최소한의 관심조차 없다. 그가 베르톨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회적 성공과 가정의 붕괴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마술처럼, 교통사고처럼, 폭풍처럼 사랑은 온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을 부르는 주문이다. 이 말 한 마디에 마리온은 남편과 아이와 풍요와 안정을 버리고 사랑을 좇는다. 하지만 도피가 한순간에 사랑을 완성시키지는 못한다.

베르톨트는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고 불안정하다. 그가 침묵의 한 가운데에 있을 때는 ‘세상의 모든 탄식’마저 입을 다물어야 했고 그럴 때면 마리온은 박물관 벤치에 앉아 차를 마시거나 거리를 걸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녀는 그를 위해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 척 꾸미고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늘 긴장한다. 그와 그녀의 사랑을 좇는 내 가슴이 부산스럽다. 가슴이 답답하고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늘 긴장하고 경직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안다. 존재 자체가 심장에 압박을 가하고 진공청소기처럼 공기 중의 산소를 모두 흡입하고. 진공의 상태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마리온은 고백한다.
‘그때 이미 순수한 사랑의 감정은 조금씩 변질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때 이미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그런 외로움이었다.’, ‘그에게 있어 나는 두 가지 다른 일 사이에 존재하는 짧은 휴식일 뿐이다.’
결국 마리온은 그들을 방문한 시아버지를 따라 귀가한다. 그리고 잘 훈련된 말처럼 기업의 안주인으로서, 행복한 아내로서, 따뜻한 엄마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베르톨트가 희곡을 완성하고 그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기 전, 늦어도 11월 전까지는.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낯설기도 하고 내 살처럼 익숙하기도 하다. 수동적 삶의 전형처럼 보이던 마리온이 사회가 부여한 질서, 세습되어 온 도덕적 관습에 대항하는 모습이 놀랍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무념무상이 저지른 만용일지라도 말이다. 두서없이 진행되는 마리온의 대사는 불안정해서 슬프고, 거듭되는 침묵 속에 불현듯 던져지는 베르톨트의 그리움은 애처롭다. 찰나에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부럽고 그들이 이어가는 위태로운 사랑은 아프다. 그런데도 그들의 사랑을 대변하는 듯한 ‘인류 역사의 모든 위대한 연인들은 지상에서 파멸을 당했다.’ 라든지 ‘그들은 어느 시대에도 늘 인류로부터 배척을 당해왔다.’ 라는 작가의 고백은 어설퍼 보인다. 그런 말들을 현수막으로 걸 만치 그들의 사랑이 알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책을 읽는 동안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사랑한다면, 이 이 책보다 훨씬 감각적이고 적나라하지만 말이다. 죽음으로 완성된 사랑, 이란 공통점 때문일까.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던 첫사랑 Y는 아직 죽지 않고 행복하거나 불행할, 나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하여 우리의 사랑은 완성되지 않았다.

죽은 이가 ‘화자’라는 설정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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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갭의 샘물 - 눈높이 어린이 문고 5 눈높이 어린이 문고 5
나탈리 배비트 지음, 최순희 옮김 / 대교출판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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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환경오염과 쾌속으로 발전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느끼게 되는 정신적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평균수명은 1900년의 47.3세에서 30년 가량이 늘었다고 한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은 각종 항생제와 치료제의 개발로 이어졌고 이러한 약품들이 인간의 주된 사망요인이 되었던 폐렴, 결핵, 장염과 매독이나 임질 등의 성병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 탓이다. 이렇듯 평균수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영생에 대한 욕망은 '게놈 유전자 지도'를 연구, 완성하기에까지 이른다.

대교출판사가 펴낸 '트리갭의 샘물'은 죽음과 영생이라는, 아이들이 읽기엔 조금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언제 어느 때 직,간접적으로 죽음과 맞닥뜨릴 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죽음이 그다지 두렵고 공포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넌지시 일러줄 수 있어 의미있다.

이 책은 숲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샘물을 마신 뒤 영원불멸의 삶을 살게 된 '터크' 가족과 그 가족과 조우하게 된 열한 살 짜리 위니가 겪은 일들을 주되게 다루고 있다. 이렇듯 허황한 소재를 채택하여 동화적 요소가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고 난 후 잠깐동안이라도 사색의 시간을 갖게 하는 건, 작가 나탈리 배비트가 제시와 터크라는 두 인물을 통해 영원한 삶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견해를 내밀어 보이며 육체적 고통도 없고 그 어떤 움직임이나 변화도 없이 영원히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제시는, 인생은 이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온갖 것을 구경하고 즐기는 것이며 그러한 삶이 얼마나 근사한 것인가에 대해 열일곱 살의 희망찬 어조로 말한다. 반면 제시의 아버지 터크는 자연의 이치란 것은 항상 새로운 것이 오고 자라나고 변화하며 움직여가다가 또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생명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수레바퀴의 움직임 같은 것이고, 진정한 행복이란 바로 그 질서의 일부, 수레바퀴의 조각이 되어 흘러가는 것일진대 그 순환의 고리에서 빠진 채 돌멩이처럼 세상에 놓여진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에 대해 고통스럽게 토로한다.

인생이 끝도 없이 길기만 하다면 과연 우리는 하루하루를 의미있는 것으로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삶은 유한하고 되돌릴 수 없으며 두 번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좌절을 극복하고 빛나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재충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노란 옷의 남자'는 영생과 생명연장의 도구를 상품화시켜 물질적 풍요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한 인물로 대변된다. 그는 터크 가족의 비밀을 알아채고, 위니를 납치했다는 혐의를 씌워 샘물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하지만 터크의 아내 '매'의 일격으로 결국은 영생의 문턱에서 죽음을 맞는다. 배비트는 남자를 죽이는 것으로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간악한 것인지에 대해 은근슬쩍 짚고 넘어간다.

'트리갭의 샘물'은 성장도 변화도 죽음도 없이, 고여 있는 물처럼 늘 반복되는 일상은 얼마나 지리멸렬하고 덧없는 것인가? 순환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인간을 불사의 신으로 만들려는, 유전자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게놈의 발견, 이러한 생명공학의 발달이 과연 인류에게 행복하고 유익하기만 한 삶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반문을 갖게 한다. 이러한 반문에 작가는 터크의 목소리를 빌어 대답한다.

"끝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야. 우리 가족처럼 영원히 사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어. 죽는 것 없이는 사는 것도 없어.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것, 이것은 그러니까 사는 것도 아닌 거야. 우리 가족은 그저 있는 거야. 길가에 놓인 돌멩이처럼 그저 존재할 뿐이야."

아이들이 이 책을 읽으며 단순히 '있을 법 하지 않은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나 상상력만 충족시키는 것이 된다면 아쉬운 책읽기가 될 것이다. 미성숙의 아이들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어른의 몫이다. 좋은 책을 사주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함께 읽고 읽은 후의 감상을 서로 나누는 것이 아닌가 한다.

혹 아이들이 주제를 비껴가더라도 "그게 아니고..." 식이 아닌 "난 이렇게 생각했어..." 식으로, 슬며시 아이의 생각에 책갈피 하나를 꽂아두는 것이 좋으리라. 내 존재가 유성처럼 스러지고 난 뒤에도 내 존재의 일부가 세상과 하나되어 호흡하고 미소짓고 탄탄한 걸음을 걷는다니, 죽음이 절멸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지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될 아이들, 얼마나 가슴 뛰고 황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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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1
전경린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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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을 읽는 일은 위험하다. 안개처럼 습하고 들풀을 씹는 듯 아린 그의 상상력에 포획되지 않고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황폐하게 말라버린 삶을 피칠겁을 해서 더욱 처참하게 그려내고 조각나고 훼손된 꿈에 무덤덤히 소금물을 들이붓는 그는 소름 끼칠 정도로 가혹하다.

현실이 배제된, 그러나 철저히 현실을 담보로 한 몽환의 세계를 떠돌다보면 어쩐지 찔끔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한 것이다. 아니다, 그의 소설 속에 눈물은 없다. 다만 섬광과도 같이 나를 관통하는 격렬한 아픔과 그 후의 나른함이 있을 뿐이다.

동물원의 노래를 그대로 제목으로 삼은 이 작품은 그러나 어쩐지 싱겁다. 예쁜 제본과 여백이 많고 덜 된 아이의 미간처럼 넓게 퍼진 행간 탓일까? 쑥쑥 읽히기는 하나 가슴을 가르는 칼날이 보이지 않는다. 갈갈이 찢기고 싶단 욕망이 불쑥 좌절을 겪는다.

'사람이 왜 허무해지는지 아니? 삶이 하찮기 때문이야. 마음을 누를 극진한 게 없기 때문에...' 라든가, '행복이란, 무지한 상태의 다른 말이죠. 행복하다는 말은 모른다는 말과 같아.' 라든가, '마치 자신의 뼈에 구멍을 내어 피리를 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따위의, 때로는 항복을 때로는 시니컬함을 때로는 서늘함을 맛보게 하던 문체는 여간해서 찾아지지 않는다.

늙은 양부와 엄마 사이에서 아들같은 의붓 동생을 보게 된 은령은 지방의 라디오 구성작가란 일을 찾아 낯선 도시로 떠난다. 은령은 그곳에서 만나게 된 시인 유경과, 유경과는 막역한 사이인 술집 사장 이진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움과 정신적 결속의 화두인 유경과 굴종과 육체적 탐닉의 서술인 이진, 그 둘 사이를 엄청난 양의 초콜릿을 먹어치우듯 결코 충족되지 않을 허기를 메우기 위해 넘나들던 은령의 사랑은 유경의 자살과 이진의 냉담한 외면이란 결말로 파국을 맞는다.

은령은 교통사고로 양부와 엄마가 죽자 양친이 살던 아파트에서 의붓 동생을 키우며 '아무도 모르게 미소지으며 열 손가락을 활짝 펴고 얼굴을 감싸안'으며 살아간다. 주제? 주제찾기란 내겐 항상 요원한 일이다. 소설안에서 은령의, 유경과 이진을 떠올릴 때면 '이야기는 지워지고 배경과 소리들과 촉감과 냄새들만, 그 사소함과 고요함과 찬란함만이 생생한 진실로 되살아'난다는 고백은 여지없이 나의 책읽기 방식에 적용되는 탓이다. 읽는 순간의 잔잔한 떨림과 소용돌이 치는 이미지들과 문장 하나씩에 국한된 상념들과 불안하고 혼미한 투닥거림만이 독서 후의 잔여물로 남는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붓동생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인 은령을 통해 전경린은 혈연공동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참된 가족애를 꿈꾼 것이라는 방민호의 평은 어쩐지 억지스럽다. 장편소설에서 8페이지 정도의 언급에 주제가 집약되어 있다는 게 도통 믿어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유경을 통해서는, 삶이 툭툭 던지는 수없이 많은 질문들과 가닥없이 이어지는 그리움들(생의 주체이자 객체로서 앓게 되는 온갖 꿈과 진실과 정체성의 측면으로서의)과 스스로 균열을 일으키는 헛점들을, 이진을 통해서는 편리와 안락함과 쾌락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단단한 부권을 주축으로 하고 있으며 지배와 복종의 계약이 파기될 시엔 어김없이 소멸되고 마는 이기적 차원으로서의 부성애(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양부라고 일갈한 그의 후기를 빌어)를 의도했다고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은령이 자신의 삶이 흔들리고 불안한 것임에도, 의붓동생을 간혹 자신이 누군가를 지독히도 사랑하여 남 몰래 낳은 사생아인 양 혼동하면서 온전히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인 것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게 편하다. 그러고보니 전경린은 유경을 통해서는 나 자신을, 이진을 통해서는 이 사회를 내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피로한 듯 보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전경린은 믿음직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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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김현영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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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한 날이다. 나의 무료함엔 괘념할 바 없다는 듯 시치미 떼고 저만치 떨어져 서 있는 청명한 하늘에 괜스레 시비라도 걸고싶다. 시베리아 벌판처럼 황막해진 두뇌에 석유를 쏟아 붓고 확 불이라도 싸지르고 싶게 심심하다.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펄떡거리는 무식한 뇌의 뭉텅이를 구경할 수 있다면 조금쯤 덜 심심할까?

73년산 김현영의 소설집 읽다. 이 소설집은 9개의 단편(냉장고, 그날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애완견, 아이콘이 있으세요, 팝콘보다 가벼운, 창백한 아프리카, 흡연,음란한, 우리가 훔친 진혼곡, 여자가 사랑할 때)으로 묶여 있다. 갈피마다 낮은 신음으로 바람이 울어대는 것만 같다. 가부장적인 권위의 맹신도인 아버지들과 상처받은 어머니들의 일탈(일탈을 규정짓는 잣대는 과연 무엇일까? 이것마저 남성 중심, 가족 중심의 사회가 학습시킨 무의식적인 편견은 아닐까?), 보편적 성장의 단위를 갖지 못한 아이들이 제각각 떠돌아다닌다. 환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동화적 신비감이나 행복의 뉘앙스가 아닌 ‘절규’의 초상과 같다. 물론 뭉크의 그림처럼 그악스럽게 입을 벌린 채 자신의 절망을 토로하진 않는다. 다만 가을을 누비는 바람처럼 스산할 따름이다.

먹을 것이라기 보다는 보기 좋은 조형물과도 같은 음식들을 모두 쏟아내고 냉장고 속에 들어가 안도하는 '내'<냉장고>가 있기도 하고 실종된 내가 애완견의 눈을 통해 남자친구의 섹스 장면을 목격<애완견>하기도 한다. - 이 장면은 ‘존 말코비치 되기’를 연상시킨다. 그런가하면 ‘그’에게 있어 컴퓨터의 존재만큼도 값어치 없는 자신을 비관하며 기꺼이 스스로 컴퓨터가 되고자 마우스를 질 안으로 밀어 넣는 ‘너’<아이콘이 있으세요>도 있다. - 이건 영화 ‘섬’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의 성기에 낚시바늘을 끼워 넣는 장면(여성의 성기, 자궁은 잉태의 상징이다. 성소를 막는 행위, 성소를 자해하는 행위는 실존을 부정하는 행위이자 희망을 포기하는 행위로 읽혀진다)과도 닮았다. 자신의 아이를 목 졸라 죽인 어머니와 그 삶을 답습하는, 정신착란에 시달리는 나<창백한 아프리카>, 할아버지 나이 또래의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손녀, 죽음에 이른 손녀와의 조우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위장하는 할머니, 단단한 소통 불가<우리가 훔친 진혼곡>.

작가는 해체된 가족, 인간관계의 비감함을 낯선 상상력을 이용해 풀어 보이며 인간성 회복을 주장하는 듯 하지만 그리 설득력 있게 가슴으로 떨어지진 않는다. 도덕 교과서만큼이나 진부하고 보편화된 주제가 아이콘화 되어 있는 현대인에게 먹힐 리가 없다. 하지만 ‘준준 엽기’ 정도는 되어 보이는 작가의 상상력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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