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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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첫사랑 Y는 여러모로 나와는 닮지 않은 사람이었다. 성취 욕구는 너무 강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심각하게 좋아했으며 우울의 문턱에는 가본 적도 없고 문학적 소양이라고는 은물로 눈을 밝히고 찾아봐도 없는 사람이었다. 첫만남에서 나는 그를 흘려버렸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그의 웃음이 보기에 좋았고 세 번째 만남에서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새 나는 그의 밝음에 동화되어 수소풍선처럼 퐁퐁거리며 날아다녔다. 그와 함께 사람들과 섞이는 것이 흥겨웠고 그 속에서 나누는 은밀한 애정에 자주 잔소름이 돋았다. 그의 직설적 화법이 세상 어느 상징보다도 달콤하고 감동적이어서 눈물 글썽이는 일도 잦았다.
“너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바칠 수 있어.”
그가 쓴 첫 편지는 이랬다. 편지를 읽으며 그동안 내가 남발했던 비유와 상징들이 얼마나 지루하고 가식적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수식어가 배제된 채 던져지는 고백은 얼마나 당당하고 황홀한가.

베르톨트는 작가다. 그의 수상은 홍보 효과를 노린 한 기업의 전술이고 그 회사의 사장은 베르톨트가 어떤 인물인지, 그가 다루는 작품들이 어떤 류의 것인지, 최소한의 관심조차 없다. 그가 베르톨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회적 성공과 가정의 붕괴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마술처럼, 교통사고처럼, 폭풍처럼 사랑은 온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을 부르는 주문이다. 이 말 한 마디에 마리온은 남편과 아이와 풍요와 안정을 버리고 사랑을 좇는다. 하지만 도피가 한순간에 사랑을 완성시키지는 못한다.

베르톨트는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고 불안정하다. 그가 침묵의 한 가운데에 있을 때는 ‘세상의 모든 탄식’마저 입을 다물어야 했고 그럴 때면 마리온은 박물관 벤치에 앉아 차를 마시거나 거리를 걸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녀는 그를 위해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 척 꾸미고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늘 긴장한다. 그와 그녀의 사랑을 좇는 내 가슴이 부산스럽다. 가슴이 답답하고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늘 긴장하고 경직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안다. 존재 자체가 심장에 압박을 가하고 진공청소기처럼 공기 중의 산소를 모두 흡입하고. 진공의 상태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마리온은 고백한다.
‘그때 이미 순수한 사랑의 감정은 조금씩 변질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때 이미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그런 외로움이었다.’, ‘그에게 있어 나는 두 가지 다른 일 사이에 존재하는 짧은 휴식일 뿐이다.’
결국 마리온은 그들을 방문한 시아버지를 따라 귀가한다. 그리고 잘 훈련된 말처럼 기업의 안주인으로서, 행복한 아내로서, 따뜻한 엄마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베르톨트가 희곡을 완성하고 그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기 전, 늦어도 11월 전까지는.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낯설기도 하고 내 살처럼 익숙하기도 하다. 수동적 삶의 전형처럼 보이던 마리온이 사회가 부여한 질서, 세습되어 온 도덕적 관습에 대항하는 모습이 놀랍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무념무상이 저지른 만용일지라도 말이다. 두서없이 진행되는 마리온의 대사는 불안정해서 슬프고, 거듭되는 침묵 속에 불현듯 던져지는 베르톨트의 그리움은 애처롭다. 찰나에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부럽고 그들이 이어가는 위태로운 사랑은 아프다. 그런데도 그들의 사랑을 대변하는 듯한 ‘인류 역사의 모든 위대한 연인들은 지상에서 파멸을 당했다.’ 라든지 ‘그들은 어느 시대에도 늘 인류로부터 배척을 당해왔다.’ 라는 작가의 고백은 어설퍼 보인다. 그런 말들을 현수막으로 걸 만치 그들의 사랑이 알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책을 읽는 동안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사랑한다면, 이 이 책보다 훨씬 감각적이고 적나라하지만 말이다. 죽음으로 완성된 사랑, 이란 공통점 때문일까.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던 첫사랑 Y는 아직 죽지 않고 행복하거나 불행할, 나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하여 우리의 사랑은 완성되지 않았다.

죽은 이가 ‘화자’라는 설정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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