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김현영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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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료한 날이다. 나의 무료함엔 괘념할 바 없다는 듯 시치미 떼고 저만치 떨어져 서 있는 청명한 하늘에 괜스레 시비라도 걸고싶다. 시베리아 벌판처럼 황막해진 두뇌에 석유를 쏟아 붓고 확 불이라도 싸지르고 싶게 심심하다.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펄떡거리는 무식한 뇌의 뭉텅이를 구경할 수 있다면 조금쯤 덜 심심할까?

73년산 김현영의 소설집 읽다. 이 소설집은 9개의 단편(냉장고, 그날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애완견, 아이콘이 있으세요, 팝콘보다 가벼운, 창백한 아프리카, 흡연,음란한, 우리가 훔친 진혼곡, 여자가 사랑할 때)으로 묶여 있다. 갈피마다 낮은 신음으로 바람이 울어대는 것만 같다. 가부장적인 권위의 맹신도인 아버지들과 상처받은 어머니들의 일탈(일탈을 규정짓는 잣대는 과연 무엇일까? 이것마저 남성 중심, 가족 중심의 사회가 학습시킨 무의식적인 편견은 아닐까?), 보편적 성장의 단위를 갖지 못한 아이들이 제각각 떠돌아다닌다. 환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동화적 신비감이나 행복의 뉘앙스가 아닌 ‘절규’의 초상과 같다. 물론 뭉크의 그림처럼 그악스럽게 입을 벌린 채 자신의 절망을 토로하진 않는다. 다만 가을을 누비는 바람처럼 스산할 따름이다.

먹을 것이라기 보다는 보기 좋은 조형물과도 같은 음식들을 모두 쏟아내고 냉장고 속에 들어가 안도하는 '내'<냉장고>가 있기도 하고 실종된 내가 애완견의 눈을 통해 남자친구의 섹스 장면을 목격<애완견>하기도 한다. - 이 장면은 ‘존 말코비치 되기’를 연상시킨다. 그런가하면 ‘그’에게 있어 컴퓨터의 존재만큼도 값어치 없는 자신을 비관하며 기꺼이 스스로 컴퓨터가 되고자 마우스를 질 안으로 밀어 넣는 ‘너’<아이콘이 있으세요>도 있다. - 이건 영화 ‘섬’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의 성기에 낚시바늘을 끼워 넣는 장면(여성의 성기, 자궁은 잉태의 상징이다. 성소를 막는 행위, 성소를 자해하는 행위는 실존을 부정하는 행위이자 희망을 포기하는 행위로 읽혀진다)과도 닮았다. 자신의 아이를 목 졸라 죽인 어머니와 그 삶을 답습하는, 정신착란에 시달리는 나<창백한 아프리카>, 할아버지 나이 또래의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손녀, 죽음에 이른 손녀와의 조우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위장하는 할머니, 단단한 소통 불가<우리가 훔친 진혼곡>.

작가는 해체된 가족, 인간관계의 비감함을 낯선 상상력을 이용해 풀어 보이며 인간성 회복을 주장하는 듯 하지만 그리 설득력 있게 가슴으로 떨어지진 않는다. 도덕 교과서만큼이나 진부하고 보편화된 주제가 아이콘화 되어 있는 현대인에게 먹힐 리가 없다. 하지만 ‘준준 엽기’ 정도는 되어 보이는 작가의 상상력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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