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1
전경린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전경린을 읽는 일은 위험하다. 안개처럼 습하고 들풀을 씹는 듯 아린 그의 상상력에 포획되지 않고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황폐하게 말라버린 삶을 피칠겁을 해서 더욱 처참하게 그려내고 조각나고 훼손된 꿈에 무덤덤히 소금물을 들이붓는 그는 소름 끼칠 정도로 가혹하다.

현실이 배제된, 그러나 철저히 현실을 담보로 한 몽환의 세계를 떠돌다보면 어쩐지 찔끔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한 것이다. 아니다, 그의 소설 속에 눈물은 없다. 다만 섬광과도 같이 나를 관통하는 격렬한 아픔과 그 후의 나른함이 있을 뿐이다.

동물원의 노래를 그대로 제목으로 삼은 이 작품은 그러나 어쩐지 싱겁다. 예쁜 제본과 여백이 많고 덜 된 아이의 미간처럼 넓게 퍼진 행간 탓일까? 쑥쑥 읽히기는 하나 가슴을 가르는 칼날이 보이지 않는다. 갈갈이 찢기고 싶단 욕망이 불쑥 좌절을 겪는다.

'사람이 왜 허무해지는지 아니? 삶이 하찮기 때문이야. 마음을 누를 극진한 게 없기 때문에...' 라든가, '행복이란, 무지한 상태의 다른 말이죠. 행복하다는 말은 모른다는 말과 같아.' 라든가, '마치 자신의 뼈에 구멍을 내어 피리를 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따위의, 때로는 항복을 때로는 시니컬함을 때로는 서늘함을 맛보게 하던 문체는 여간해서 찾아지지 않는다.

늙은 양부와 엄마 사이에서 아들같은 의붓 동생을 보게 된 은령은 지방의 라디오 구성작가란 일을 찾아 낯선 도시로 떠난다. 은령은 그곳에서 만나게 된 시인 유경과, 유경과는 막역한 사이인 술집 사장 이진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움과 정신적 결속의 화두인 유경과 굴종과 육체적 탐닉의 서술인 이진, 그 둘 사이를 엄청난 양의 초콜릿을 먹어치우듯 결코 충족되지 않을 허기를 메우기 위해 넘나들던 은령의 사랑은 유경의 자살과 이진의 냉담한 외면이란 결말로 파국을 맞는다.

은령은 교통사고로 양부와 엄마가 죽자 양친이 살던 아파트에서 의붓 동생을 키우며 '아무도 모르게 미소지으며 열 손가락을 활짝 펴고 얼굴을 감싸안'으며 살아간다. 주제? 주제찾기란 내겐 항상 요원한 일이다. 소설안에서 은령의, 유경과 이진을 떠올릴 때면 '이야기는 지워지고 배경과 소리들과 촉감과 냄새들만, 그 사소함과 고요함과 찬란함만이 생생한 진실로 되살아'난다는 고백은 여지없이 나의 책읽기 방식에 적용되는 탓이다. 읽는 순간의 잔잔한 떨림과 소용돌이 치는 이미지들과 문장 하나씩에 국한된 상념들과 불안하고 혼미한 투닥거림만이 독서 후의 잔여물로 남는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붓동생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인 은령을 통해 전경린은 혈연공동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참된 가족애를 꿈꾼 것이라는 방민호의 평은 어쩐지 억지스럽다. 장편소설에서 8페이지 정도의 언급에 주제가 집약되어 있다는 게 도통 믿어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유경을 통해서는, 삶이 툭툭 던지는 수없이 많은 질문들과 가닥없이 이어지는 그리움들(생의 주체이자 객체로서 앓게 되는 온갖 꿈과 진실과 정체성의 측면으로서의)과 스스로 균열을 일으키는 헛점들을, 이진을 통해서는 편리와 안락함과 쾌락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단단한 부권을 주축으로 하고 있으며 지배와 복종의 계약이 파기될 시엔 어김없이 소멸되고 마는 이기적 차원으로서의 부성애(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양부라고 일갈한 그의 후기를 빌어)를 의도했다고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은령이 자신의 삶이 흔들리고 불안한 것임에도, 의붓동생을 간혹 자신이 누군가를 지독히도 사랑하여 남 몰래 낳은 사생아인 양 혼동하면서 온전히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인 것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게 편하다. 그러고보니 전경린은 유경을 통해서는 나 자신을, 이진을 통해서는 이 사회를 내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피로한 듯 보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전경린은 믿음직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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