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떨림
마르시아스 심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기다림이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어느 장소이든, 어떠한 형태이든지 간에 얼마쯤의 조바심과 안달, 지루함을 경유한다. 속 간지러워지는 무엇, 나도 모르는 새 미간에 주름 만드는 무엇, 궁금증과 은근한 화의 고랑을 애타게 걷게 하는 그 무엇, 기다림이다.
쾌속의 세상을 열어주는 인터넷조차 이런 기다림과 무관하지 않다. CDP와 책 몇 권을 주문해 놓고 아침부터 목이 빠져라 전화벨 소리, 계단을 올라서는 발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기다리는 건 분명 클릭 몇 번으로 내 소유가 될 물품들이었을 건데 촉수를 곤두세우고 기다림에 빠져 있다보니 혹 내가 기다리는 건 내 집의 차임벨을 누르고 문을 열면 반짝, 하고 튀어 오를 사람의 모습은 아닌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낯설게 찬 공기를 몰고 올 사람이 은근한 미소를 깨물고 차게 식은 두 귀를 쫑긋 세운, 토끼를 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검정색 바탕에 푸른 나방이 그려져 있는 마르시아스 심의 '떨림'을 방금 끝냈다. 누군가의 감상도 올라와 있거니와 여덟 가지 섹스에 대한 단상이라거나, 각각의 단편에서 말하는 줄거리의 요약 따위는 필요 없겠다. 아직까지, 부연과 되새김 질은 노인의 몫이라는 생각이 있어서일까?
아무튼 난 좀 달리 읽었다는 것인데, 이 단편들은 각기 편, 편으로 존재하면서도 교묘한 유기적 결합의 형태를 유지한다. 나무와 숲의 관계 같다고나 할까? '딸기'와 '샌드위치'에서 나타나는 화자는 섹스를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을 배설하는 단순 기능으로 인식한다. 사랑이나 도덕적 양심이나 죄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당연히 화자의 시선은 자기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한 남성적 시각이다, 라고 이해하는 건 좀 주저된다. 아직까지 섹스를 사랑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는 대다수의 순수함에겐 가혹한 발언일 테니 말이다. 차라리 사춘기적 반항과 불안, 혼란이 빚은 하나의 양상이려니 치부하는 게 훨씬 따뜻하고 안전하다.
이렇듯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이 타인에게로 옮아가기 시작하는 게 바로 '나팔꽃'이다. 일방적 소통이 쌍방향으로 범위를 넓히고 배설을 넘어선 인간과의 교류로써의 섹스가 언급된다. 이때 부터 난 조금씩 편해지고 약간의 느긋함까지 느껴가며 화자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랑이란 감정은 인간을 주눅 들게 하고 번민 속을 서성이게 하며 뜬금없이 쏟아지는 눈물로 황망스럽게 하는 것일까? 나이 사십에서야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화자는 '피크닉'에서부터 눈물을 쏟기 시작한다. 잘 감추어 버려서, 사랑인가? 아닌가? 일편 알쏭달쏭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사랑을 발화하기 멋적어하는 화자의 부끄러움 탓은 아니었는가 싶다. 아, 사실 '우산'에서도 눈물은 있다. 하지만 그건 대상을 향한 눈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한 연민이라고 보여진다. 해서 난 눈물의 시작을 '피크닉'에 두기로 한다.
"언젠간 손을 잡고 서울 거리를 걸어다닐 수 있을까요?"
피크닉의 여주인공 대사지만 난 자꾸만 그 말이 화자의 목젖을 타고 넘어온 말이라고, 우기고 싶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자의 꿈, 소박하지만 간단하지는 않은, 그래서 애닯고 서러운 꿈.
종이를 넘길수록 속도가 엷어진다. 방종과 무질서가 주던 경쾌함이 사라지고 중저음의 고독이 자꾸만 읽히는 탓이다. 쓸쓸하다, 스산하다, 고독의 과잉으로 내려앉을 것만 같다. 사는 건 가혹할수록 유쾌하다니...
마악, 김 빠진 탄산음료의 마지막 열기처럼 눈이 뿌리기 시작했다. 계속되면, '내일은 또 미끄럽겠구나, 차도 많이 막히겠구나.' 한 살 더 먹은 이의 감상이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