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화의 주인공
하성란 지음 / 작가정신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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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정일이었던가?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소유하지 못하면 금세 외로워지는 서울, 이라고. 가을을 갖지 못해 외로운가? 지난 해, 목구멍 얼얼하고 뇌세포 하나하나까지 치명적일 정도로 부풀어올랐던 가을이 올해는 없다. 약간 평온하고 약간 바쁘고 약간의 조바심과 약간의 그리움, 약간씩 안도하고 약간씩 즐겁고 약간씩 두려운 정도다. 나열하고 보니 꽤 밋밋한 삶이다. 그 무엇도 희망이 아니고 그 무엇도 절망은 아닌 것처럼, 말하자면 무수한 반의어의 틈새를 꽤나 잘 서성대고 있다는 것이다.

골라잡는 책들도 그렇다. 하드커버 피하기, 쪽수 많은 것 피하기, 작은 활자 피하기, 무겁거나 거드름 피운 제목 피하기. 그런데, 그러함에도 하성란을 잡다니, 약간의 주저와 후회. 그녀와의 첫 만남이 꽤 곤혹스러웠다는 기억이 아직 고스란한 탓이다. 바뜨, 그러나, 삶의 방식은 책을 읽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난감한 얘기를 수월하고 심상하게 읽는다. 음하하, 나는 더 이상 좌초되지 않는다. 씨익-.

조회 시간, 세 명의 여학생이 학교 탈출에 성공한다. 문제아 기질이 잠재된 두 명의 여학생과 나 닮은 전교 일등의 모범생 한 명. 같은 시간, 이사장의 차를 긁고 곤욕스러워하던 수학 선생도 학교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을 빌미로 노란색 스포츠카를 유유히 몰며 교문을 빠져나간다. 그의 뒤로 아까시향 어지럽다. 이들이 만나게 되는 곳은 중국집이다. 그리고 예정된 수순대로 바다로 향한다. 하성란도 말했다시피 왜 가출한 이들은 한결같이 바다로 떠나는 것일까? 바다가 이 세상의 처음이기라도 하듯이, 또는 세상의 마지막이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여학생 셋은 서로에게 보철교정기같은 존재다. 불편하고 달그락거리면서도 일탈이라는 은밀한 담론으로 서로를 동지로 묶을 수밖에 없는. 거추장스런 교정기를 빼고 나면 고른 치아가 함박거리듯이 일탈은 서로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휘발시킨다. 화해 무드에 비극적 요소의 삽입은 당연지사다. 그런 게 없으면 국이 싱겁다. 모범생인 상숙이 일상에서의 탈출을 도모했던 건 삶에서의 일탈을 선고받은 병원 챠트 탓이다.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싶은 상숙이 패러 세일링으로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을 다스리는 건 하나의 은유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싶다. 일상은 언제나 우리의 날개를 꺾고 지상에 뿌리내리기를 종용한다. 하늘은 동경의 대상이고 잃어버린 날개는 몽환이자 그리움이다. 꿈과 대치된 삶 속에서 우리는 울적하다. 열정이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곳이 있다면 거기가 천국이라고 한 것도 장정일인가?

절망과 무기력의 공습에 시달리던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조금 다른 느낌이었을까? 가슴이 아프지도, 혼탁하지도, 암울하지도 않다. 오히려 조금 싱겁다. 잔뜩 힘 들어간 작가의 말을 읽고 난 후 수전증 환자처럼 책을 연 탓이기도 할 게다. 최성실의 해설에 감탄한다. <순응과 일탈 사이, 그 움직이는 균형을 위하여>란 제목, 참 기막히다. 문학평론가란 치들의 말빨과 허풍은 언제나 놀랍도록 감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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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당신은 믿을 수 없겠지만
마르크 레비 지음, 김운비 옮김 / 북하우스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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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주 슬픈 시를 읽고싶다. 아주 슬픈 영화를 보고싶다. 아주 슬픈 음악을 듣고싶다. 그리고, 아주 슬픈,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안의 수분이 모두 말라버릴 정도로 오랜 시간 정성 들여 울고 나면 잘 마른 낙엽처럼 그렇게 거리를 걸어도 좋으리라.

서늘하다. 키 큰 나무들이 맥없이 허우적거리고 사람의 집들이 벌겋게 상기된 채 언덕 높이 가득하다. 책상등 하나 켜놓고 모니터의 푸른빛을 응시하는 일은 즐겁다. 일체의 소음이 배제된 그런 적막과 함께라면 더 좋다. 어떤 적막은 부재와 동의어이며, 다른 어떤 것은 간혹 공감으로 풍요롭다는 말을 찾아낸다. 뭉툭한 연필로 구부정하게 밑줄을 긋는다. 지금 내 곁에 누운 적막이 비록 짓무른 안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지라도 모처럼의 적막에 위안을 얻는다. 가을이, 뽀얀 속살 드러낸 채 침상으로 파고드는 느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당신은 믿을 수 없겠지만>, 마르크 레비의 장편소설이다. 기존의 프랑스 소설에서 느껴지던 애매모호하고 지루하고 관념적인 서술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온갖 리뷰들이 언급한 대로 코미디와 멜로로 가득한 서사가 모포처럼 따뜻한 소설이다. 소설이 출판되기도 전에 드림웍스와 영화 제작 계약을 맺기도 했다니 출판사인 로베르 라퐁사의 상술의 전략이 얼마나 치밀했던가 알고도 남음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교통사고로 코마에 빠진 로렌과, 살아있는 육체에서 빠져나온 로렌의 유령, 그리고 그런 로렌을 지상에서 유일하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남자, 아담의 이야기다. 설정 자체에서 빤히 들여다보이듯 아담은 로렌으로 인해 여러 우여곡절을 겪는다. 둘의 로맨스가 싹트겠구나 하는 짐작 또한 빤하다. 빤하다는 말이 이 소설에 대한 폄하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내 감탄한다. 작가의 전문 분야가 건축이고 자신의 아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읽을 수 있는 긴 이야기를 쓰고자 소설을 창작했다는 점을 들면 더 그렇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작가의 의학상식은 놀랄만하다. 소설 준비 과정이 얼마나 치밀하고 촘촘했던가, 혀를 내두를 따름이다. 허투로 소설 쓰자고 덤비는 일 따위 무 자르듯 해야겠구나 하는 새삼스런 다짐까지 할 지경이다. 생을 바라보는 시선도 따뜻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는 이야기여서 그런지 생에 대한 응대의 방식 또한 긍정적이고 겸허하다. 투덜이 스머프처럼 삶은 내게만 가혹하고 냉담하며 야박하다는 식의 불만만 늘어놓는 나 같은 인간에게 있어선 반성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이를 테면 이런 구절들.

- 이봐, 누구도 행복의 집주인은 아냐. 간간이 임대계약을 하고 세입자가 되는 행운을 잡을 따름이지. 아주 착실하게 셋돈을 치러야 한다구. 아니면 곧바로 쫓겨나는 거야.

- 그는 따지 않은 열매에 대해 이야기했다. 땅바닥에서 썩어가도록 내버려둔 열매들에 대해서. '소홀함으로, 습관으로, 확신이나 자만심으로 인해 결코 소비되지 않을 행복의 즙액'에 대해서.

- 행동해! 회의에 빠지지 말고. 제 자신의 선택을 밀고 나가지 못하면 어느 구석에선가 삶에 대한 혐오가 생겨나는 거야.

- 삶은 경이롭지. 이런, 사람이 그걸 알아차리는 때는 삶이 벌써 살금살금 발끝으로 물러나고 있는 때지.

- 삶에 동행하는 의혹과 선택은 우리 감정의 현들을 떨게 하는 두 힘이다. 오직 그 떨림의 조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해라.


어둠이 윤기 반지르르해지는 시간이다. 어둠은 빛 속에서 밝아진다. 사랑이 이별로 밝아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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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 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황보석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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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년 만에 만난 친구들과 이런저런 쓰잘데기 없는 수다들로 맥주잔을 비우던 게 꼭 보름 전이다. 뭉치자 빠샤! 구호를 외치며 강화도 행을 결정한 것이 새벽 1시쯤이었고, 일어나? 말어? 이불 속에서 한 시간 남짓 뼈를 옭죄는 고뇌 끝에 자는 게 남는 거다 결심을 굳힌 건 아침 8시였으며, 겨우 겨우 침대에서 몸을 빼낸 건 해가 중천을 넘어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오후 무렵이었다.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부재중 전화는커녕 메시지 한 줄 남겨있지 않은 터라 은근히 부아가 솟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모닝콜을 하지는 못할지언정, 갈 거냐 아니냐 가타부타 말 한 마디 없는 녀석들이 괘씸하기만 했다. 그렇게 5분을 괘씸해하다가 난 눈 뿌옇게 친구들이 고마워졌다. 우린 서로를 너무도 잘 알았던 것이다! 가지 않기로 결정했을 놈에게 괜히 전화 걸어서 겸연쩍음과 미안함으로 몰기 싫었던 게지, 기특한 녀석들. 아무튼 요즈음의 귀찮음병은 대책이 없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다는 말은 실로 명언이다. 이런 와중에 그래도 근근이 책읽기가 이어진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나는 무위를 견딜 수 없는 것일까? 귀찮음병으로 시작된 일상의 무미건조와 나태와 방종에 대한 책임을 책읽기에 전가하려는 것일까?

페루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궁둥이인지 궁뎅이인지 하는 책이 요사스럽기 그지 없다는 평에 혹해 인터넷 서점을 뒤졌으나 절판이란다. 롤랑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를 친구에게 줘버리고 절판 당한 이후 최고로 갑갑하다. 읽고 싶은 때에 읽지 못하게 하는 건 얄미운 당신이다. 어쩔 수 없지,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한 사연이라도 읽는 수밖에.

일단, 이 책은 무진장 재미있다. 구성도 탄탄한데다 요사의 장난질이 어찌나 깜찍한지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다. 책 읽는 간간이 요사의 요사스런 눈빛(정말이다!)을 넘겨다 보며 잔잔한 소름 쓸어내리는 일도 즐겁다. 갈 수록 서사에 주목하게 된다. 물론 문체의 매혹을 떨칠 수는 없다. 하지만 일군의 우리나라 여성작가들에게 식상해진 건 사실이다. 그들에겐 비틂이 없다. 발가벗겨진 살덩어리만 보일 뿐 움직일 때마다 살짝 살짝 드러나는 은밀한 유혹이 없다. 지루할 정도로 심각하고 짜증날 정도로 아름답다. 너무 촘촘해서 좀체로 뇌의 한 부분을 툭 끊어놓고 흐느적거릴 짬이 없다. 변화가 필요하다.

이 책은 실제와 허구가 샌드위치식으로 정렬되어 있다. 그러니까 요사가 훌리아 아주머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기까지의 자전적 이야기와 라디오 방송작가인 페드로 카마초가 쓴 드라마 대본을 윤색한 허구가 하나의 챕터를 건너 뛰면서 진행된다. 하지만 이 미련 곰탱이는 그것을 1권의 끄트머리 쯤에야 눈치를 챘다는 것인데, 이쯤이면 정말 날라리 독자라 자부해도 될만하지 뭔가. 요사의 장난 놀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카마초의 드라마 대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뒤섞기도 하고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기도 하면서 카마초가 혼동하는 부분이란 친절한 설명 하에 주석을 달거나 방점을 찍어두기도 한다. 깜찍하기도 하여라. 읽는 중간중간 작가의 재기발랄함에 코가 막힌다. 덕분에 휴지를 한 다라이 정도 풀어냈다. 고 하면 거짓말이고, 아무튼 유쾌한 작가인 건 분명하다. 요사의 다른 소설들도 챙겨봐야겠다는 다짐으로 불끈!

그런데 그 날, 친구들은 강화도에 다녀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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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의 향기
쓰지 히토나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산성미디어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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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곤비, 사고의 곤비, 행위의 곤비. 아스팔트에 붙어있는 묵은 껌처럼 방구들에 눅진하게 달라붙은 무위의 영혼. 닦달하는 목소리가 없다면 단 한 줄도 읽어 내릴 수 없을 가난한 독서. 그 와중에 비닐 포대 위에 실린 어린아이처럼 몇 시간만에 끝내버린 질주로서의 독서.

산성미디어 출간, 쓰지 히토나리 작의 '질투의 향기' 읽다. 노란색 표지로 둘러 쌓인 책의 오른 쪽 하단은 눈사람 모양의 구멍이 뚫린 채고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건 샘플 향수다. 용기(容器)를 꺼내고 난 후의 책 생김새로 말하자면 심장을 관통한 총알이 빠져나간 구멍처럼 흉물스럽다. 아, 책에까지 이런  장난을 하다니... 너무 싫다. 덕분에 책장을 넘기는 순간 순간, 내 손가락들은 익숙치 못한 허방에 빠져 허둥대곤 한다.

내용은 단순하다.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의심과 질투와 배신과 복수의 향기를 전면으로 드러낸 채 남녀의 사각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의 세련된 지적 언어가 일상의 공감대를  형성케 하고 있지 않다면 중, 고등학교 시절 우리의 감성을  지배하던 로맨스 소설과도 별반 다를 게 없는 소설이다.

건축가 마사노 에이지와 그의 아내 사키, 치유로서의  음악을 연구하는 '나'와 아로마 테라피를 공부하는 나의 애인 미노리가 '활력의 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와 사키는 마사노와 미노리가 주고받는 눈빛을  '배 신'의 징조로 받아들이며 복수를 꿈꾼다. 복수의 도구로써 행해지는 섹스. 하지만 그들의 섹스는  '뭔가를 잠깐 착각하는 바람에 시작되는 사랑이 있다. 한편 의미를 잘못 받아들이거나 잘못 해석함으로써 시작되는 사랑도 있다.' 라는 말에서도 보여지듯 '미칠 정도로 흉폭하고 아플 정도로 부서지기 쉬운 관계'인 사랑으로 발전한다.

혼돈의 끝에 나는 '활력의 뜰'에서 쓰여질 '목신의 오후'라는 음악을 완성한 후 파리로 떠난다. 일상이 철저히 배제된 공간에서 나는 자유로운 고독에 젖어 무위의 날들을 보낸다. 그 공간에 뜻하지 않은 소나기처럼, 균열을 일으키는 단 한 방의 총성처럼 나타난 사키. 그들은 인생의 출구를 찾기라도 한 것처럼 먹고 마시고 쇼핑하고 산보하고 섹스를 나누며  휴식의 날들을 보내지만  '일상을 지루하게 하지 않는 노력'에 서서히 지쳐 가는 서로를  발견한다. '생활'과 닿아 있지 않고 '생활'을 길어 올리지 못하는 관계란 역시 불안과 회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가? 란 질문을 만드는 부분이다. 질투가 만든 오해가 또 다른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은 외롭게 남겨진 두 사람간의 새로운 사랑을 싹트게 하지만...

메모할 것이 너무 많아 손이  바쁜 독서였다. 흔하디 흔하고, 낡아빠질 대로 낡아빠져서 이젠 누구도 더 이상 감동하거나 탄성을 지르지 않는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작가는 연애 고수처럼, 연애에 달통한 사람처럼 쉬지 않고 떠들어댄다. 그 떠듦이  너무나 그럴 듯 하고 나를  들켜버린 것처럼 속엣 것들만으로 가득 차 있어서 일편 당혹스럽고 불편하기까지 하다.

이런 구절들.
- 변화가 없는 환경에서 느끼는 지루함이란, 요컨대 사람의 죽음이다. 허무에서 도망가기 위해 사람은 사랑을 하고, 사랑 속에 자신이 아직 생물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찾아내려 한다.

- 사랑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체제를 유지하고 붕괴를 미루자, 라는 것이다.

- 거짓말은 사랑의 기간을 연장시키는 유일한 도구다.

- 십대 시절 의심할 것 없이 빛나기만 했던 청춘과는 달리 인생의 반환점인 삼십대는 완전히 전쟁터였어. 참호 속에서 가만히 적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어. 아니,  그것보다 더 무서워....... 모든 것을 잃고 비로소 나는 자립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 뭐가 슬퍼요? 살아 있는 것이,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 인생이란 그런 거야. 출구를 쉽게 찾아선 안 돼. 출구는 출구가 아니야. 출구는 입구이기도 해. 급하게 서둘러도 도달할 수 있는 장소는 정해져 있어. 계속 멈춰 서 있어도 언젠가는  도달해. 그것이 인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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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림
마르시아스 심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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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어느 장소이든, 어떠한  형태이든지 간에 얼마쯤의 조바심과 안달, 지루함을 경유한다.  속 간지러워지는 무엇, 나도 모르는 새 미간에 주름 만드는 무엇, 궁금증과 은근한 화의 고랑을 애타게 걷게 하는 그 무엇, 기다림이다.

쾌속의 세상을 열어주는  인터넷조차 이런 기다림과 무관하지 않다. CDP와 책 몇 권을 주문해 놓고 아침부터 목이 빠져라 전화벨 소리, 계단을 올라서는 발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기다리는 건 분명 클릭 몇 번으로 내 소유가 될 물품들이었을 건데 촉수를 곤두세우고 기다림에 빠져 있다보니 혹 내가 기다리는 건 내 집의 차임벨을 누르고 문을 열면 반짝, 하고 튀어 오를 사람의 모습은 아닌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낯설게 찬  공기를 몰고 올 사람이 은근한  미소를 깨물고 차게 식은 두  귀를 쫑긋 세운, 토끼를 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검정색 바탕에 푸른 나방이 그려져 있는 마르시아스 심의  '떨림'을 방금 끝냈다. 누군가의 감상도 올라와 있거니와 여덟 가지 섹스에 대한  단상이라거나, 각각의 단편에서 말하는 줄거리의 요약 따위는 필요 없겠다. 아직까지, 부연과  되새김 질은 노인의 몫이라는 생각이 있어서일까?

아무튼 난 좀 달리 읽었다는 것인데, 이 단편들은 각기 편, 편으로 존재하면서도 교묘한 유기적 결합의 형태를 유지한다. 나무와 숲의 관계 같다고나 할까? '딸기'와 '샌드위치'에서 나타나는 화자는 섹스를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을 배설하는 단순  기능으로 인식한다. 사랑이나 도덕적 양심이나 죄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당연히 화자의 시선은 자기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한 남성적 시각이다, 라고 이해하는 건  좀 주저된다. 아직까지 섹스를 사랑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는 대다수의 순수함에겐 가혹한 발언일 테니 말이다. 차라리 사춘기적 반항과 불안, 혼란이 빚은 하나의 양상이려니 치부하는 게  훨씬 따뜻하고 안전하다.

이렇듯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이 타인에게로 옮아가기 시작하는  게 바로 '나팔꽃'이다. 일방적 소통이 쌍방향으로 범위를 넓히고 배설을 넘어선 인간과의 교류로써의 섹스가 언급된다. 이때 부터 난 조금씩 편해지고 약간의 느긋함까지 느껴가며  화자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랑이란 감정은 인간을 주눅 들게  하고 번민 속을 서성이게  하며 뜬금없이 쏟아지는 눈물로 황망스럽게 하는 것일까? 나이 사십에서야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화자는 '피크닉'에서부터 눈물을 쏟기 시작한다. 잘 감추어 버려서, 사랑인가?  아닌가? 일편 알쏭달쏭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사랑을 발화하기 멋적어하는 화자의 부끄러움 탓은 아니었는가 싶다. 아, 사실 '우산'에서도 눈물은 있다. 하지만 그건 대상을 향한 눈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한 연민이라고 보여진다.  해서 난 눈물의 시작을 '피크닉'에 두기로 한다.

 "언젠간 손을 잡고 서울 거리를 걸어다닐 수 있을까요?"
피크닉의 여주인공 대사지만 난 자꾸만 그 말이 화자의 목젖을 타고 넘어온 말이라고, 우기고 싶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자의 꿈, 소박하지만 간단하지는 않은, 그래서 애닯고 서러운 꿈.

종이를 넘길수록 속도가 엷어진다. 방종과 무질서가 주던 경쾌함이 사라지고 중저음의 고독이 자꾸만 읽히는 탓이다. 쓸쓸하다, 스산하다, 고독의 과잉으로 내려앉을 것만 같다. 사는  건 가혹할수록 유쾌하다니...

마악, 김 빠진 탄산음료의 마지막 열기처럼 눈이 뿌리기 시작했다. 계속되면, '내일은 또 미끄럽겠구나, 차도 많이  막히겠구나.' 한 살 더 먹은 이의 감상이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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