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그라피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2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임미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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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는 ‘포르노그라피’란 용어를 가리켜 평범함, 상업주의, 그리고 서술의 어떤 엄격한 규칙들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극단적인 이미지로 독자를 오르가즘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소박한 성적 자극으로 독자를 미지근한 정욕 속에 놓아두어야 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아둔한 독자들은 평범하고 착한 이미지들 속에 ‘그것’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당황스러워 한다. 나보코프가 자신의 작품을 어떤 식으로 읽어주기를 바라는가, 하는 방향과는 상관없이 <롤리타>는 이런 점에서 확실히 포르노그라피적이다. 험버트와 롤리타의 첫날밤이 어처구니 없이 간단하게 묘사되더라도 독자는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 속에서 이미 성적 자극에 휘말리고 만다. 오히려 얇게 묘사된 밤으로 인해 그들의 에로티시즘이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더구나 그의 문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포르노그라피아>는 여러모로 <롤리타>와 닮은 구석이 많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중년의 신사가 ‘님펫’에게 매혹된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포르노그라피아>의 헤니아와 카롤은 님펫이라 부르기엔 나이가 부담스럽고(열 여섯, 열 일곱이니까) 사회적 경험도 많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어림’을 교묘히 이용해 어른들을 자극한다. 그들로 인해 점잖음의 허세는 욕망 앞에 굴복 당하고 도덕이나 이성은 행위의 잣대를 상실한 채 길목에 나부끼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들의 발칙함이라는 것이 젊음을 동경하는 ‘나’와 ‘프레데릭’의 무의식이 꾸며낸 거짓 전도일 지라도 말이다.

<롤리타>에서 험버트의 행위를 결정한 것이 퀼티의 각본이었다고 한다면 <포르노그라피아>에서 ‘나’의 역할을 지배하는 것은 프레데릭이다. 퀼티가 숨은 조종꾼인 것에 비해 프레데릭의 연출은 좀 더 전면에 배치된다. ‘나’의 시선과 의식이 프레데릭의 그것과 상응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나’의 의문으로 시작된 프레데릭의 역할은 종반에 이르러 ‘나’의 행위를 직접 지시함으로써 연출자로서의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또 그들의 각본에는 모두 살인이라는 도구가 등장한다. 퀼티가 그것의 효과음으로 스스로를 바치는 것과는 반대로 프레데릭은 헤니아의 약혼자인 알베르트를 제물로 삼아, 그들의 우상인 헤니아와 카롤의 결합을 추진한다. 하지만 이 둘이 살인을 각본의 절정으로 삼은 일이 젊음에 현혹된 늙음의 비이성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나보코프가 자신은 상징과 알레고리를 지독히 싫어한다고 밝히면서 <롤리타>를 반미 소설로 보거나 교훈이 부재한다는 비난을 가하는 것에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듯, 곰브로비치는 (작가의 말에서) 자신의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지, 그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와 나 사이에 쌓인 모든 오해들에 이미 지쳐 있’는 심기를, ‘나는 독자들이 내 작품을 마음대로 해석할 여지를, 만약 할 수만 있었다면, 한층 더 줄였을 것이다.’라고 밝힌다. 이런 곰브로비치의 의지는 본문에서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는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의식에 일일이 개입하고 설명한다. 급기야 ‘폴란드의 작가인 나 곰브로비치가 도깨비불을 쫓고 있었다.’라는 말까지 삽입해서 ‘나’는 곰브로비치 자신인가? 아니라면 이 문장의 뜬금없음은 또 무언가? 라는 의혹에 빠지게 만든다. 정말 오만한 작가이지 무언가. 하지만 이런 오만함이 나는 사뭇 불편하다. 곰브로비치는 인물들을 모두 자신의 품안에서만 놀게 함으로써 독자가 끼어들 여지를 사전에 봉쇄한다. 책읽기를 주도하는 내가 책에서 밀려나 무국적으로 떠도는 것이 어찌 마땅할 수 있겠는가, 의아스럽다.

그렇더라도 <포르노그라피>는 엄청난(?) 자기장을 형성하고 있다. 헤니아와 카롤로부터 극적인 에로티시즘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가 그렇고 이미 몰락한 유년에 대한 살풋하고도 씁쓸한 회한이 그렇고 파행의 끝까지 가보자는 오기가 그렇다. 작가에게 반발하면서도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힘! 그것이 오는 길은 과연 어디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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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4-06-08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브로비치의 또다른 소설 <페르디두르케>가 어제 도착했습니다.3권의 다른책들과 함께...
아직 지금보고 있는 책이 100페이지쯤 남았고...함께 도착한 책들중 무얼 먼저 볼 지 순서를 정하지 않았습니다.하지만 국내처음 소개된 곰브로비치의 책 무척 기대됩니다.각종 미디어에서도 새롭게 소개되는 거장에 대해 반기는 분위기더군요.

마녀물고기 2004-06-08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읽고 <페르디두르케>를 보관함에 넣어놨지요. 아직 읽을 책이 산더미라, 당장에 주문하고 싶은 걸 꾹꾹 참고 있는 중이랍니다. 소설보다 먼저 반성하는 사유님의 감상글부터 읽게 되겠군요. 전 요즘 <내 이름은 빨강>을 읽고 있는데 오르한 파묵이라는 낯선 작가의 매력이 무엇인지 아직까지는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멋진 만남이었으면 좋겠는데.
 
사랑의 언어 - 체호프 소설선집, 러시아 문학 걸작선 1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김현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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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뜨거운 여름을 예보라도 하고 싶었던 건지 무지막지하게 더운 날이다. 게다가 버스 운행의 환골탈태를 위해 길게 파헤쳐진 도로의 흉물스러움이 더위에 가세한다. 살갗도 덥고 눈도 덥다. 땀이 아니라 뇌수가 줄줄 흘러내리는 듯한 착각. 그나마 버스나 지하철은 굴 속처럼 서늘해서 책 한 권 뚝딱 해치우기에 십상이었으니 그래도 좋은 날이었다고 해야 할까.

체호프 소설선집 《사랑의 언어》는 이동 중에 읽기에 적합하다. 단편이고 여백이 많아 눈이 시원할뿐더러 몰캉거리는 사랑의 언어로만 채워져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체호프의 사랑에서 알콩달콩한 신혼집이나 불같은 열정이나 질투의 복수극 등을 기대한다면 김 빠진 맥주꼴이 될 수도 있겠다. 체호프가 그리는 사랑 자체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비극이면서도 비극적이지 않고 정열이면서도 정열적이지 않고 우수에 차 있으면서도 우수에 잠기지 않는다. 그럼 뭔가? 숲을 기대했다가 민둥산을 만난 꼴인가?

내가 쓰는 몇몇 잡글들을 보며 주제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느니, 용두사미 격이라느니, 너무 일상적이라느니 하는 핀잔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문체주의자 같다고 에둘러 말하는 배려도 가끔 보이고 말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대범한 척, 하던 뻘짓에 몰두하고는 했지만 그런 비난 아닌 비난을 접하게 되면 내 능력의 같잖음과 못된 욕망 사이에서 회의와 고통을 맛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당신이 작게나마 위안이 되었어요, 라고 말한다면 체호프가 어처구니 없어 하려나?

체호프의 소설은 다소 밍밍하다. 줄거리도 빈약하고 극적인 사건도 없는데다 결말도 뚜렷하지 않다. 인물의 성격은 흐리멍덩한데다가 섬광처럼 내리꽂히는 문장들도 별반 없다. 그런데 왜 체호프가 단편소설의 개척자이고 대가란 말인가? 혀를 놀래키는 맛은 없지만 그 여운은 은밀하고 아련하다. 향수의 백미가 베이스노트에 있듯 체호프를 읽고난 후의 알싸함과 미려한 잔향은 꽤나 고혹적이다.

그런 느낌에 마음껏 취할 수 있는 것이 <키스>이다. 칠흑같은 어둠 속, 길을 잃고 우연히 들어간 방에서 이름 모를 여인으로부터 받은 입맞춤. 그 두근거림을 끌어 안고 상념에 잠기는 젊은 장교의 모습은 한 편의 서정시처럼 아름답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유일하게 가슴을 쥐었던 단편이다. 어째서 함께 하고픈 사랑은 언제나 늑장을 부리는 것일까? 갈급한 남녀의 만남이 참으로 야속하기만 하다. 열 편의 고만고만한 단편 중 가장 좋았던 두 편이다. 고만고만하다고 표현했다고 해서 시시껍절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 탑노트로 매혹시키기 보다는 베이스노트로 취하게 만드는, 체호프의 얄미운 소설에 사랑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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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6-04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어제 안톤 체홉의 짤막한 단편,관리의 죽음을 읽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 뿐 아니라 내가 쉴 곳도 없는 것 같습니다.

마녀물고기 2004-06-04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하니님의 브라운 아가씨와 함께 잠시 쉬었다 온 걸요.

드팀전 2004-06-0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봤어요. 오늘은 월요일인데....곧 비가 오려하는군요. 비오는날은 책이 눈에 잘들어오던데..오늘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요즘 바빠서 한권가지고 낑낑거리고 있습니다.집에가서도 몇페이지 못넘기고 잠들고 또 잠들고 하니 진도가 나갈수가 있나요.주문한 책도 도착할때가 되었는데..하루에 1시간만 졸음과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책볼수 있다면....아ㅡ후

마녀물고기 2004-06-07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쉴 사이없이 잠이 쏟아지더군요. 겨우겨우 읽은 책 감상문 쓸 염도 내지 못할 정도로 말이지요. 오늘은 영화를 한 편 보고 왔습니다. 기분이 무진장 꿀꿀했는데 틈틈이 웃다 보니 꽤 괜찮아졌어요. 아-오

마녀물고기 2004-06-07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민음사 발간 체호프 단편선도 샀는데 그거 읽고 너무 좌절하게 될까봐 만만한 사랑이야기부터 읽었습니다. 아, 근데 이건 또 언제 읽지.. 읽을 게 심각하게 많아요. 징징..
 
지하철 Jimmy Fantasy 2
지미 지음, 백은영 옮김 / 샘터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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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당신의 천사가 지하철 입구에서 작별을 고하던 그 해에, 난 풍요롭던 유년의 숲이 안녕을 말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어요. 당신이 이별 후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던 것처럼, 나도 숲에서 떠밀려나와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했지요. 그것은 무척 두렵고 슬픈 일이었어요. 세상은 어둠과 적막 뿐이었어요. 온통 휑뎅그레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가야할지도 알 수 없었지요. 사람들은 모두 바빠 보였고 내 혼란 따위엔 관심조차 갖지 않았어요. 난 자연스럽게 이 아득한 길을 나 홀로 가야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요, 가끔은 당신이 들은 것처럼 나도 ‘어딘가에 황금 낙엽 한 잎이 숨어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고 ‘나무에서 가장 예쁜 사과를 딸 수 있는 행운을 내가 차지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도 했어요. 그것은 말하자면, 내가 세상을 살아갈 유일한 희망, 내가 걷는 것의 의미이자 힘이 되어주는 화두 같은 것이었지요. 하지만 난 줄곧 ‘말할 줄 아는 물고기를 키워 함께 바다 밑을 잠수하고’, ‘움직이는 구름이 신비하게’만 느껴지던 유년을 떠올렸어요. 그럴 때마다 울음이 생기고 사람이 그리웠지만 난 늘 상처만 받을 뿐이었는 걸요. 당신처럼 나도 회복이 빠른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지하철은 ‘오늘의 정거장’과 ‘어제의 정거장’이 다르지 않지요. 삶도 마찬가지예요. 어제의 삶과 오늘의 삶이 판박이처럼 똑같아요. 계속 차를 잘못 타고, 잘못 내리는 당신처럼 난 이곳에서 늘 실수만 해요. 실수를 거듭하다 보면 이것이 혹시 의도된 습관의 반복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생겨요.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실수를 반복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언제나 넘어져 상처 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지요. 아, 내가 또 바보짓을 저지르고 말았구나, 왜 세상은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일까?

혹시 저를 위해 저녁 노을을 볼 수 있는 창가에서 시 한 수 읽어주실 분은 안 계신가요? 당신의 그 말과, 책이 가득한 서가에서 작은 가방을 옆에 둔 소녀가 이제 막 노을빛이 퍼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을 보며 잠시 우울했다고, 그리고 당신의 외로움이 가슴 아팠다고, 이제사 고백해요.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두렵거나 외롭기만 한 곳은 아니겠죠? 늘 ‘시꺼먼 연기의 역겨운 냄새’만 자욱한 곳은 아니겠죠?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악기의 선율’이 느껴지기도 하고, ‘내 손을 꼭 잡고 별의 방향을 일러주는’ 누군가를 만나기도 하는 곳이, 그곳이 세상 맞는 거죠? 생김새도, 크기도 각각인 수많은 의자가 그러하듯 사람들의 면면도, 그들이 가진 미래의 희망도 제각각일 테죠. 내 몸의 크기에 맞고 내 미래와 어울리는 희망이 앉은 의자는 어떤 것일까요?

나도 이제 두려워만 하지는 않을 테예요. 세상은 그늘이고 미로일 뿐이라고 원망만 하지는 않을 테예요. ‘내 마음과 은밀히 약속한 반짝이는 한 줄기 빛을 찾아서’ 우울한 도시에 내려선 당신의 손을 잡고 저도 함께 걸을 테예요. 제 곁에 있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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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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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분명, 한 달 전만 해도 이 책은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설핏 유치하고 단조로운 표지로 재발간된 것을 발견했다(나름대로 각각의 권에서 쌍둥이가 서로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지, 그들의 행보를 상징한 것처럼 보이지만 책의 무게에 비해 가볍고 또 가벼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읽고 싶었던 책을 읽을 수 있고, 거기다 구하기까지 한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다. 또한 그 선택이 탁월한 것이었음을 느끼게 되면 그야말로 멋지고 황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등장인물의 감정 속에 함몰되어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종종 본다. 인물의 감정 상태를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들은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너무 깊이 간섭한다. 등장인물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 등장인물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지나친 것 아닐까? 하지만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등장인물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그들의 삶을 무심한 듯 툭툭 내뱉는다. 짧은 문장, 과도한 수식어의 배제, 객관적 시선, 건조한 언어, 이것이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을 이루는 서늘한 질서이다.

<비밀 노트>, <타인의 증거>, <50년간의 고독>, 3부작 시리즈인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이러한 아고타 크피스토프의 질서에 차분히 동참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를 가리켜 ‘문학이 스스로 울지 않고 그 눈물의 몫을 독자에게 남겨 놓는 것이라면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그러한 문학의 바람에 착하게 조응하는 작가’라고 했던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준 소설이기도 하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어제》에 비해 훨씬 강렬하고 악마적이다.

<비밀 노트>는 전쟁이란 상황에 내몰린 쌍둥이 형제가,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을 단련시키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타인이 휘두르는 언어적, 육체적 폭력에 익숙해지기 위해 서로를 향해 욕설을 퍼붓고, 채찍을 휘두르고, 단식을 감행한다. 그들의 할머니는 남편을 독살하고 손자들을 향해 ‘개자식들’이라 외친다. 언청이인 이웃집 여자 아이는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슬퍼하며 그들의 개와 수간을 즐기고, 신부는 그녀의 육체를 유린한다. 할머니의 집에 세 든 장교는 동성애자이자 변태성욕자로, 자신의 몸에서 피가 튀고 자신의 얼굴에 오줌 줄기가 내리꽂히는 것에 희열한다. 옷가지를 세탁하는 대가로 쌍둥이의 체온을 탐닉하는 하녀,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을 가차없이 바라보는 쌍둥이 형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병들어 있는 등장인물을 보며, 그러나 나는 오열할 수도 없다. 구토가 치밀 정도로 끔찍하고 악의에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을 그리는 작가가 너무 태연하고 심상하므로, 이 소설에 독자가 흘릴 눈물의 공간은 부재한다.

<타인의 증거>부터는 쳐드는 의혹 때문에 독서의 효율이 떨어진다. 루카스에게 형제가 있었던가? 클라우스의 부재를 의아해하는 사람이 어째서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 루카스는 루카스인가 클라우스인가? 비로소 등장 인물에게 이름을 부여한 작가는 허구의 소설 속에서, 또 다른 허구와 실재를 쉐이크처럼 뒤섞어 놓고 혼란에 빠지게 한다. 아버지의 아이를 낳은 야스민과 그녀가 낳은 불구아 마티아스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 루카스는 미망인 클라라에게 집착한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행위만 나열할 뿐 등장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작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50년 간의 고독>은 퍼즐 맞추기의 재미를 한껏 느끼게 한다. 전편의 이야기들은 마지막 장에서 새롭게 조명된다. 마지막 장의 등장인물과 상황이 전편에서 어떤 식으로 왜곡되어 나타났는가를 유추해보는 것은 재미있다. 어느 것이 실재이고 어느 것이 몽상인지는 차치해두고서라도 말이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전쟁은 그것의 명분이 어떠하든간에 신이 내린 재앙 중 가장 악의적인 것이고 인간은 그들의 잔악한 속성에도 불구하고 나약하고 고독한 존재라는 것 말이다.

이 책을 잡고서, 휴식을 취하거나 다른 일에 빠지기란 쉽지 않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건조한 문체에 진저리를 치고 욕을 퍼부어대면서도, 관음증 환자처럼 그를 흘끗거리고 그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옆집 아주머니처럼 친근한 얼굴의 그에게서 이렇듯 서늘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 놀랍다. 필히, 일독할 것을 권한다. 또 다시 절판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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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열린책들 세계문학 216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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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이란 장르에 대해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을 전면 개편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 평가와도 다르지 않다. 물론 순수문학도 시대적 상황에 따라 카프 계열의 문학이나 민중문학, 참여문학등으로부터 비난의 표적이 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순수문학은 시대를 넘어 존재해 왔고 문학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순수문학은 일단 언어의 미학적 측면을 중시한다. 또 삶에 대한 메타적인 성찰과 문학이 본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와 인간 정신을 스스로 고양시키거나 인문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더불어 문학의 엄숙주의를 고려하기도 한다.

반면 대중문학은 현대 소비 문화의 하나의 변형된 상태에 불과하다.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순간의 오르가즘을 제공하고 얕은 재미와 실시간의 공감을 야기할 뿐 지속적인 동의와 울림은 부재한다. 하지만 하나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일 년이 넘게 고뇌하고 자료 수집의 단계를 거쳐야 했다면 이렇듯 가벼운 평가로 치부하기에는 어쩐지 미진한 구석이 있지 않을까? 게다가 그것의 결과물이 제법 멋들어지다면 말이다.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은 추리 소설이다. 500쪽에 가까운, 제법 두툼한 분량의 책장을 넘기는 내내 레베르테는 독자를 끌어들이며 지적 유희에 빠져들게 한다. 소설은 ‘체스 게임’이란 그림을 복원하던 중 발견하게 된 그림 속의 미스테리를 푸는 과정과 현실의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과거의 살인을 푸는 열쇠는 그림 속의 체스를 역순으로 놓는 방법이, 현재의 살인은 그림 안에서 멈춰 있는 체스 게임을 이어가는 방법이 사용된다.

예술품 복원 전문가인 훌리아, 훌리아의 대부 역할을 맡고 있는 골동품상 세사르, 훌리아의 옛 연인인 알바로, 예술품 소유자와 경매 회사를 연결하고 복원을 주선하는 멘추, 체스 플레이어인 무뇨스를 중심으로 사건은 긴박하게 펼쳐진다. 체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체스를 둘 줄 안다면 더욱 흥미있었겠지만 체스는커녕 바둑이나 장기도 두어본 적이 없다 보니, 그 부분을 대충 넘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쉽다. 체스를 둘 줄 알았다면 소설과 체스, 두 가지 토끼를 잡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레베르테는 소설 곳곳에 체스와 미술은 물론이고 음악과 건축, 문학까지를 아우르는 자신의 지적 탐험의 결과물을 아낌없이 펼쳐놓는다. 소설에서 바흐의 ‘음악의 헌정’이 수시로 언급되는데, 체스가 수학적 사고력을 필요로하는 놀이인 것을 감안할 때, 작은 것 하나도 놓고 싶지 않았던 작가의 세심함을 엿볼 수도 있다. 바흐의 음악이 수학적으로 가장 안정되어 있고 수리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적절히 이용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작가는 단순히 ‘음악의 헌정’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살인의 동기가 불투명하고, 체스 게임을 통해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은, 각각의 ‘말’에 등장 인물을 대입시킬 수 있을 때라야 가능할 것이라는 전제를 무시했다는 억지가 개입되기는 했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짜임이나 사건을 몰아가는 힘은 꽤나 정력적이고 흥미진진하다. 인물들의 성격도 나름대로 모던하다. 물질숭배주의자와 자신의 비정상적인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우아함과 현학으로 치장한 동성애자,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게임에 집착하는 현실도피자, 물질에 눈 멀어 육체를 팔아먹는 무능력자 등, 인물을 읽는 재미도 솔솔하다. 게다가 이 작가는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몇 년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지 않는가. 이 정도라면 이제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는 허물어져야 옳지 않을까? 근간의 나를 괴롭히는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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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5-23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만큼 <뒤마 클럽>이 좋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마녀물고기 2004-05-23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뒤마 클럽> 있는데 읽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이 된다는..

하이드 2004-05-2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뒤마클럽부터 읽고 다른 작품 찾아읽으면서 이작품도 읽었는데요,
뒤마클럽 너무 재미있고, 환상적으로 읽었는데요..
그 책 읽고 뒤마의 책도 다 찾아 읽었다는;;

마녀물고기 2004-05-27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럼 망설이지 말고 읽어야겠군요. 책 두께가 일단 공포스러운지라 재미없으면 살짝 피해가려고 했었는데 말이지요. (역시 난 귀가 너무 얇다!)
로잘린님 덕분에 놀리는 책 없게 되었지 뭐야요. 고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