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그라피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2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임미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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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는 ‘포르노그라피’란 용어를 가리켜 평범함, 상업주의, 그리고 서술의 어떤 엄격한 규칙들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극단적인 이미지로 독자를 오르가즘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소박한 성적 자극으로 독자를 미지근한 정욕 속에 놓아두어야 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아둔한 독자들은 평범하고 착한 이미지들 속에 ‘그것’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당황스러워 한다. 나보코프가 자신의 작품을 어떤 식으로 읽어주기를 바라는가, 하는 방향과는 상관없이 <롤리타>는 이런 점에서 확실히 포르노그라피적이다. 험버트와 롤리타의 첫날밤이 어처구니 없이 간단하게 묘사되더라도 독자는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 속에서 이미 성적 자극에 휘말리고 만다. 오히려 얇게 묘사된 밤으로 인해 그들의 에로티시즘이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더구나 그의 문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포르노그라피아>는 여러모로 <롤리타>와 닮은 구석이 많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중년의 신사가 ‘님펫’에게 매혹된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포르노그라피아>의 헤니아와 카롤은 님펫이라 부르기엔 나이가 부담스럽고(열 여섯, 열 일곱이니까) 사회적 경험도 많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어림’을 교묘히 이용해 어른들을 자극한다. 그들로 인해 점잖음의 허세는 욕망 앞에 굴복 당하고 도덕이나 이성은 행위의 잣대를 상실한 채 길목에 나부끼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들의 발칙함이라는 것이 젊음을 동경하는 ‘나’와 ‘프레데릭’의 무의식이 꾸며낸 거짓 전도일 지라도 말이다.

<롤리타>에서 험버트의 행위를 결정한 것이 퀼티의 각본이었다고 한다면 <포르노그라피아>에서 ‘나’의 역할을 지배하는 것은 프레데릭이다. 퀼티가 숨은 조종꾼인 것에 비해 프레데릭의 연출은 좀 더 전면에 배치된다. ‘나’의 시선과 의식이 프레데릭의 그것과 상응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나’의 의문으로 시작된 프레데릭의 역할은 종반에 이르러 ‘나’의 행위를 직접 지시함으로써 연출자로서의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또 그들의 각본에는 모두 살인이라는 도구가 등장한다. 퀼티가 그것의 효과음으로 스스로를 바치는 것과는 반대로 프레데릭은 헤니아의 약혼자인 알베르트를 제물로 삼아, 그들의 우상인 헤니아와 카롤의 결합을 추진한다. 하지만 이 둘이 살인을 각본의 절정으로 삼은 일이 젊음에 현혹된 늙음의 비이성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나보코프가 자신은 상징과 알레고리를 지독히 싫어한다고 밝히면서 <롤리타>를 반미 소설로 보거나 교훈이 부재한다는 비난을 가하는 것에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듯, 곰브로비치는 (작가의 말에서) 자신의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지, 그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와 나 사이에 쌓인 모든 오해들에 이미 지쳐 있’는 심기를, ‘나는 독자들이 내 작품을 마음대로 해석할 여지를, 만약 할 수만 있었다면, 한층 더 줄였을 것이다.’라고 밝힌다. 이런 곰브로비치의 의지는 본문에서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는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의식에 일일이 개입하고 설명한다. 급기야 ‘폴란드의 작가인 나 곰브로비치가 도깨비불을 쫓고 있었다.’라는 말까지 삽입해서 ‘나’는 곰브로비치 자신인가? 아니라면 이 문장의 뜬금없음은 또 무언가? 라는 의혹에 빠지게 만든다. 정말 오만한 작가이지 무언가. 하지만 이런 오만함이 나는 사뭇 불편하다. 곰브로비치는 인물들을 모두 자신의 품안에서만 놀게 함으로써 독자가 끼어들 여지를 사전에 봉쇄한다. 책읽기를 주도하는 내가 책에서 밀려나 무국적으로 떠도는 것이 어찌 마땅할 수 있겠는가, 의아스럽다.

그렇더라도 <포르노그라피>는 엄청난(?) 자기장을 형성하고 있다. 헤니아와 카롤로부터 극적인 에로티시즘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가 그렇고 이미 몰락한 유년에 대한 살풋하고도 씁쓸한 회한이 그렇고 파행의 끝까지 가보자는 오기가 그렇다. 작가에게 반발하면서도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힘! 그것이 오는 길은 과연 어디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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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4-06-08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브로비치의 또다른 소설 <페르디두르케>가 어제 도착했습니다.3권의 다른책들과 함께...
아직 지금보고 있는 책이 100페이지쯤 남았고...함께 도착한 책들중 무얼 먼저 볼 지 순서를 정하지 않았습니다.하지만 국내처음 소개된 곰브로비치의 책 무척 기대됩니다.각종 미디어에서도 새롭게 소개되는 거장에 대해 반기는 분위기더군요.

마녀물고기 2004-06-08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읽고 <페르디두르케>를 보관함에 넣어놨지요. 아직 읽을 책이 산더미라, 당장에 주문하고 싶은 걸 꾹꾹 참고 있는 중이랍니다. 소설보다 먼저 반성하는 사유님의 감상글부터 읽게 되겠군요. 전 요즘 <내 이름은 빨강>을 읽고 있는데 오르한 파묵이라는 낯선 작가의 매력이 무엇인지 아직까지는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멋진 만남이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