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열린책들 세계문학 216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이란 장르에 대해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을 전면 개편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 평가와도 다르지 않다. 물론 순수문학도 시대적 상황에 따라 카프 계열의 문학이나 민중문학, 참여문학등으로부터 비난의 표적이 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순수문학은 시대를 넘어 존재해 왔고 문학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순수문학은 일단 언어의 미학적 측면을 중시한다. 또 삶에 대한 메타적인 성찰과 문학이 본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와 인간 정신을 스스로 고양시키거나 인문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더불어 문학의 엄숙주의를 고려하기도 한다.

반면 대중문학은 현대 소비 문화의 하나의 변형된 상태에 불과하다.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순간의 오르가즘을 제공하고 얕은 재미와 실시간의 공감을 야기할 뿐 지속적인 동의와 울림은 부재한다. 하지만 하나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일 년이 넘게 고뇌하고 자료 수집의 단계를 거쳐야 했다면 이렇듯 가벼운 평가로 치부하기에는 어쩐지 미진한 구석이 있지 않을까? 게다가 그것의 결과물이 제법 멋들어지다면 말이다.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은 추리 소설이다. 500쪽에 가까운, 제법 두툼한 분량의 책장을 넘기는 내내 레베르테는 독자를 끌어들이며 지적 유희에 빠져들게 한다. 소설은 ‘체스 게임’이란 그림을 복원하던 중 발견하게 된 그림 속의 미스테리를 푸는 과정과 현실의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과거의 살인을 푸는 열쇠는 그림 속의 체스를 역순으로 놓는 방법이, 현재의 살인은 그림 안에서 멈춰 있는 체스 게임을 이어가는 방법이 사용된다.

예술품 복원 전문가인 훌리아, 훌리아의 대부 역할을 맡고 있는 골동품상 세사르, 훌리아의 옛 연인인 알바로, 예술품 소유자와 경매 회사를 연결하고 복원을 주선하는 멘추, 체스 플레이어인 무뇨스를 중심으로 사건은 긴박하게 펼쳐진다. 체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체스를 둘 줄 안다면 더욱 흥미있었겠지만 체스는커녕 바둑이나 장기도 두어본 적이 없다 보니, 그 부분을 대충 넘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쉽다. 체스를 둘 줄 알았다면 소설과 체스, 두 가지 토끼를 잡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레베르테는 소설 곳곳에 체스와 미술은 물론이고 음악과 건축, 문학까지를 아우르는 자신의 지적 탐험의 결과물을 아낌없이 펼쳐놓는다. 소설에서 바흐의 ‘음악의 헌정’이 수시로 언급되는데, 체스가 수학적 사고력을 필요로하는 놀이인 것을 감안할 때, 작은 것 하나도 놓고 싶지 않았던 작가의 세심함을 엿볼 수도 있다. 바흐의 음악이 수학적으로 가장 안정되어 있고 수리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적절히 이용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작가는 단순히 ‘음악의 헌정’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살인의 동기가 불투명하고, 체스 게임을 통해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은, 각각의 ‘말’에 등장 인물을 대입시킬 수 있을 때라야 가능할 것이라는 전제를 무시했다는 억지가 개입되기는 했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짜임이나 사건을 몰아가는 힘은 꽤나 정력적이고 흥미진진하다. 인물들의 성격도 나름대로 모던하다. 물질숭배주의자와 자신의 비정상적인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우아함과 현학으로 치장한 동성애자,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게임에 집착하는 현실도피자, 물질에 눈 멀어 육체를 팔아먹는 무능력자 등, 인물을 읽는 재미도 솔솔하다. 게다가 이 작가는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몇 년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지 않는가. 이 정도라면 이제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는 허물어져야 옳지 않을까? 근간의 나를 괴롭히는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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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5-23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만큼 <뒤마 클럽>이 좋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마녀물고기 2004-05-23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뒤마 클럽> 있는데 읽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이 된다는..

하이드 2004-05-2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뒤마클럽부터 읽고 다른 작품 찾아읽으면서 이작품도 읽었는데요,
뒤마클럽 너무 재미있고, 환상적으로 읽었는데요..
그 책 읽고 뒤마의 책도 다 찾아 읽었다는;;

마녀물고기 2004-05-27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럼 망설이지 말고 읽어야겠군요. 책 두께가 일단 공포스러운지라 재미없으면 살짝 피해가려고 했었는데 말이지요. (역시 난 귀가 너무 얇다!)
로잘린님 덕분에 놀리는 책 없게 되었지 뭐야요. 고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