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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언어 - 체호프 소설선집, 러시아 문학 걸작선 1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김현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뜨거운 여름을 예보라도 하고 싶었던 건지 무지막지하게 더운 날이다. 게다가 버스 운행의 환골탈태를 위해 길게 파헤쳐진 도로의 흉물스러움이 더위에 가세한다. 살갗도 덥고 눈도 덥다. 땀이 아니라 뇌수가 줄줄 흘러내리는 듯한 착각. 그나마 버스나 지하철은 굴 속처럼 서늘해서 책 한 권 뚝딱 해치우기에 십상이었으니 그래도 좋은 날이었다고 해야 할까.
체호프 소설선집 《사랑의 언어》는 이동 중에 읽기에 적합하다. 단편이고 여백이 많아 눈이 시원할뿐더러 몰캉거리는 사랑의 언어로만 채워져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체호프의 사랑에서 알콩달콩한 신혼집이나 불같은 열정이나 질투의 복수극 등을 기대한다면 김 빠진 맥주꼴이 될 수도 있겠다. 체호프가 그리는 사랑 자체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비극이면서도 비극적이지 않고 정열이면서도 정열적이지 않고 우수에 차 있으면서도 우수에 잠기지 않는다. 그럼 뭔가? 숲을 기대했다가 민둥산을 만난 꼴인가?
내가 쓰는 몇몇 잡글들을 보며 주제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느니, 용두사미 격이라느니, 너무 일상적이라느니 하는 핀잔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문체주의자 같다고 에둘러 말하는 배려도 가끔 보이고 말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대범한 척, 하던 뻘짓에 몰두하고는 했지만 그런 비난 아닌 비난을 접하게 되면 내 능력의 같잖음과 못된 욕망 사이에서 회의와 고통을 맛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당신이 작게나마 위안이 되었어요, 라고 말한다면 체호프가 어처구니 없어 하려나?
체호프의 소설은 다소 밍밍하다. 줄거리도 빈약하고 극적인 사건도 없는데다 결말도 뚜렷하지 않다. 인물의 성격은 흐리멍덩한데다가 섬광처럼 내리꽂히는 문장들도 별반 없다. 그런데 왜 체호프가 단편소설의 개척자이고 대가란 말인가? 혀를 놀래키는 맛은 없지만 그 여운은 은밀하고 아련하다. 향수의 백미가 베이스노트에 있듯 체호프를 읽고난 후의 알싸함과 미려한 잔향은 꽤나 고혹적이다.
그런 느낌에 마음껏 취할 수 있는 것이 <키스>이다. 칠흑같은 어둠 속, 길을 잃고 우연히 들어간 방에서 이름 모를 여인으로부터 받은 입맞춤. 그 두근거림을 끌어 안고 상념에 잠기는 젊은 장교의 모습은 한 편의 서정시처럼 아름답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유일하게 가슴을 쥐었던 단편이다. 어째서 함께 하고픈 사랑은 언제나 늑장을 부리는 것일까? 갈급한 남녀의 만남이 참으로 야속하기만 하다. 열 편의 고만고만한 단편 중 가장 좋았던 두 편이다. 고만고만하다고 표현했다고 해서 시시껍절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 탑노트로 매혹시키기 보다는 베이스노트로 취하게 만드는, 체호프의 얄미운 소설에 사랑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