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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ㅣ Jimmy Fantasy 2
지미 지음, 백은영 옮김 / 샘터사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당신의 천사가 지하철 입구에서 작별을 고하던 그 해에, 난 풍요롭던 유년의 숲이 안녕을 말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어요. 당신이 이별 후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던 것처럼, 나도 숲에서 떠밀려나와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했지요. 그것은 무척 두렵고 슬픈 일이었어요. 세상은 어둠과 적막 뿐이었어요. 온통 휑뎅그레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가야할지도 알 수 없었지요. 사람들은 모두 바빠 보였고 내 혼란 따위엔 관심조차 갖지 않았어요. 난 자연스럽게 이 아득한 길을 나 홀로 가야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요, 가끔은 당신이 들은 것처럼 나도 ‘어딘가에 황금 낙엽 한 잎이 숨어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고 ‘나무에서 가장 예쁜 사과를 딸 수 있는 행운을 내가 차지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도 했어요. 그것은 말하자면, 내가 세상을 살아갈 유일한 희망, 내가 걷는 것의 의미이자 힘이 되어주는 화두 같은 것이었지요. 하지만 난 줄곧 ‘말할 줄 아는 물고기를 키워 함께 바다 밑을 잠수하고’, ‘움직이는 구름이 신비하게’만 느껴지던 유년을 떠올렸어요. 그럴 때마다 울음이 생기고 사람이 그리웠지만 난 늘 상처만 받을 뿐이었는 걸요. 당신처럼 나도 회복이 빠른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지하철은 ‘오늘의 정거장’과 ‘어제의 정거장’이 다르지 않지요. 삶도 마찬가지예요. 어제의 삶과 오늘의 삶이 판박이처럼 똑같아요. 계속 차를 잘못 타고, 잘못 내리는 당신처럼 난 이곳에서 늘 실수만 해요. 실수를 거듭하다 보면 이것이 혹시 의도된 습관의 반복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생겨요.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실수를 반복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언제나 넘어져 상처 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지요. 아, 내가 또 바보짓을 저지르고 말았구나, 왜 세상은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일까?
혹시 저를 위해 저녁 노을을 볼 수 있는 창가에서 시 한 수 읽어주실 분은 안 계신가요? 당신의 그 말과, 책이 가득한 서가에서 작은 가방을 옆에 둔 소녀가 이제 막 노을빛이 퍼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을 보며 잠시 우울했다고, 그리고 당신의 외로움이 가슴 아팠다고, 이제사 고백해요.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두렵거나 외롭기만 한 곳은 아니겠죠? 늘 ‘시꺼먼 연기의 역겨운 냄새’만 자욱한 곳은 아니겠죠?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악기의 선율’이 느껴지기도 하고, ‘내 손을 꼭 잡고 별의 방향을 일러주는’ 누군가를 만나기도 하는 곳이, 그곳이 세상 맞는 거죠? 생김새도, 크기도 각각인 수많은 의자가 그러하듯 사람들의 면면도, 그들이 가진 미래의 희망도 제각각일 테죠. 내 몸의 크기에 맞고 내 미래와 어울리는 희망이 앉은 의자는 어떤 것일까요?
나도 이제 두려워만 하지는 않을 테예요. 세상은 그늘이고 미로일 뿐이라고 원망만 하지는 않을 테예요. ‘내 마음과 은밀히 약속한 반짝이는 한 줄기 빛을 찾아서’ 우울한 도시에 내려선 당신의 손을 잡고 저도 함께 걸을 테예요. 제 곁에 있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