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 속의 맨홀

 

 

 

 

사람 몸에는 구멍이 많다 manhole

눈구멍 코구멍 입구멍 귀구멍 etc.

사람 몸의 구멍에서 나오는 피는 사건사고다

여자 생식기 구멍에서 제때 나오는 피만 정상이다 

 

생굴 같은, 멍게 같은 애매하고 모호한 양감이

뭉텅뭉텅 쏟아져 투명한 수면 위로 실오라기처럼 퍼지고

붓글씨처럼 흘러내려 변기구멍에 닿으려 한다

때론 선홍색, 때론 적자색, 때론 검붉은 느낌  

아무튼 이건 血이라 기본적으로 붉다

 

생명의 이치에 따라 生理

달월을 넘어 越境 달월의 경전처럼 月經 

이번 달도 무사히, 이번 달도 여전히

달거리가 고맙지만  

 

마흔 다섯 해 -  

살긴 살았는데 도무지 산 것 같지가 않다, 등신들아! 

에라이, 병신과 머저리!  

 

 

____

 

 

 

* 체호프 <벚꽃동산> 피르스 대사 / 이청준 <병신과 머저리>

* 맨홀이 manhole인 줄 처음 알았다, 세상에.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은데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라니. / 사람 구멍 / 사람 몸 속의 구멍 / 사람 몸이 들어가는 구멍 / 사람 몸을 뚫는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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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대략 30x20cm 화면에 스물 얼굴과 이름이 뜬다

다음 화면에도 하양 검정 얼굴과 이름이 뜬다

 

우주는 떨림이다, 인간은 울림이다

존재는 세계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한다

존재는 접촉을 꿈꾼다

접촉에 오류는 불가피하다

 

*

 

쉰 남짓 얼굴과 이름이 휙휙휙 - 

마지막, 화면 속에 홀로 푹 빠져 있는 나 -   

내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나가기', 

화면이 꺼지자 내 얼굴이 그립다

 

6월 4일 목요일 10시

마지막 접속을 끝내며  

내 얼굴에 보내는 마지막 시선 -  

 

 

 

--

 

* 김상욱, <떨림과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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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일어난 까닭

 

 

 

 

1인의 아해가 웁니다

왜? 

몰라요.  

 

2인의 아해가 뜨겁습니다, 40도! 

왜?

몰라요.

 

3인의 아해가 혈뇨를 봅니다

왜?

몰라요.

 

4인의 아해가 경련을 일으킵니다

왜?

몰라요. 

 

5인의 아해가 의식을 잃습니다, 영영.

왜?

몰라요.

 

아해 앞의 숫자는 변할 수 있지만  

'왜?'와 '몰라요.'는 불변입니다.

일이 일어난 까닭,

원인과 결과를 밝히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 

모든 아해가 무서워합니다.

무서워하는 아해는 모두 질주합니다.

질주 끝에 막다른 골목입니다.

 

이번 생은 망했습니다.

다음 생이라고 별 수 있을까요?

조만간 체념하게 되겠지요.

옥수수는 따가셔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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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라는 낱말

 

 

 

낱말에는 

이름을 나타내는 낱말

움직임을 나타내는 낱말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름 낱말은 불변이지만

움직임 낱말과 성질 상태 낱말은 변합니다

 

존재라는 낱말에는

삶이 있고

삶이라는 낱말에는

죽음이 있고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픔이 있습니다

 

존재는 아플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죽을 수 있습니다

지금껏 존재했기에, 거저, 존재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명색이 한 번뿐인 삶인데

버럭, 돌연 죽기는 싫어요

차라리 많이 아프다가 죽을래요

 

- 머리 위에 큼직한 바위가 매달려 있다면 아프겠습니까?

- 무섭겠지요

- 공포와 불안이 아니라 고통 말입니다, 아프겠습니까? 

 

저라면 아프겠습니다

공포와 불안 때문에 더 아프겠습니다 

몸의 눈치를 보며 벌벌 떠느라 

더 아프겠습니다 

 

 

 

*

 

<악령>: '나'와 키릴로프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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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적으로(3)  

 

 

 

1.

 

누나야

일년 사이 왼쪽 윗니가 1미리나 넘게 벌어졌어

 

마흔 한 살 아우의 이마와 뒤통수에는 구멍이 다섯 개나 뚫렸다

머리통을 열었다 닫았는데도 술을 마시면 니가 인간이냐

그러고도 담배를 피우면 니가 인간이냐

 

다 내려놓았어

 

하, 아우님아, 내려놓아도 너무 내려놓으셨군요 -

 

 

2.

 

딸아,

너도 이제 그만 다 내려놓고 

생각하는 대로 살지 말고 

사는 대로 생각하려무나

되는 대로 살려무나  

 

일흔 세살 아비의 배에는 자꾸자꾸 바늘 구멍이 생긴다 

전나무 소나무 참나무에 뿌리 내려 자라는 또 다른 나무가

크리스마스 장식이 되지 못하고 주사제가 되어

늙은 아비의 뱃가죽 깊숙이 스며 든다

 

아빠, 배 아프겠어요 -

 

mistletoe, 라는 스펠링에서 첫 t는 묵음임을 분명히 해둔다 

우리말로는 겨우살이, 한자어로는 槲寄生이라는 사실도 덧붙여둔다  

내려놓아도 너무 내려놓고 나니 이렇게 사소한 것이 중요해진다 

 

하, 님아, 이제 그만 내려놓고

좀 주워담으세요 -

 

3.

 

과일 수레를 밀고 가다가 비틀비틀, 어질어질, 갈짓자,

그래도 병원에 빨리 갔으니 망정이지, 

혈압약을 먹으니 한결 좋아, 딱 직립보행이 됐어

나는 이제 명실상부한 호모 에렉투스야

 

내가 니들 때문에 혈압이 빡! 올라가서 -

혈압약 한 알이면 모든 것이 쑥! 내려가

 

하, 어미님아, 참 많이도 내려놓으셨군요 -

머리 위에 이고 가는 그 큼직한 늙은 호박만

딱! 내려놓으시면 금상첨화, 아니, 새옹지마겠어요 

 

4.

 

검은 대리석 비석 위에 새빨간 카네이션을 내려놓습니다

1, 3, 5, 7, 9 반드시 홀수여야 합니다

새빨간, 때론 검붉은 장미꽃을 내려놓아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홀수여야 합니다

 

홀수와 홀수를 곱하면 반드시 홀수가 나옵니다

홀수와 홀수를 더하면 반드시 짝수가 나옵니다

반드시 예외가 있는 인생과 달리

수셈은 반드시 반드시의 원칙에 종속됩니다 

수셈이 참 고맙고 갸륵합니다

 

비오는 날, 눈오는 날에는

검은 대리석 비석 위에 핏빛 꽃을 홀수로 -  

하, 님아, 실은 반대, 짝수로! 

짝수가 죽음의 수랍니다 -  

 

5.

 

당신의 내려놓음을

애도하고 축복합니다

살아 있음의 명복을 빕니다

 

 

2020.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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