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신이 될 수 있는가

- 괴테, <파우스트>

 

   

1. 괴테와 <파우스트>

 

괴테라는 이름에서 제일 먼저 연상되는 단어는 거인이다. 독일의 대문호이자 광물학, 식물학, 색채론 등을 연구한 과학자이자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을 지낸 정치 관료였으며, 평생 동안 뜨거운 열정과 지적 호기심을 불태웠던 인간. 83년에 걸친, 당시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거의 두 사람 몫에 가까울 만큼 길었던 그의 인생은 실로 빈틈없이 촘촘했다. 좀 과장하면 미처 늙을 틈도 없을 만큼 영원토록 생기로운 인간이었다고 할까. 그런 만큼 그를 둘러싸고 많은 연애담이 떠도는 것도 당연하다. 특히 칠순을 넘긴 나이에 십대 소녀에게 청혼한 일화가 유명하다. 하지만 이 경우조차도 주책이라는 말보다는 노쇠조차도 죽이지 못한 그의 열정과 평온한 자신감, 또 우아한 표현법(청혼!)이 더 돋보이는 것 같다. 말하자면 괴테만이 갖고 있는 아우라, 귀족스러움이다. 청년기의 질풍노도’(Sturm und Drang) 혹은 그의 표현법대로 낭만적인 것’(=병적인 것)에도 전혀 훼손되지 않는, 오히려 그것마저 포용하는 엄정함 같은 것(‘고전적인 것’) 말이다.

 

 

(젊은 괴테. 이 정도는 되어야 '젊은 베르테르(베르터)의 슬픔(고뇌)'도 쓰나 봅니다 ^^;)

 

 

하지만, 제법 역설적인데, 괴테는 뿌리 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가 아니었다. 그의 증조부는 하층 시민계급(대장장이) 출신으로서 근면과 노력으로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조부는 재단기술자에서 시작해 프랑크푸르트에서 고급 부티크와 일류 호텔 주인이 되었다. 한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괴테의 아버지는 당대의 전형적인 상류 교양 시민 계급의 삶을 영위했으며 교육열과 문화적 열망이 높았던 듯하다. 그 밑에서 괴테는 근면성실, 목표지향적인 생활, 노동과 휴식의 구분 등 시쳇말로 중산층의 생활 윤리를 몸으로 익히며 자랐다. 이런 그에게 문학이 왜 필요했을까.

 

괴테에게 있어 문학은 상승 욕망, 즉 일종의 야망 내지는 포부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것은 괴테 개인의 욕망뿐만 아니라 당시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발전 속도가 더뎠던 독일의 민족적 열등감과 맞닿아 있다. 그의 성공은 곧 독일의 성공이다. 괴테 덕분에 독일문학이 비로소 영국문학의 셰익스피어와 같은 존재를 갖게 됐고 서유럽 문화의 중심에 나설 수 있었던 까닭이다.

 

 

 

 

 

 

 

 

 

 

 

 

 

 

 

 

 

괴테의 대표작인 <파우스트>는 그가 24세가 되던 해인 1773년에 시작하여 죽기 일 년 전인 1831년에 완성한 방대한 극작품이다. 아무래도 이 작품의 가장 큰 성취는 르네상스 이래 근대의 발전과 맞물려 진행된, 인간 중심의 신화 확립에서 찾을 수 있겠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한 노학자가 악마와 계약을 맺는 행위의 기저에 깔린 것은 신이 되고 싶은 인간 본연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생존했던 파우스트라는 인물은 반쯤은 신화나 전설처럼 인기를 몰았고 그 얘기를 다룬 문학 텍스트도 여러 편이 쓰였다. 그 중 유독 괴테의 <파우스트>만이 문학사의 냉엄한 심판을 거쳐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2. 학자-시인 비극: 파우스트는 왜 악마를 보는가

 

, 아치형 천장으로 둘러싸인 고딕식 방에서 파우스트 박사는 탄식한다. “! 나는 철학도, /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 신학까지도 /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철저히 공부하였다. /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가련한 바보. / 전보다 똑똑해진 것은 하나도 없구나!”(1, 29) 연금술까지 익혔으나 새로운 환멸을 안겨줄 뿐이다. 마법의 힘을 빌려 지령을 불러보지만 소용없다. 좌절한 파우스트는 음독자살을 시도한다. 때마침 들려오는 부활절 찬송가 소리에 입에서 잔을 떼긴 하지만 그의 우울증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비극: 1를 여는 이 노학자의 고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민음사 표지는 고전적이고, 문학동네 표지는 모던합니다^^;)

 

이 경우 파우스트는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은유에 가깝다. 지식의 극점이나 미의 극점은, 설령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절대 손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파우스트의 추구는 본질적으로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그가 자살하지 않고 삶을 조금이라도 더 유예하려고 한다면 역시나 어둠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리얼리즘의 문법이라면 각종 정신병이나 광기가 나올 테지만(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반 카라마조프는 정신분열 상태에서 파우스트처럼 악마-분신을 만난다) <파우스트>에서는 악마가 작품 속의 실제 인물로서 등장한다. 더욱이 중세말의 분위기를 십분 반영하듯(‘악마에 대한 기독교의 강박적 불안의 산물이다) 악마의 형상은 무척 구체적이고 변신의 방식도 다채롭다.

 

 

 

 

 

 

 

 

 

 

 

 

 

 

 

(이반과 악마가 만나는(즉, 이반이 분열하는) 장면뿐만 아니라, 이 소설의 기저에 깔린 성경 텍스트 중 하나가 욥기라는 점도 <파우스트>를 연상시킵니다.)    

 

귀여운 검정 삽살개의 모습을 한 의뭉스러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고뇌하는 노학자 사이에 계약이 성립된다. 파우스트의 입장에서 요약해보면 이렇다. 나의 종이 되어 내가 원하는 것을 전부 하게 해 달라, 하지만 내가 어느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하는 즉시, “어느 순간에 집착하는 즉시”(1, 96) 나의 영혼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라는 것.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서까지 손에 넣고 싶은 것은 멈추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순간, 고통스러운 향락, 사랑에 눈먼 증오, 속이 후련해지는 분노와 같은 모종의 도취경”(1, 98)이다. 앞서 메피스토펠레스가 본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 그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느니라라는 성경 문구를 독일어로 번역하며 말씀때문에 고민한다. 결국 그는 , ‘, ‘도 아닌 행위를 가장 적합한 역어로 선택한다. ‘’(=논리=학문)에 대한 염증, 그와 나란히 행위’(=)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드디어 삶이, 더욱이 악마에게서 선사받는 삶이 펼쳐진다. 기대해봄직하다.

 

그러나 정작 파우스트의 모험은 악의 심연을 엿보고 싶은, 심지어 그 밑바닥까지 가보고 싶은 우리의 은밀한 욕망을 별로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오히려 상징과 알레고리, 신화적인 요소의 범람, 집필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구성적 단절, 운문 장르의 특성상 불가피한 지나친 비약과 암시 등 일차적인 독해조차 어렵다. 실상 파우스트가 악마를 보는 까닭은 많은 부분 그가 신의 자리를 넘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욕망조차도 악마를 통해 그를 유혹해보고자 했던 신의 뜻에서 나온 것이라면? 과연 이 작품의 핵심은, 우리의 감미로운 기대와는 달리, 악마의 실체와 악의 향연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악마마저도 지배하는 신의 존재, 악마저도 포용하는 선의 힘을 강조하는 것, 이것이 문제이다. 이런 전제 하에 파우스트가 ()체험하는 삶을 살펴보자.

 

-- <신동아>

 

*

 

 

 

 

 

 

 

 

 

 

 

 

 

 

 

 

<파우스트>의 20세기 러시아(소비에트)소설 버전이라고 할 만큼 <파우스트>에 많은 빚을 진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입니다. 이렇게 번역본이 많음에도, 또 러시아 독자들은 무척 사랑하는 소설임에도, 우리 독자들에겐 말하자면 당신들의 천국(ㅠ.ㅠ)인데요, 한 번쯤 집중력을 발휘해볼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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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 악마의 존재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다

- 괴테, <파우스트>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서도 오히려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우울과 환멸에 빠진 파우스트 박사. 그는 의뭉스러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의 종이 되어 내가 원하는 것을 전부 하게 해 달라, 하지만 내가 어느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하는 즉시, “어느 순간에 집착하는 즉시나의 영혼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라는 것. 정작 <파우스트>를 읽지 않아도 인간, 특히 지식의 극점에 도달한 인간과 악마의 계약은 늘 선악의 피안을 넘어 타락의 심연까지 가보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해 왔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우리의 감미로운 기대와는 달리 악마 혹은 의 향연이 아니라 악마의 존재마저도 지배하는 신의 존재, ‘마저도 포용하는 의 힘을 보여주는 데 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자신을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내는 힘의 일부분이라고 소개한다. 악마라는 신분상 부정(否定), , 파괴 등 악의 영역을 담당하나 그 역시 궁극적으로는 신에게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칙적으론신의 닮은꼴인 인간은 어떠한가? 파우스트는 제자 바그너 앞에서 다음과 같은 고뇌를 토로한다.

 

내 가슴 속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서 / 하나가 다른 하나와 떨어지려고 하네. / 하나는 음탕한 애욕에 빠져 / 현세에 매달려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고, / 다른 하나는 과감히 세속의 티끌을 떠나 / 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고 하네.”(1, 69)

 

그가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을 받아 ()체험하는 삶은 저 두 개의 영혼의 투쟁으로 점철돼 있다. 우선은 젊음을 되찾은 파우스트가 순결한 처녀 그레트헨(마르가레테)을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시민 비극이 전개된다.(1) 결말인즉, 그레트헨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죽음을 택함으로써 오히려 구원받고 파우스트는 악마의 의도와는 달리 숭고한 사랑의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이어, 역사적 과거와 신화적 과거가 뒤범벅이 된 세계 속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정치가 파우스트가 등장한다.(2) 트로이 전쟁이 괴테의 손으로 재창조되고 파리스의 연인이었던 헬레나가 파우스트의 아내가 되어 아들까지 낳는다. 이후 그는 또 다른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가로 왕에게 하사받은 영토에 자신의 왕국을 만들고자 한다. 세속적인 권력욕이 숭고한 인류애로 승화되는 지점인 셈이다. 결국 파우스트는 수로를 건설하는 소리를 탐닉하며(실은 무덤을 파는 소리이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치고 사망한다. 득의만만한 메피스토펠레스가 계약에 따라 그의 영혼을 접수하려는 찰나, 신의 종인 천사들이 악마의 노획물을 채간다. 그는 구원받은 것이다.

 

 

 

 

 

 

 

 

 

 

 

 

 

 

 

 

이 도저한 기독교적 결말이 의미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파우스트>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천상의 서곡을 보자. 괴테는 구약의 욥기를 자기 식으로 풀어쓰면서 파우스트를 욥과 같은 하느님의 종으로 정의한다. 그를 유혹하여 타락시키겠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호언장담에 신은 상당히 여유만만하게 응수한다.

 

그의 영혼을 그 근원으로부터 끌어내어, / 만일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면, / 어디 너의 길로 유혹하여 이끌어보려무나 / 하지만 언젠가는 부끄러운 얼굴로 나타나 이렇게 고백하게 되리라. /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더군요, 라고.”(1, 24)

 

요컨대 <파우스트>에서 악마의 장난과 인간의 방황은 신의 영역에 귀속되며 죄악은 역시나 신의 뜻에 따라 구원을 담보한다. 우리가 괴테의 기독교적 낙관론을 공유할 수만 있다면 물론 그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화해와 조화가 그토록 손쉽게 획득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린다면? 25, “파우스트의 불멸의 영혼을 인도하며천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영들의 세계에서 고귀한 한 사람이 / 악으로부터 구원되었도다. /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 / 그에겐 천상으로부터 / 사랑의 은총이 내려졌으니, / 축복받은 무리가 그를 / 진심으로 환영하게 하라.”(2, 381)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바로 이것이 두 개의 영혼의 투쟁으로 인해 고뇌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실존이다. <파우스트>에서 그 인간이 구원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하느님의 종이었기 때문, 그 사실을 온순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만간 이러저러한 이유로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반항아들이 등장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속한 세계는 고답적인 상징과 알레고리가 아니라 적나라한 속악이 판치는 날 것의 현실이다. 결국, 모든 모순과 갈등을 신에게로 환원시킬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출구를 찾을 것인가, 라는 문제 앞에서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어떤 경우든 분명한 것은, <파우스트>에서 웅장하고 대가적인 필치로 포착된 바, 인간은 두 개의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따라서 모종의 해법이, 적어도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난해한 작품을 읽고 또 읽는 이유, 아무리 읽어도 좀처럼 정복의 쾌감을 얻지 못하는 원한을 풀어보려고 노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네이버캐스트

 

 

 

 

 

 

 

 

 

 

 

 

 

 

 

 

 

도무지 괴테는 쓴  책, 번역된 책이 너무 많아, 따라가기(즉, 읽어가기) 정말 벅찹니다. 소설은 그래도 대략 읽을 만합니다. <친화력>도 재밌고요. <파우스트>에 관해서는 좀 더 길게 쓴 글도 있는데, 워낙 어려운(그래서 동화되기도 여전히 ㅠ.ㅠ 힘들고) 작품임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는...@--@ 그럼에도  시즌별로(^^;) 꾸준히 읽어오고 있습니다. 십대 중반, 이십대 중반, 삼십대 중반... 흠, 사십대 중반쯤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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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 문학으로의 초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 <사형장으로의 초대>(1936)

 

 

법에 따라 친친나트 C에게 속삭이는 소리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9) 그 즉시 그는 요새 감옥에 갇힌다. 간수(로디온)가 매일 아침 그의 감방에 나타나고(청소를 하고 거미에게 먹이를 준다) 감옥 소장(로드리그)과 변호사(로만)가 출몰하고 창백한 얼굴의 말없는 사서가 책자를 들고 드나든다. 공놀이를 즐기는, 소장의 열두 살짜리 (엠모치카)의 요사스러운 언행도 눈에 뜨인다. 이렇다 할 사건 없이, 혹은 어떤 사건도 사건으로 조명 받지 않는 채 지루한 반복과 사소한 변주가 지속되는 가운데 새로운 죄수(므슈 피에르)가 나타난다. 그는 친친나트를 구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말하지만 실은 이 모든 상황을 지휘해온 사형 집행인으로 밝혀진다. 20, 친친나트는 사형장으로 이송되는데, 과연 피에르의 표현대로 싹둑-싹둑”(233)될 것인가.

 

 

<사형장의 초대>는 어떻든 사상범의 체포와 사형이라는 주제를 다룬 소설이다.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풍자를 담은 환상적 알레고리로, 즉 자먀친이나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과 같은 부류로 읽어내고 싶은 유혹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바로 이런 독법에 작가는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했다. 이 당혹스러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친친나트가 속한 세계는 극도로 조건적이다.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것 같은 거대한 성채는 실제 감옥의 재현이라기보다는 그것의 도상적 축소판에 가깝다. 가짜 태양, 가짜 시계(비어 있는 숫자판에 30분마다 보초가 바늘을 새로 그려 넣고 시계 소리도 직접 낸다), 로디온의 거미 등 모든 것이 연극 소품 같고 이름이 비슷한(모두 R로 시작한다) 소장, 변호사, 간수는 일인이역을 맡은 한 두 명의 동일인처럼 보인다. ‘죄수 연기를 해야 하는 형리역을 맡은 무슈 피에르(Pierre의 첫 알파벳 P는 키릴 알파벳의 R과 모양이 같다)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친친나트와 대화를 나누며 커닝 쪽지를 힐끔힐끔 보기도 한다. 가구와 세간까지 몽땅 다 싸들고 친친나트를 면회 온 아내(마르핀카)와 처갓집 식구들은 통째로 인형극을 연상시킨다. 어머니(체칠리야 C)도 예외가 아니다. 생김새는 친친나트와 닮았으나, 폭풍우 속을 헤치고 온 듯 검은색 비옷에 방수 모자를 쓰고 있음에도 신발은 전혀 젖지 않았음이 강조된다. 그런 그녀를 향해 친친나트는 진짜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패러디라고 외친다.

 

각종 인형과 모조품 사이에서 친친나트는 전기, 즉 역사를 가진 유일한 인물이며 동시에 투명성에 지배되는 이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불투명한, 투시되지 않는 존재이다. 거듭된 체포와 석방에 이어 사형선고까지 받게 한 죄목인 그의 영지주의적 간악함은 유체이탈과 같은 형식으로 표현된다. “그는 (중략) 가발을 벗듯이 머리를 벗었고 벨트를 벗듯이 쇄골을 벗었고 갑옷을 벗듯이 흉곽을 벗었다. 엉덩이를 벗었고 다리를 벗었고 마치 장갑처럼 양팔을 벗어서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그에게서 남은 것들은 간신히 공기를 물들이면서 차츰차츰 흩어져 나갔다.”(32-33)

 

 

 

 

 

 

세계가 이원론적으로 구성된 만큼이나(연극적이면서도 속물적인 이 세계와 그것 너머에 존재한다고 상정되는 저 세계’) 그의 존재도 이분되어 있다. 사형이라는 꼭두각시놀음의 희생양 역을 맡은 친친나트, 그리고 그의 수명처럼 줄어가는 몽당연필을 갖고 뭔가를 끊임없이 써나가는 또 다른 친친나트. 두 세계의 경계에 놓인, 문자 그대로 옷을 벗고 단두대에 누워 참수의 순간을 기다리는 그의 최후 역시 독특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한 명의 친친나트는 숫자를 세고 있었지만, 다른 친친나트는 점점 멀어져 가는, 쓸데없이 숫자 세는 소리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았다. (중략) 내가 왜 여기 있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엎드려 있는 거지?”(250-251) 이렇게 자문한 다음 벌떡 일어난 그가 향하는 곳, “목소리들로 판단해 볼 때 그와 닮은 존재들이 서 있는 쪽”(252)이란 자유와 불멸의 저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리라.

 

친친나트가 읽는 책 중 <참나무>는 주인공인 참나무가 자기가 경험한 일을 연대기처럼 기록한 소설로서 사진과 같은 엄정한 리얼리즘을 따른다. 그러나 친친나트가 주인공인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그런 평균적인 리얼리티혹은 낡은 리얼리티”(<강력한 견해들>)를 배반하며 실제 세계를 고의로 뒤집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또한 고의로 부각시킴으로써 새로운 리얼리티를 선보인다. 체칠리야가 말하는 네트카’(현실)와 굽은 거울(예술)의 관계(“부정의 부정은 긍정을 낳는다”)는 나보코프 문학의 한 측면을 설명해준다.

 

 

 

 

 

 

 

 

 

 

 

 

 

 

나보코프는 영어로 쓴 <롤리타> 덕분에 대중적인 명성을 얻게 됐지만 그 자신은 미국 작가이기에 앞서 러시아 문학의 토양에서 성장한 러시아 작가이기를 바랐다. 러시아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로 태어났으나 볼셰비키 혁명 때 영원히 조국을 떠나야 했던 그는 이후 유럽을 떠돌다 미국에 정착,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하며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그가 말년을 보내며 생을 마감한 곳은 스위스였다. 이렇게 유목민처럼 떠도는 삶, 잃어버린 낙원을 향한 노스탤지어는 그의 문학의 토대가 되었다.

 

그가 자기 식으로 문학사에 안치한 러시아 고전문학, 아니, 기존의 문학도 큰 의미를 지닌다. 친친나트가 만드는 봉제인형(가죽 외투를 입은 작고 털 많은 푸슈킨, 화려한 조끼를 입은 쥐를 닮은 고골, 농민 외투를 입은 두툼한 코의 늙은 톨스토이)은 그 상징처럼 보인다. 무대장치와 배우들이 소멸되는 가운데 홀로 미지의 세계로 이월하는 친친나트처럼 나보코프는 신화적인 19세기를 넘어서 소설 장르의 새로운 장을 연다.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작가 스스로 자신의 최고작이라고 격찬한 소설이다. 독서가 여전히 고도의 지적인 유희로 남기를 바라는 독자에게 권한다.

 

-- <책&>

 

--  도스토예프스키 수업 마지막 시간을 나보코프(특히, 그의 <절망>) 얘기로 끝냈습니다. 러시아문학자로서 도...키 이후 집중적으로 파보고 싶은 작가가 나보코프인데요, 그의 저 오만한 귀족주의(?)를 참아주기 힘들 때가 더러 있긴 합니다...-_-;;  

-- 이번 달에 실린 원고인데, 원래는 <롤리타>로 쓰려고 했어요. 한데 소재가 소재인 만큼 다른 작품을 고려해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보코프의 러시아어 작품 중에서도 제일 난해한 걸로 여겨지는 이 작품이 됐지요. 더 나이 들면 (저작권도 소멸될 테고 ㅋㅋ) 번역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는 작품입니다. 

-- [롤리타] 때문에 생기는 편견과는 달리, 그의 결혼생활은 아주 원만했지요 ^^; 여러 모로 뼛속까지 귀족이었던 것 같아요...

 

나보코프도, 베라도 한 미모했지만(특히 베라는 유대인 특유의 우수가 돋보이죠), 늙어서도 여전히(!) 멋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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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드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재색을 겸비한, 부유한 명문가의 딸로서 그녀는 자신의 비상함을 또렷이 의식할뿐더러 불쾌감을 유발할 만큼 그것을 강조한다. “나와 같은 여자의 운명에는 모든 것이 특이해야만 해.”(2, 115) 이런 식의 오만한 자존심, 무엇보다도 귀족 살롱 특유의 권태가 그녀의 뜨거운 열정을 부채질한다. 사랑에 관한 한, 그녀의 야망은 그 시대의 도덕률과 관습이 허용하는 범위를 훌쩍 넘어선다. 특히 그녀는 라 몰 가문의 후예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탓에 앙리 4세의 부인이었던 마고(마르그리트) 여왕의 연인으로서 정쟁 과정에서 참수를 당한 보니파스 드 라 몰을 숭배한다. 심지어 그의 기일에는 검은 상복을 입기도 하다. 처형당한 연인의 머리를 품에 안았던 마고를 향한 모방 욕망은 더 대단하다.(<적과 흑>의 마지막 장면, 쥘리엥의 잘린 머리에 키스를 하는 마틸드를 보라.) 그뿐인가. 야심 찬 여장부의 대명사인 카트린느 드 메디치, 아벨라르의 연인 엘로이즈, 루소의 <() 엘로이스>의 주인공들 등 그녀가 동경하거나 적어도 염두에 두는 대상의 목록은 끝이 없다.

 

 

마틸드가 전범으로 삼은 보니파스 드 라몰, 그가 사랑한 여왕 마고. 이 영화로 더 유명해졌죠.^^ 

 

이렇듯, 마틸드는 타고난 지식욕과 왕성한 독서, 풍요로운 지적 환경 덕분에 실제로 사랑을 체험하기도 전에 사랑이라는 개념에 먼저 눈뜬다. 때문에 실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보다는 자신이 투영한 그 모습대로 사랑을 키우고 사랑의 대상을 자신의 틀에 따라 창조하려 한다. 그녀의 사랑이 시종일관 이기주의 혹은 자기중심주의의 산물인 것은 당연하다.

 

덧붙여 그녀는 어떤 경우에도 당당하다. 소위 양갓집 규수치고는 너무도 쉽게 쥘리엥과 육체적 관계를 맺고(더욱이 그녀가 먼저 유혹, 적어도 제안한다) 그 이후 자존심, 수치심과 싸우면서도 연애를 지속하며 임신을 한 후에도 아버지에게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한다. 한데, 그녀의 오만함이야말로 본질적으로 계급적 산물임을 간과하지 말아야한다. 쥘리엥의 추측대로, 마틸드는 가문과 재산과 미모 덕분에 앞으로 무난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모방욕망에 사로잡혀 인생을 소설책처럼, 역사 속 인물처럼 꾸려가도 현실적 기반이 튼튼한 자는 파멸하지 않는 법이다.

 

쥘리엥은 말하자면, 마틸드와 드 레날 부인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으나, 앞서 보았듯, 그의 인생은 시작부터 모방 욕망에 감염돼 있었다. ‘나폴레옹처럼!’이라는 좌우명은 그 무엇보다도 연애에 적용된다. , 상류 사회의 상징처럼 나타나는 여인을 하나씩 둘씩 정복하는 것. 드 레날 부인과의 관계도 처음에는 사랑의 행복이라기보다는 정복의 쾌감을 안겨준다. 물론, 결국에는 레날 부인의 사랑에 모방 욕망마저 희석되고, 한계 상황에 처한 그가 의지하는 존재 역시 레날 부인이지만.

 

 

 

 

 

 

 

 

 

 

 

 

(역시나 <적과 흑>에 모종의 전범을 제공한 루소의 이 소설. 물론 이 소설 이전에 철학자 아벨라르와 그의 제자였던 엘로이즈의 연애가 있었지요.)

 

반면, 그에게 마틸드는 시종일관 상승과 정복과 모험의 욕망을 자극하는 대상이다. 실상 엇비슷한 또래의 젊은 연인 사이에 관능적 열정이 개입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둘 모두가 갖고 있던 모방 욕망이다.(“사실 그들의 환희에는 약간 의도적인 기색이 스며있었다. 정열적인 사랑이 그들에게는 아직 현실이기보다는 모방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2, 138) 쥘리엥은 은연중에 스스로를 아벨라르에, 생 프뢰(<() 엘로이즈>의 남자 주인공)에 비유하곤 한다. 이들은 대체로 다 비극의 주인공인데, 쥘리엥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이런 비극으로 몰아간 것은 아닐까. 그러나 살다 보니 죽는 것이지, 죽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다. 그가 열심히 들고 날랐던 사다리는 어쨌거나 위로 올라가기 위한 도구였다. 사랑의 사다리가 결국 추락의 도구로 변질된 것은 역시나 비천한 신세드높은 마음을 키웠기 때문이리라.

 

5. 스탕달의 소설론 -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적과 흑>에는 ‘1830년 연대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1830년은 나폴레옹의 실각한 뒤 다시 왕좌를 거머쥔 부르봉 왕조가 7월 혁명에 의해 무너진 해이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 언급되는 프랑스의 왕은 여전히 샤를르 10세이며 연구자들이 추적한 바 쥘리엥 소렐의 모험은 18269월말에서 18307월말 사이에 걸쳐 일어난다. 한데 소설이 발표된 해는 1830년이다. , 이 소설은 7월 혁명의 발발을 전제하지 않은 채 거의 전적으로 왕정복고 시대의 프랑스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적과 흑>이 어쨌거나 정치소설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수시로 정치에 대해 논하며(특히 드 라 몰 후작의 살롱) 그들 스스로 모종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기도 한다. 피라르 신부(장세니스트: 자유주의자)와 프릴레르 부주교(예수회파: 자유주의자)의 경우처럼 종교적 분파와 정치적 성향이 맞물려 눈에 뜨이는 갈등을 빚어내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많은 이들의 삶이 정치적 정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오늘날 <적과 흑>이 지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대한 충실한 기록으로 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야말로 연대기인 것인데, 이는 스탕달의 소설적 원칙과 맞닿아 있다. 가령 마틸드와 상류 사회를 묘사하는 부분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그런데 독자여, 소설이란 큰길가를 돌아다니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때로 그것은 푸른 창공을 비춰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도로에 파인 수렁의 진흙을 비춰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여러분은 채롱에 거울을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을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다니! 그의 거울이 진흙을 비추면 여러분은 그 거울을 비난한다! 차라리 수렁이 파인 큰길을, 아니 그보다도 물이 괴어 수렁이 파이도록 방치한 도로 감시인을 비난함이 마땅할 것이다.”(2, 162)

 

소설은 현실을 철저히 반영해야 한다는 원칙은 낭만주의가 팽배하던 당시 문단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거의 혁명적인 측면이 있다. <적과 흑>과 비슷한 시기(1831)에 발표된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이 얼마나 낭만적인가를 생각해보라. 물론, 스탕달의 주인공들 역시 낭만적 지향과 파국을 보여주지만, 그들을 에워싼 현실과 세태 묘사, 계급의식과 환경결정론의 대두, 무엇보다도 훗날 니체를 감동시킨 치밀한 심리 묘사 등은 가히 사실주의의 문을 연 소설답다. 이 경우 정치와 시대에 관한 배려는 필수적인데, 소설 속에 느닷없이 삽입된 한 인물의 말이 그 근거이다. “만약 당신의 인물들이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1830년의 프랑스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의 책은 당신이 주장하듯 거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2, 195)

 

소설가로서 스탕달은 모방 욕망, 낭만적 거짓에 맞서 소설적 진실을 구축하려 했다. 쥘리엥의 비극은 곧 모방 욕망의 비극이기도 하다. 한데 정작 스탕달 자신은 낭만적 가면을 쓴 채 댄디, 예술애호가, 1812년의 군인, 사랑에 빠진 연인, 정치가, 역사가 등 수시로 역할을 바꿔가면서 유희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의 유언이자 묘비명이 보여주듯,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글쓰기와 사랑-연애였으리라. “밀라노인 아리고 베일레, 살았고 썼고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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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쥘리엥 소렐의 환멸과 좌절

 

쥘리엥 소렐은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즉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비의 집에서 거의 기생충 취급을 받았다. 이방인이라는 꼬리표는 어딜 가나 그를 따라다닌다. 우선 지방 귀족 사회에 가정교사로 편입된 청년의 지위는 제법 애매하다. 지적인 능력과 야망의 크기에 비해 그 사회적 처지는 어쩔 수 없이 굴욕적이며, 쥘리엥처럼 성격이 예민한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는 추상적인 의미의 상류 사회는 흠모하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가령, 가난하되 오만한 사람의 특징인 바, 추상적인 돈은 동경하되 구체적인 돈은 경멸하고 대체로 이해타산과 축재(재테크!)에 둔하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유일한 가치인 순수를 지키려는 본능적인 방어기제의 산물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출세욕이 강할수록 속물적 가치에 대한 혐오는 더 커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것이 그가 시장 집에서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한편, 브장송의 신학교는 그야말로 시련의 도가니이다. 성직에 대한 소명감보다는 최대한 손쉽게 빵과 안정을 얻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온 거친 평민의 아들들이 모두 쥘리엥의 적이 된다. 그의 장점(우수한 성적, 순수에의 집착, 성취욕구, 성실성 등)이 질투와 힐난을 불러온다. 일등을 하면 세상살이가 피곤해진다. 이런 현실을 통감할수록 쥘리엥의 소외감은 더 커진다. 피라르 신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의 인생은 정말 우울했을 터이다.

 

드 라 몰 후작의 저택은 어떠한가. 작가는 쥘리엥이 시골 출신임을 수시로 언급하면서 파리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실제로 파리 귀족사회는 지방 귀족사회와는 사뭇 다르다. 쥘리엥의 두 연인 드 레날 부인과 마틸드는 그 상징 같다. 전자가 신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온화하고 다정한 모성에 가깝다면(, 촌스럽고 그렇기에 숭고하다!) 후자는 도발적이고 자극적이기에 더욱더 정복의 욕구를 자극한다. 그럼에도 그 욕구를 성공리에 실현하기에는, 즉 파리의 노회한 귀족 사회를 감당하기에는 그는 너무 순수했거나 너무 어리석었다. 타고난 능력 덕분에 후작의 밀사가 될 만큼 신임을 얻어놓고서도 고작(!) 여자 문제 때문에 파멸하다니!

 

 

 

 

 

 

 

 

 

 

 

 

 

 

 

하지만 쥘리엥의 매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그의 야망이 좌절됐을 때이다. 후작의 손에 떨어진 드 레날 부인의 편지(실은 어느 사제가 쓴 것을 부인이 베껴 적은 것이다)를 마틸드에게서 건네받고 그것을 다 읽자마자 그는 말한다. “나는 드 라 몰 후작님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 어떤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기 딸을 이런 작자에게 주려 하겠소! 잘 있어요!”(2, 319) 그러곤 그 길로 베르에르 시로 달려가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드 레날 부인을 권총으로 쏜다. 이 과정에 대한 묘사는 무척 짧을뿐더러 그의 심리에 관한 언급이 없다. 부인을 쏜 것은 과연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어떻든 이후 우리가 보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의연히 받아들이는 쥘리엥이다. 굳이 발뺌을 하지도 않거니와 자살의 유혹도 나폴레옹을 떠올리며 일찌감치 물리친다. “나는 아직 대여섯 주일을 살 수 있다. 자살! 안 될 말이지. 나폴레옹도 자살하지 않고 살아갔는데.”(2, 331) 브장송의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죽을 날을 세는, 더 정확히 남아 있는 날을 조용히 향유하는 쥘리엥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숭고하다. 진정한 높이는 오히려 밑바닥으로 추락했을 때 확보된다는 것, 대단한 역설이 아닌가. 법정 가득 울려 퍼지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여러분에게 용서를 청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조금도 환상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 내 범죄는 잔혹한 것이며 또한 계획적인 것입니다. 배심원 여러분, 그러므로 본인은 사형을 당해 마땅합니다. 그러나 내 죄가 좀 더 가벼운 것이었다 해도 사람들은 내 젊은 나이가 동정을 살 만하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나를 통해 나와 같은 부류의 젊은이들을 징벌하고 그들을 영원히 의기소침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본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즉 하층 계급에서 태어나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다행히 좋은 교육을 받았고 부유한 사람들의 오만이 사교계라고 부르는 것에 대담하게 끼어들려 한 젊은이들 말입니다. / 여러분, 그 점이 바로 본인의 범죄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나는 나와 같은 계급의 동료들에게 판결받지 못하는 만큼, 내 범죄는 더욱더 준엄한 징벌을 당할 것입니다. 본인의 눈에는 배심원석에 부유한 농민 하나 보이지 않고 오직 분개한 부르주아들만이 있을 뿐입니다.”(2, 373-374)

 

살인미수는 큰 죄이지만, 쥘리엥의 주장을 피해의식의 산물로만 볼 수는 없다. 문제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여러 정황(드 라 몰 후작과 프릴레르 부주교의 해묵은 반목, 남작에다 시장이 된 발르노의 복수심, 마틸드의 영웅주의가 빚어낸 역효과 등)과 사회 구조이다. <적과 흑>의 초반부에 등장한, 지방 권력의 농간으로 브장송에서 사형을 당한 루이 장렐의 운명이 실로 복선이었던 셈이다.

 

한편 통렬한 계급의식에 사로잡힌 쥘리엥의 고백에 따르면, 그의 죄는 상승 욕망, 말하자면 꿈꿀 권리를 가진 것이다. 더 깊이 파고들면, 상류 사회에 편입하고자 하면서도 그것을 경멸하고 또한 그러면서도 상승 욕망을 버리지 못한 것이야말로 자기기만의 핵심이다. 그러나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이 자기 모순 덕분에 쥘리엥은 19세기 판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끝까지 운명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최후을 맞이하는 영웅! 그 운명의 이름이 사랑이라는 점에서 <적과 흑>은 확실히 연애소설이다.

 

 

 

 

 

 

 

 

 

 

 

 

 

 

 

 

4. 연애의 법칙, 인생의 법칙

 

스탕달은 <연애론>에서 사랑을 열정적인 사랑, 취미적인 사랑, 육체적인 사랑, 허영적인 사랑 등 네 종류로 구분한다. 이 분류법을 <적과 흑>의 주인공에게 적용시키면, 드 레날 부인과의 사랑은 열정적인 사랑에, 마틸드와의 사랑은 허영적인 사랑에 해당하겠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도 그 출발점은 허영적인 사랑이다. 스탕달의 비유를 빌자면, 프랑스 남자라면 누구나 훌륭한 말[]을 갖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랑 말이다. <적과 흑>을 놓고 보면 문제는 우리의 연인들이 소설을 읽는지 어떤지로 볼 수 있다.

 

우선 드 레날 부인은 사랑이 모방 욕망의 산물인 파리(“파리에서는 사랑이란 소설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1, 66)가 아닌 시골에 산다. 물론 지방 여성도(가령 엠마 보바리처럼) 소설을 읽을 수 있으나 그녀는 소설은커녕 대체로 책 자체를 별로 읽지 않는다. 때문에 그녀의 삶도, 사랑도 ‘-처럼의 유혹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자유롭다. 현모양처의 삶이든, 10세 연하의 정부를 둔 서른 살짜리 유부녀 연인의 역할이든 모두 심리적, 육체적 욕구에 따라 자연스레 주어진 것이다. 그녀의 사랑도 스스로 발견하고 또 창조해가는 본능적인 형식에 가깝다. 가령, 쥘리엥이 파리로 떠나기 전, 12일에 걸친 마지막 밀회는 너무나 대담하다. 쥘리엥의 부재를 견디는 방식, 즉 그녀의 종교는 거의 광신에 가깝고 그나마도 별 효과를 얻지 못한다. 몸과 마음의 욕망에 따라 발생하여 성장한 사랑의 열병은 오직, 그 대상과의 합일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그녀가 쥘리엥이 처형된 지 사흘 만에 죽는 것은 (병명도 명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연성이 좀 떨어진다!) 이 사랑의 논리에 따르면 당연하다.

 

레날 부인 역을 캐롤 부케가 맡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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