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코프 문학으로의 초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 <사형장으로의 초대>(1936)

 

 

법에 따라 친친나트 C에게 속삭이는 소리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9) 그 즉시 그는 요새 감옥에 갇힌다. 간수(로디온)가 매일 아침 그의 감방에 나타나고(청소를 하고 거미에게 먹이를 준다) 감옥 소장(로드리그)과 변호사(로만)가 출몰하고 창백한 얼굴의 말없는 사서가 책자를 들고 드나든다. 공놀이를 즐기는, 소장의 열두 살짜리 (엠모치카)의 요사스러운 언행도 눈에 뜨인다. 이렇다 할 사건 없이, 혹은 어떤 사건도 사건으로 조명 받지 않는 채 지루한 반복과 사소한 변주가 지속되는 가운데 새로운 죄수(므슈 피에르)가 나타난다. 그는 친친나트를 구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말하지만 실은 이 모든 상황을 지휘해온 사형 집행인으로 밝혀진다. 20, 친친나트는 사형장으로 이송되는데, 과연 피에르의 표현대로 싹둑-싹둑”(233)될 것인가.

 

 

<사형장의 초대>는 어떻든 사상범의 체포와 사형이라는 주제를 다룬 소설이다.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풍자를 담은 환상적 알레고리로, 즉 자먀친이나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과 같은 부류로 읽어내고 싶은 유혹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바로 이런 독법에 작가는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했다. 이 당혹스러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친친나트가 속한 세계는 극도로 조건적이다.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것 같은 거대한 성채는 실제 감옥의 재현이라기보다는 그것의 도상적 축소판에 가깝다. 가짜 태양, 가짜 시계(비어 있는 숫자판에 30분마다 보초가 바늘을 새로 그려 넣고 시계 소리도 직접 낸다), 로디온의 거미 등 모든 것이 연극 소품 같고 이름이 비슷한(모두 R로 시작한다) 소장, 변호사, 간수는 일인이역을 맡은 한 두 명의 동일인처럼 보인다. ‘죄수 연기를 해야 하는 형리역을 맡은 무슈 피에르(Pierre의 첫 알파벳 P는 키릴 알파벳의 R과 모양이 같다)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친친나트와 대화를 나누며 커닝 쪽지를 힐끔힐끔 보기도 한다. 가구와 세간까지 몽땅 다 싸들고 친친나트를 면회 온 아내(마르핀카)와 처갓집 식구들은 통째로 인형극을 연상시킨다. 어머니(체칠리야 C)도 예외가 아니다. 생김새는 친친나트와 닮았으나, 폭풍우 속을 헤치고 온 듯 검은색 비옷에 방수 모자를 쓰고 있음에도 신발은 전혀 젖지 않았음이 강조된다. 그런 그녀를 향해 친친나트는 진짜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패러디라고 외친다.

 

각종 인형과 모조품 사이에서 친친나트는 전기, 즉 역사를 가진 유일한 인물이며 동시에 투명성에 지배되는 이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불투명한, 투시되지 않는 존재이다. 거듭된 체포와 석방에 이어 사형선고까지 받게 한 죄목인 그의 영지주의적 간악함은 유체이탈과 같은 형식으로 표현된다. “그는 (중략) 가발을 벗듯이 머리를 벗었고 벨트를 벗듯이 쇄골을 벗었고 갑옷을 벗듯이 흉곽을 벗었다. 엉덩이를 벗었고 다리를 벗었고 마치 장갑처럼 양팔을 벗어서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그에게서 남은 것들은 간신히 공기를 물들이면서 차츰차츰 흩어져 나갔다.”(32-33)

 

 

 

 

 

 

세계가 이원론적으로 구성된 만큼이나(연극적이면서도 속물적인 이 세계와 그것 너머에 존재한다고 상정되는 저 세계’) 그의 존재도 이분되어 있다. 사형이라는 꼭두각시놀음의 희생양 역을 맡은 친친나트, 그리고 그의 수명처럼 줄어가는 몽당연필을 갖고 뭔가를 끊임없이 써나가는 또 다른 친친나트. 두 세계의 경계에 놓인, 문자 그대로 옷을 벗고 단두대에 누워 참수의 순간을 기다리는 그의 최후 역시 독특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한 명의 친친나트는 숫자를 세고 있었지만, 다른 친친나트는 점점 멀어져 가는, 쓸데없이 숫자 세는 소리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았다. (중략) 내가 왜 여기 있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엎드려 있는 거지?”(250-251) 이렇게 자문한 다음 벌떡 일어난 그가 향하는 곳, “목소리들로 판단해 볼 때 그와 닮은 존재들이 서 있는 쪽”(252)이란 자유와 불멸의 저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리라.

 

친친나트가 읽는 책 중 <참나무>는 주인공인 참나무가 자기가 경험한 일을 연대기처럼 기록한 소설로서 사진과 같은 엄정한 리얼리즘을 따른다. 그러나 친친나트가 주인공인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그런 평균적인 리얼리티혹은 낡은 리얼리티”(<강력한 견해들>)를 배반하며 실제 세계를 고의로 뒤집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또한 고의로 부각시킴으로써 새로운 리얼리티를 선보인다. 체칠리야가 말하는 네트카’(현실)와 굽은 거울(예술)의 관계(“부정의 부정은 긍정을 낳는다”)는 나보코프 문학의 한 측면을 설명해준다.

 

 

 

 

 

 

 

 

 

 

 

 

 

 

나보코프는 영어로 쓴 <롤리타> 덕분에 대중적인 명성을 얻게 됐지만 그 자신은 미국 작가이기에 앞서 러시아 문학의 토양에서 성장한 러시아 작가이기를 바랐다. 러시아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로 태어났으나 볼셰비키 혁명 때 영원히 조국을 떠나야 했던 그는 이후 유럽을 떠돌다 미국에 정착,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하며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그가 말년을 보내며 생을 마감한 곳은 스위스였다. 이렇게 유목민처럼 떠도는 삶, 잃어버린 낙원을 향한 노스탤지어는 그의 문학의 토대가 되었다.

 

그가 자기 식으로 문학사에 안치한 러시아 고전문학, 아니, 기존의 문학도 큰 의미를 지닌다. 친친나트가 만드는 봉제인형(가죽 외투를 입은 작고 털 많은 푸슈킨, 화려한 조끼를 입은 쥐를 닮은 고골, 농민 외투를 입은 두툼한 코의 늙은 톨스토이)은 그 상징처럼 보인다. 무대장치와 배우들이 소멸되는 가운데 홀로 미지의 세계로 이월하는 친친나트처럼 나보코프는 신화적인 19세기를 넘어서 소설 장르의 새로운 장을 연다.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작가 스스로 자신의 최고작이라고 격찬한 소설이다. 독서가 여전히 고도의 지적인 유희로 남기를 바라는 독자에게 권한다.

 

-- <책&>

 

--  도스토예프스키 수업 마지막 시간을 나보코프(특히, 그의 <절망>) 얘기로 끝냈습니다. 러시아문학자로서 도...키 이후 집중적으로 파보고 싶은 작가가 나보코프인데요, 그의 저 오만한 귀족주의(?)를 참아주기 힘들 때가 더러 있긴 합니다...-_-;;  

-- 이번 달에 실린 원고인데, 원래는 <롤리타>로 쓰려고 했어요. 한데 소재가 소재인 만큼 다른 작품을 고려해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보코프의 러시아어 작품 중에서도 제일 난해한 걸로 여겨지는 이 작품이 됐지요. 더 나이 들면 (저작권도 소멸될 테고 ㅋㅋ) 번역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는 작품입니다. 

-- [롤리타] 때문에 생기는 편견과는 달리, 그의 결혼생활은 아주 원만했지요 ^^; 여러 모로 뼛속까지 귀족이었던 것 같아요...

 

나보코프도, 베라도 한 미모했지만(특히 베라는 유대인 특유의 우수가 돋보이죠), 늙어서도 여전히(!) 멋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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