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 악마의 존재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다

- 괴테, <파우스트>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서도 오히려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우울과 환멸에 빠진 파우스트 박사. 그는 의뭉스러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의 종이 되어 내가 원하는 것을 전부 하게 해 달라, 하지만 내가 어느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하는 즉시, “어느 순간에 집착하는 즉시나의 영혼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라는 것. 정작 <파우스트>를 읽지 않아도 인간, 특히 지식의 극점에 도달한 인간과 악마의 계약은 늘 선악의 피안을 넘어 타락의 심연까지 가보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해 왔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우리의 감미로운 기대와는 달리 악마 혹은 의 향연이 아니라 악마의 존재마저도 지배하는 신의 존재, ‘마저도 포용하는 의 힘을 보여주는 데 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자신을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내는 힘의 일부분이라고 소개한다. 악마라는 신분상 부정(否定), , 파괴 등 악의 영역을 담당하나 그 역시 궁극적으로는 신에게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칙적으론신의 닮은꼴인 인간은 어떠한가? 파우스트는 제자 바그너 앞에서 다음과 같은 고뇌를 토로한다.

 

내 가슴 속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서 / 하나가 다른 하나와 떨어지려고 하네. / 하나는 음탕한 애욕에 빠져 / 현세에 매달려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고, / 다른 하나는 과감히 세속의 티끌을 떠나 / 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고 하네.”(1, 69)

 

그가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을 받아 ()체험하는 삶은 저 두 개의 영혼의 투쟁으로 점철돼 있다. 우선은 젊음을 되찾은 파우스트가 순결한 처녀 그레트헨(마르가레테)을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시민 비극이 전개된다.(1) 결말인즉, 그레트헨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죽음을 택함으로써 오히려 구원받고 파우스트는 악마의 의도와는 달리 숭고한 사랑의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이어, 역사적 과거와 신화적 과거가 뒤범벅이 된 세계 속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정치가 파우스트가 등장한다.(2) 트로이 전쟁이 괴테의 손으로 재창조되고 파리스의 연인이었던 헬레나가 파우스트의 아내가 되어 아들까지 낳는다. 이후 그는 또 다른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가로 왕에게 하사받은 영토에 자신의 왕국을 만들고자 한다. 세속적인 권력욕이 숭고한 인류애로 승화되는 지점인 셈이다. 결국 파우스트는 수로를 건설하는 소리를 탐닉하며(실은 무덤을 파는 소리이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치고 사망한다. 득의만만한 메피스토펠레스가 계약에 따라 그의 영혼을 접수하려는 찰나, 신의 종인 천사들이 악마의 노획물을 채간다. 그는 구원받은 것이다.

 

 

 

 

 

 

 

 

 

 

 

 

 

 

 

 

이 도저한 기독교적 결말이 의미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파우스트>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천상의 서곡을 보자. 괴테는 구약의 욥기를 자기 식으로 풀어쓰면서 파우스트를 욥과 같은 하느님의 종으로 정의한다. 그를 유혹하여 타락시키겠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호언장담에 신은 상당히 여유만만하게 응수한다.

 

그의 영혼을 그 근원으로부터 끌어내어, / 만일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면, / 어디 너의 길로 유혹하여 이끌어보려무나 / 하지만 언젠가는 부끄러운 얼굴로 나타나 이렇게 고백하게 되리라. /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더군요, 라고.”(1, 24)

 

요컨대 <파우스트>에서 악마의 장난과 인간의 방황은 신의 영역에 귀속되며 죄악은 역시나 신의 뜻에 따라 구원을 담보한다. 우리가 괴테의 기독교적 낙관론을 공유할 수만 있다면 물론 그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화해와 조화가 그토록 손쉽게 획득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린다면? 25, “파우스트의 불멸의 영혼을 인도하며천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영들의 세계에서 고귀한 한 사람이 / 악으로부터 구원되었도다. /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 / 그에겐 천상으로부터 / 사랑의 은총이 내려졌으니, / 축복받은 무리가 그를 / 진심으로 환영하게 하라.”(2, 381)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바로 이것이 두 개의 영혼의 투쟁으로 인해 고뇌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실존이다. <파우스트>에서 그 인간이 구원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하느님의 종이었기 때문, 그 사실을 온순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만간 이러저러한 이유로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반항아들이 등장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속한 세계는 고답적인 상징과 알레고리가 아니라 적나라한 속악이 판치는 날 것의 현실이다. 결국, 모든 모순과 갈등을 신에게로 환원시킬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출구를 찾을 것인가, 라는 문제 앞에서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어떤 경우든 분명한 것은, <파우스트>에서 웅장하고 대가적인 필치로 포착된 바, 인간은 두 개의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따라서 모종의 해법이, 적어도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난해한 작품을 읽고 또 읽는 이유, 아무리 읽어도 좀처럼 정복의 쾌감을 얻지 못하는 원한을 풀어보려고 노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네이버캐스트

 

 

 

 

 

 

 

 

 

 

 

 

 

 

 

 

 

도무지 괴테는 쓴  책, 번역된 책이 너무 많아, 따라가기(즉, 읽어가기) 정말 벅찹니다. 소설은 그래도 대략 읽을 만합니다. <친화력>도 재밌고요. <파우스트>에 관해서는 좀 더 길게 쓴 글도 있는데, 워낙 어려운(그래서 동화되기도 여전히 ㅠ.ㅠ 힘들고) 작품임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는...@--@ 그럼에도  시즌별로(^^;) 꾸준히 읽어오고 있습니다. 십대 중반, 이십대 중반, 삼십대 중반... 흠, 사십대 중반쯤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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