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 미학과 숭고미: 숙명’, 그것의 이름은 노트르담

- 빅토르 위고, <파리의 노트르담>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은 루이 11세 치하, 15세기 프랑스 파리를 그린 역사소설이다. 실제로 시테 섬과 이른바 뒷골목, 노트르담 대성당을 비롯한 건축물 묘사도 생생하고 소설 속 인물로 등장하는 루이 11세의 형상도 또렷한 편이다. 마녀재판이나 공개처형을 매개로 한, 당시의 사법, 형벌 제도에 대한 작가의 비판도 맹렬하다. 여러 모로 29세의 위고가 품었던 작가적 야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정작 소설은 산만한 구성, 지루한 장광설, 지나치게 환상적인인물과 사건 등 19세기의 여느 프랑스 고전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소설이 거의 200년 동안 우리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파리의 노트르담>은 낭만주의 미학이 십분 발현된 소설이다. 인물들의 성격은 물론 갈등과 사건의 양상 역시 대단히 극적이다. 작품의 중심에 서 있는 라 에스메랄다는 그 자체로 동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충격적일 만큼 뛰어난 아름다움 탓에 끊임없이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금욕과 의지의 화신인 클로드 프롤로 부주교마저 그녀에게 눈이 멀어 상식적으론 납득되지 않는 행동을 보여준다. 대체로 이 인물은 종교와 학문의 빛에 가려진 중세의 암흑을 상징하는 것 같다. 라 에스메랄다를 향한 그의 열정 역시 어딘가 진정성이 결여된, 열정이라기보다는 열정에 관한 수사(修辭)처럼, 억눌린 관능적 욕망의 병리적 분출처럼 보인다.

 

그에 비하면 카지모도는 추()의 극치를 이루는 외모 덕분에 오히려 더 생기롭다. 등뼈가 활처럼 휘고 가슴뼈가 앞으로 툭 불거지고 머리는 양어깨 속에 푹 파묻힌 심각한 곱사등에 두 다리는 제멋대로 뒤틀린 절름발이, 왼쪽 눈에는 무사마귀가 나 있는 애꾸눈. 게다가 열네 살 때부터 종지기로 살아 귀마저 멀었다. 이 흉악한 존재가 곧 성모마리아’(노트르담)의 수호를 받는 성역의 닮은꼴, 심지어 그것과 한 몸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 피조물과 이 건물 사이에는 미리부터 존재하던 신비로운 조화 같은 것이 있었다. (중략) 그리하여 늘 대성당의 방향으로 자라나고, 거기서 살고, 거기서 자고, 거의 한 번도 거기서 나가지 않고, 줄곧 그 신비로운 압력을 받으면서, 시나브로 그는 그것과 닮아가고, 말하자면 그 속에 들어박혀, 마침내 그것의 일부를 이루기에 이르렀다. (중략) 그의 툭툭 불거진 각은 건물의 움푹움푹 들어간 각에 끼여 박혀, 그는 이 건물의 입주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연적인 내용물이기도 한 것 같았다.(1, 282)

 

그가 처형되기 직전의 라 에스메랄다를 구출함으로써 성역 안에서 절대적인 미와 절대적인 추가 충돌, 결합한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꼼짝도 않고 말없이 서로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는 아리땁기 그지없는 것을, 그녀는 추하기 그지없는 것을 보고 있었던 셈이다.” 미추의 대립은 선악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것은 선하고 추한 것은 악하다. 라 에스메랄다는 동정심도 많고 마음씨도 착하지만 카지모도는 심술궂고 사납고 거칠다. 그러나 작가가 추구한 미학은 이렇게 경직된 미추의 변증법을 넘어선다.

 

 

 

 

 

 

 

 

 

 

젊은 위고가 숭상한 낭만주의, 소위 그로테스크 미학의 핵심은 세계의 이원성과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통찰에 있다. , 세계와 인간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움과 추함, 선함과 악함, 빛과 어둠 등 서로 모순되는 가치로 구성돼 있다. 그 날카로운 대조는 대단히 불편하고 아주 자주 비현실적이지만 대신 단순한 아름다움이 결코 줄 수 없는 숭고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팜므 파탈야수-괴물의 사랑은 그로테스크하지만, 아니 그로테스크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숭고하다.

 

그녀가 채광창으로 가서 보니, 가련한 꼽추는 벽 모퉁이에, 고통스럽고 체념한 듯한 태도로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기에게 자아내는 불쾌감을 억제하려고 애를 썼다. “이리 와요.”하고 그녀는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집트 아가씨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카지모도는 그녀가 자기를 쫓아내는 줄 알았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물러갔다, 절뚝거리면서, 천천히, 고개를 수그리고, 절망으로 가득 찬 눈을 처녀를 향해 감히 쳐들지도 못하고. “이리 오라니깐.”하고 그녀는 외쳤다. 그러나 그는 계속 떠나갔다. 그러자 그녀는 독방에서 뛰어나가, 그에게로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자기 몸에 닿는 것을 느끼고, 카지모도는 사지를 떨었다. 그는 애원하는 듯한 눈을 들어, 그녀가 자기를 그녀 곁으로 도로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그의 얼굴은 기쁨과 애정으로 온통 반짝였다. 그녀는 그를 자기의 독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 했으나 그는 끝내 문턱 위에 서 있었다. “안 돼요, 안 돼요.” 그는 말했다. “부엉이는 종달새의 보금자리에 들어가지 않는 법이에요.”(2, 250)

 

이 숭고한 열정의 연원은 꽤 깊다. 18년 전, 집시들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천사 같은 계집애를 훔쳐가면서 그 자리에 괴물 같은 사내애를 놓아두었다. 그리하여 노트르담의 안을 구석구석 누비던 사내애와 노트르담 밖의 거리를 누비던 계집애는 먼 훗날 죽음을 통해 완전히 결합한다. 노트르담의 벽 어디에 그리스어로 새겨진 글자 숙명의 실현이랄까.

 

 

 

 

 

(빅토르 위고의 소설 중 지명도는 낮지만, 개인적으론 무척 감동 깊게 읽은 소설입니다. <악령>에도 언급되는데, 좋은 번역이 나와 기뻤지요...^^;)

 

 

 

 

 

 

이 단어는 실상 <파리의 노트르담>의 모든 인물을 다 아우른다. 양자의 손에 목숨을 잃은 프롤로, 파리를 배회하는 거리의 시인 그랭구아르, 경박한 바람둥이의 전형 페뷔스, 잃어버린 딸을 되찾는 순간 영원히 잃어야 했던 자루 수녀귀딜, 노트르담을 공격하는 부랑자와 거지 무리들. 이들은 모두 자기 삶의 주인공이지만 동시에 숙명이라는 거대한 이름에 종속된 자들이다. 숭고한 괴물처럼(카지모도!) 묵묵히 버티고 서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은 결국 그 숙명의 상징이리라.

 

-- 네이버캐스트

 

--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레 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의 또 다른 인기작입니다^^; 두 작품을 비교(?)하면, 아무래도 <레...>가 압권이죠, 여러 모로? 특히, 후반부의 장발장은 소위 할아버지 역할을 맡는 데 재미를 붙인 위고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코제트와 그의 관계도 감동적이고.) 하기야 우리에게 그는 늘 할아버지네요 ㅎㅎ 

 

 

빅토르 위고와 동갑인 유명 작가, 바로, 모험소설의 대가,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 등을 남긴 (아버지-페르) 뒤마입니다! 위고는 순문학이고 뒤마는 통속문학이었으나(지금도 대략 그렇게 정리되겠으나), 결국 책은 독자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또 오래 받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니까요.

그나저나, 작가도 이미지 관리를 잘 해야겠어요. 적어도 사진은 잘 나온 것만 몇 장 남겨야...-_-;; 뒤마 1세는, 그의 사진은 처음 보는데(!), 언젠가 아들(<춘희>를 썼죠)의 못된(?) 회상대로 참 호탕(?)하게 생겼네요 ㅋㅋ  성인병을 많이 앓았을 것 같아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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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카라마조프>의 아이들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아이들

 

과연 신 없는 유토피아가 가능할까. 이반의 이성은 그 꿈에 젖어 있지만 드미트리의 감성과 알료샤의 영성은 영원히 신의 품 안에 머물고자 한다. 신의 존재를 상정하든 말든 <카라마조프>에서 영원한 삶을 담보해주는 지상낙원의 은유는 아이들이 아닌가 싶다.

 

 

 

 

 

 

 

 

 

 

 

 

 

 

(하나는 내가 번역한 책, 하나는 내가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완전 빠져 있던 번역본(옛날 판본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죠 ^^;), 마지막 하나는 대학원 시절 원문 대조 교열을 본 번역본입니다 ^^;)

 

 

일류샤라는 아이가 그야말로 아무런 이유 없이, 이반의 어법을 빌자면 부조리하게 죽는다. 그리고 그 아이의 무덤 옆에 콜랴 크라소트킨, 스무로프 등 다른 아이들이 모여 있다. 앞서, 이반이 추상적인 아이들의 고통을 근거로 반역을 주장한 것을 상기해보라. 알료샤는 정반대로 구체적인 한 아이 일류샤의 죽음을 근거로 사랑과 용서를 촉구한다. 일류샤의 죽음이 단순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바로 이 아이들의 존재가 필요하다. 순환논리 같지만, 이들이 살아 있기에 또한 일류샤의 죽음이 유의미하다.

 

마찬가지로 살아남은 카라마조프들은 아비와 이복형 스메르쟈코프의 죄악과 죽음을 대가로 삶을 선사받는 셈이다. 뒤집어 말하면, 아비와 형제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들들-형제들이 앞으로 아름다운 삶을 일궈나가는 것뿐이다. 요한복음에서 취한 제사가 의미하는 바도 이것이 아닐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서 12: 24)

 

작가가 조시마 장로의 입을 빌어 풀어주는 구약의 욥기도 비슷한 전언을 담고 있다. 실상 도스토예프스키가 주목하는 것은 욥의 신실함과 의로움이라기보다는 신의 시험이 종결된 이후 욥이 보이는 반응이다. 성경 속의 욥과 달리 <카라마조프> 속의 욥은 심히 고뇌하며 반문한다. 예전의 아들딸들을 영원토록 잃어버린 상황에서 과연 새 아들딸들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그래도 될까, 하고. 이에 대해 작가는 해묵은 슬픔을 대체할 온화한 기쁨에 대해, 삶의 위대한 비밀에 대해 얘기한다. 음울한 과거를 잊고 이 순간의 삶을 즐기며 밝은 미래를 꿈꿀 것.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생각한 진정한 구원과 부활의 실체이다. 이제 작품의 맨 앞으로 돌아가자.

 

(도..키의 두 번째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작가보다 스물 네 살이 어렸습니다. 미인은 아니지만, 심지어 러시아 여자치고는 좀 빠지는 얼굴이지만, 야무지고 당차 보이죠? ^^)

 

도스토예프스키는 환갑을 코앞에 두고 완성한 대작 <카라마조프>를 아내에게 헌정했다. 실제로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첫 부인과 사별한 25세 연상의 남자 곁에 머물며 14년 동안 알뜰한 살림꾼이자 뛰어난 조력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른바 가정의 행복을 누리며 도스토예프스키는 <작가 일기>의 다음호를 준비하고 <카라마조프>2부를 구상했다. 건강이 악화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아직 죽을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역시나 그럼에도 죽음은 그 나름의 원칙대로 그를 찾아왔고, 그는 폐동맥 파열로 이듬해 1월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딸 류보비는 열두 살, 아들 표도르는 열 살이었다.

 

(그녀가 남긴 회고록은 도..키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소설가의 아내가 되지 않았다면 수필가(^^;)가 되었을 법한 평이하고 균형 감각 있는 문체가 돋보입니다.) 

 

<카라마조프>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여우같은 아내, ‘토끼같은 두 아이와 더불어 인생의 절정을 구가하며 쓴 소설이다. 그 무렵 간질병 발작으로 사망한 막내아들 알료샤에 대한 피 끓는 애도의 감정도 자연스레 작품 속에 스며들었다. ,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를 잠시 떠올려 보자. 임종의 침상에서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그가 가장 애달파 한 것은 물론, 두 아이와의 영원한 이별이었을 것이다. <카라마조프>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곧 그의 아이들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백록이자 그의 아이들, 그들이 살아갈 미래의 세계 앞에 바치는 유언서이다.

(-- 끝)

 

안나, 딸 류보비, 아들 표도르입니다. 놀랍게도(^^;), 처음 보는 사진입니다. 류보비는 훗날 (삼류) 작가가 되는데, 편파적이기로 유명한(특히 도..키의 첫 부인에 대한 '모함') 회고록을 남깁니다. 간질병은 유전이 돼도 천재성은 유전이 안 되나 봅니다...-_-;; 톨스토이 집안에서는 계속 나름대로 걸출한 인물들이 나오는데(그래서 인물 사전에서 '톨스토이' 항목은 항상 긴데) 도...키 집안은 앞뒤로 다  그 도..키 밖에 없으니...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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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11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만큼 '인간의 본성'을 속속들이 저 밑바닥 끝까지 파고 내려가는 작품도 드물지 싶어요. '음울한 과거를 잊고 이 순간의 삶을 즐기며 밝은 미래를 꿈꿀 것.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생각한 진정한 구원과 부활의 실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작가의 가족을 둘러싼 흥미로운 얘기도 잘 들었습니다. 늙은 작가에겐 '아이들'만이 희망이겠죠.
* * *
지나가는 바람이 일으킨 먼지의 소용돌이처럼 생명체들은 생명의 커다란 숨결에 매달려 회전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며 부동성을 너무도 잘 가장하여 우리는 그것들을 과정이라기보다는 사물로 취급한다. 우리는 그것들의 형태의 항구성조차도 한 운동의 윤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는 생명체들을 실어 나르는 보이지 않는 숨결은 희미한 출현 속에서 우리 눈에 구체화되기도 한다. 우리는 특정한 형태의 모성애 앞에서 이러한 갑작스런 광명을 접하게 되는데, 모성애는 대부분의 동물들에서 너무나 현저하고 감동적이며 종자를 염려하는 식물에서까지도 관찰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랑에서 생명의 신비를 보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마 우리에게 생명의 비밀을 건네줄지도 모른다. 그것은 각 세대가 자신을 뒤따르는 다음 세대에 기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생명체가 무엇보다도 경과의 장소이며 생명의 본질은 그것을 전달하는 운동 속에 있다는 사실을 엿보게 될 것이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中에서

푸른괭이 2013-01-11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만이 희망인 건 '젊은' 작가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이반은 양심이 켕기는 것을 느낀다. 나를 낳아준 아비마저 죽일 수 있는 자유에 맞서, 행동이 아닌 욕망까지도 관장하려는 양심의 자유가 고개를 들이민다. 그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 결과 범인이 드미트리라는 억지스러운 확신을 얻는다. 그럼에도 희뿌연 자책은 계속되고 그는 구태여 세 번씩이나 스메르쟈코프를 찾아간다.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순간, 양심의 자유에 따라 모종의 윤리적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다.

 

, 늦은 시각이지만 당장 예심판사나 관련자를 찾아가 증거물을 내놓고 스메르쟈코프와 자신을 동시에 고발하는 것. 하지만 왠지 그는 그 일을 내일로 미룬다. 왜 이런 유예가 필요했을까. 중요한 것은 스메르쟈코프가 곧 자살할 것임을 예감, 어쩌면 기대했다는 점이다. 그날 밤, 바깥에서 누가 창틀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서 분신-악마가 말하지 않는가. “저건 자네 동생 알료샤가 아주 뜻밖의 흥미진진한 소식을 갖고 온 걸세, 내 장담하지!”(3, 298)라고.

 

이튿날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의 호언장담과 자살에 대들기라도 하듯 기어코 법정에 나간다. 하지만 문제의 3천루블까지 내놓아도 아무도 그의 진술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 이반이 감내한 수치를 과연 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반의 내 안의 법정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전날 밤 즉시 자수하지 못한 죄, 즉 유예와 비겁함의 죄까지 떠맡아 완전히 광기의 늪에 빠진다. 이반의 고뇌는 그가 향유한 자유의 용량에 비례한다. 그가 위대한 죄인인 것은 엄밀히 말해 죄의 크기가 아니라 자유와 양심의 크기의 따른 것이다. 죄 자체보다는 죄의식이 이반을 윤리와 도덕의 극점으로 이끄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세기 작가 중 도...키, 아니, 어쩌면 도...키 주인공들의 냄새를 가장 많이 풍기는 작가는 카뮈가 아닐까 합니다. <반항하는 인간>에는 이반, 키릴로프 등에 대한 얘기도 꽤 많이 나왔던 것 같은데요. 비교적 최근에 다시 읽은 <전락>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이반이 쓴 것 같은 (얄궂은 ㅎㅎ) 느낌을 주더라고요.) 

 

5. 모순을 어찌할 것인가 - 화해

 

대체로 <카라마조프>는 서로 모순되는 원칙의 대립 위에 구축되었다. 가령, 알료샤 vs. 이반, ‘’(그리스도) vs. 대심문관(적그리스도), vs. 악마. 물론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길 잃은 양의 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좀 더 온건한 표현으론 화해이다. 이 임무를 맡은 알료샤는 신성의 육화 같은 존재, 혹은 소설 속에 강림한 그리스도이다. 다시 대심문관으로 돌아가자.

 

이반은 대심문관의 키스로 끝맺는다. ‘가 대심문관에게 건넨 화해의 몸짓이리라. , 대심문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을 심리적인 차원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원칙에 있어서의 양보는 있을 수 없다. 특히 용서라면 대심문관의 성격상 더욱더 불가능하다. 제 아무리 신-그리스도일지라도 상대방이 달가워하지도 않는 용서와 구원을 베풀 권리는 없다.입맞춤은 노인의 가슴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예전의 이념을 고수하는 거지.”(1, 554) 이반의 이 말은 그래서 비극적인 것이다.

 

한편, 대심문관의 바깥에서 이반과 알료샤는 대심문관과 의 관계를 반복하지만 그 강조점이 전혀 반대이다. 알료샤는 기나긴 이야기를 끝낸 형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춘다. 이반은 표절이라고 외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 이반 역시 동생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칙과 논리를 철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대심문과는 달리 화해의 몸짓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어찌 보면 여기에 화해의 전령으로서 알료샤가 갖는 의미가 들어 있는 셈이다.

 

(러시아 티브이 시리즈 물 <카라마조프>. 최근 것인데 아직 못 봤어요. 누가 누구인지는 보이는데, 이반을 저런 괴상한(??) 얼굴로...ㅠ.ㅠ 스메르쟈코프도 적어도 저 사진만으론 마음에 안 드네요. 좀 더 어두워보여야 하는데...)

 

실상 이반의 무신론에 맞서는 알료샤의 사상은 정확히 사상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그는 세계의 부조리와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세계와 타자는 또한 그에게 늘 구체적이다. 가령 이반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반면, 알료샤는 하루 24시간을 항상 발로 뛰어다니며 남을 돕는다. 물론 이 청년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조시마 장로가 사망하자 그 시신에서 방향이 아닌 썩는 냄새가 풍긴다. 그렇다면 그는 성자가 아니란 말인가?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알료샤는 이 기적에의 유혹을 극복해낸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죽은 사람의 몸에서 썩는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과 성스러움은 결코 서로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다. , 장로의 시신을 통해 기적이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장로의 위업이나 신의 전지전능함을 부정할 만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을 믿기 때문에 기적을 본다는 것.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알료샤가 꾸는 꿈(갈릴래아의 카나)을 보라. 그것은 깊은 믿음이 불러낸 기적의 표현으로서 이반의 악몽과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알료샤의 영성이 신의 존재를 보는 반면(epiphany) 이반의 이성은 그 분열적 성격 때문에 악마를 보는 것이다.

(아들 혹은 아들들이 아비를 죽이는 <카라마조프> 연극 공연(준비)과, 어린 아들을 잃은 아비의 감당할 길 없는 '깊은 슬픔'이  극적으로 섞여 있는 영화! 연극이 끝나자 아비는 자살합니다ㅠ.ㅠ )

 

<카라마조프>의 구성적 축이면서 동시에 감성의 영역을 대표하는 드미트리 역시 알료샤처럼 세계와 인간의 모순 앞에 경외감을 갖고 고개를 숙인다.

 

아름다움이란 정말! 덧붙여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어떤 사람이, 그것도 고귀한 마음과 드높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 마돈나의 이상에서 시작하여 소돔의 이상으로 끝을 맺는다는 거야. 더 끔찍한 것은 영혼 속에 이미 소돔의 이상을 품은 상태에서도 마돈나의 이상을 또한 부정하지 못하여, 그 때문에 죄악을 모르던 젊은 시절처럼 자신의 가슴을 진실로, 진실로 불태운다는 거지. 아니야, 인간이란 넓어, 너무도 넓어, 나는 차라리 축소시켰으면 싶어.”(1, 228.)

 

저 고백은 악마와 신이 싸우는데 그 전쟁터가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인 거지.”(1, 229)라는 말로 끝난다. 실제로 드미트리는 아비 살해의 누명을 씀으로써 온갖 모순을 감내해야 하는 크나큰 시련을 맞이한다. 그 전말을 간략히 보자.

 

그는 결백을 부르짖지만 즉흥적이고 다혈질적인 성격답게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만 되풀이한다. 그렇게 길고 고된 심문이 끝난 후 잠깐 잠이 들었다가 애기꿈을 꾼다. 아이들의 굶주림에 지독한 연민을 느낀 그는 고통과 죄에 있어서의 연대의식을 넘어서 윤리적 행동을 촉구한다. 심지어, 더 이상 죄 없는 아이들이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일이 없도록 그 자신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외친다. 간단히,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으나 못된(!) 생각을 품은 죗값을 달게 받아 옥살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가히 작가로부터 열광자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다운 발상이다. 하지만 이 착한 형을 알료샤는 다독인다. “형은 준비가 안 돼 있고, 또 그런 십자가는 형을 위한 것이 아니야.”(3, 528)라고. 실은 드미트리 쪽에서도 짓지도 않은 죄를 감당하는 것이 슬슬 두려워진 터이다. 간수의 하찮은 횡포도 참기 힘든데 유형생활을 어찌 견디랴!

(여러 <카라마조프> 영화 중 드미트리에게 가장 큰 비중이 실렸던 영화는 아무래도 이것! 율브리너가 드미트리 역을 맡았거든요ㅋ) 

 

결국, 드미트리는 알료샤와 이반의 독려를 받아 아메리카로 도주하는 쪽을 선택한다. 이는 어쩔 수 없이 이반의 비극적인 고뇌와 비교된다. 두 형제 모두에게 있어 죄는 욕망 차원의 문제이지만 이반과 달리 드미트리는 죄책감의 굴레를 가뿐히 벗어버린다. 그러나 그의 변덕은 웃긴 만큼이나 상식적이다. 이 대목에서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리얼리즘과 유머가 유달리 빛을 발한다. 온갖 형이상학적 고뇌와 수식어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이 삶-목숨이기 때문이다카라마조프적인 저열함의 힘!

 

 

(나름 감동 깊게 봤던 러시아 판 <카라마조프>. 드미트리-이반의 여자들, 그루셴카와 카체리나, 둘 다 캐스팅이 완벽했던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취향상 금발 미녀 보다는 짙은 머리색의 그루셴카 쪽이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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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 없는 유토피아 - 이반 카라마조프와 대심문관

 

도스토예프스키는 창작 노트에 이반을 무신론자라고 정의했다. 소설 속에 자주 나온 표현을 정리해보자. “인간의 마음속에서 불멸에 대한 믿음을 제거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반은 알료샤를 앞에 두고 반문한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왜 세계에 악이 존재할까? 인간이 신의 닮은꼴로 창조되었다면 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일까? 이 부조리함 속에 뭔가 대단히 고매한 목적이라도 있는 것일까? 설령 그럴 지라도 나의 유클리드적’, 3차원적 지성으론 이해할 수도 없으며 또 그러고 싶지도 않다, 라고 이반은 말한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테제가 나온다.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창조한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어린아이의 고통을 예로 들어가며 역설한다. 신이 의도한 조화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어린아이마저도 희생해야 한다면 그 비싼 입장료를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입장권을 양심에 따라 정중히 반납한다, 라고. 알료샤의 말대로 반역이다. 신에 대한 반역, 즉 이반의 무신론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 없는 유토피아건설이다. 대심문관을 보자.

 

 

 

 

 

 

 

 

 

 

 

에스파냐의 세빌리아, 종교재판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5세기말, ‘가 나타난다. 대심문관은 민중을 사로잡은 를 곧바로 체포한다. 이어 밤이 되자 남루한 수도복을 입은 대심문관이 감옥을 찾아온다. 대심문관의 기나긴 고백의 내용은 실상, 복음서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유혹을 다시 풀어쓰는 것이다. 악마가 황야에서 수행 중인 그리스도에게 세 가지 제안을 연거푸 내놓는다. 돌을 빵으로 바꿔라, 절벽에서 뛰어내려라, 내 앞에 경배하라 등. 대심문관은 그것을 각각 기적과 신비와 권위에의 유혹으로 풀이한다. 어떻든 그리스도가 당당히 물리쳤던 저 유혹을 대심문관은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대심문관> 공연 장면 중. 연극을 안 봤으나, 일인극으로 연출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는 아무래도 대심문관의 '판타지'일 수 있으니까요.)

 

대심문관의 논리의 핵심은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빵과 자유의 역학 관계에 있다. 인간이란 본디 그리스도의 믿음과는 달리 너무도 나약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자유라는 짐을 덜어주고 빵을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 라는 것. 대심문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을 받아들였다면, 너는 개개의 인간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총체적이고 영구적인 우수에 대한 해답을 함께 줄 수 있었을 것이니 그건 다름 아니라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하지만 인간이 찾는 그 대상이란()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일시에 만장일치로 그 앞에 함께 경배할 수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이는 이 가련한 피조물들은 나나 다른 사람이 경배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고 그 앞에 경배할 수 있는, 반드시 모든 사람이 함께경배할 수 있는 그런 존재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기 때문이지. , 바로, 경배를 하긴 하되 공동으로해야 한다는 요구야말로 인간 개개인이 개별적으로건 인류 전체로건 태초부터 골머리를 앓아온 주된 문제인 것이다.(1535쪽.)

 

이것이 신 없이 건설된 유토피아의 실체이다. 여기서 우리가 파시즘과 나치즘의 전조를 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제 역사 속의 대심문관이 많은 경우 세속적 권력에 눈이 먼, 극도로 부패한 가톨릭 위정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반의 대심문관은 극히 예외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또 저 선택받은 자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그리스도처럼 황야에서 풀뿌리와 메뚜기로 연명하며 수도 생활을 했다. 그랬던 그가 신이 아닌 악마의 원칙을 받아들여 유토피아 혹은 반()유토피아를 만든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무덤 뒤엔 아무 것도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글라주노프가 그린 대심문관과 '그'. 이 양반의 삽화들을 많이 좋아하진 않지만, 대심문관이 무척 처량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신도, 불멸도, 저 세계도 없다면 결국 양떼(우매한 중생)에게 필요한 것은 지상의 양식인 빵과 우상(경배의 대상) 밖에 없다. 이 도저한 허무주의가 인간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경멸의 복합작용에서 비롯됐다니,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데 그의 유토피아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그림자 신)을 기치를 내걸고 있다. 그는 민중의 행복을 위해 오직 자기 혼자만 이 거대한 기만의 고통을 감수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 역시 대심문관의 오만한 선민의식을 보여주는 셈이다. 어떻든 이반의 이론적 극단인 이 분신은 일종의 악마이되 매혹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한다. 인간의 본성과 맹점, 정치와 종교의 본질을 대심문관만큼 날카롭게 꿰뚫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반의 무신론이 실제 현실에서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4. 과연 모든 것이 허용되는가? - 아비를 죽일 수도 있는 자유

 

작가는 이반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도발적인 사상과 함께 무한한 자유를 선사했다. 다소 과격하게 말해, 나를 낳아준 아비를 죽일 수도 있는 자유, 바로 그것이다. 이론의 극단에서 신을 죽이고 신 없이 자기만의 왕국을 만든 이반이지만, 정작 아비가 살해되자 당황한다. 문제의 3천 루블을 내놓으며 스메르쟈코프는 반쯤은 씁쓸하게, 반쯤은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하인이자 제자이며 분신인 스메르쟈코프가 주인이자 스승이자 원상인 이반을 압도하는 섬뜩한 순간이다.

 

그때만 해도 도련님은 줄곧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자기 입으로 말씀하시더니, 이제 와선 왜 그렇게 불안에 떨고 계신 거죠, 정작 도련님 자신이 말입죠?”(3, 259)

 

이반이 무신론적 원칙하에 품었던 기대의 권리란 무엇인가. 실상 법률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에게 어떤 죄를 묻기는 상당히 힘들다. 구태여 지적하자면 부작위의 죄 혹은 미필적 고의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반 스스로 세운 내 안의 법정의 논리는 전혀 다르다. 이런 식이다. 형과 아버지 사이에 모종의 비극이 생길 것임을 예감하고 심지어 그러길 기대했다(“한 마리의 독사가 다른 한 마리의 독사를 잡아먹을 거야, 두 놈 다 그 길 밖에 없어!” 1, 296). 그 기대에 스메르쟈코프가 은근슬쩍 개입했음을 알면서도 적극적인 수단을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책임하게 집을 떠나버렸다. 말하자면 이반은 자신의 욕망과 욕망할 수 있는 자유 때문에 죄인이 된다.

(계속...)

 

-- 이반-대심문관(나아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델은 그리스도였던 셈인데요, 애초 <카라마조프...> 표지로 쓰고 싶었던 이미지입니다. 크람스코이의 <황야의 그리스도>! 진짜 먹을 거라곤 풀뿌리와 메뚜기뿐일 듯, 그나마도 거의 없을 듯합니다...ㅠ.ㅠ '빵' 유혹 거절하기가 진짜 힘들었을 듯...ㅠ.ㅠ  

 

 

 --  이 그림의 20세기(21세기?)판처럼 보이는 현대 작가(코스니체프)의 <수도사>. 울룩불룩한 손과 빨간 책, 즉 성경이 잘린 채로 <죄와 벌> 표지가 됐죠? ㅎㅎ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1:1 가르마, 수세미 같은 머리결 때문에 좀 반대했었는데요 ㅋㅋ 라스콜니코프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측면이 물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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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05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탐구가 이 소설의 전편을 흐르는 가장 강력한 주제라는 점에서도 이 책이 불멸의 고전이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을 믿지 않는 과학자'가 쓴 어느 책에서도 '신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혜안'에 놀라워 하더군요. 그 책의 주제가 하필이면 '신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하다'였기 때문에 까라마조프 형제들이 자연스레 등장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 * *
수감중인 드미트리 카라마조프가 그를 방문했던 학자에게서 방금 배운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누가 그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략)
알료샤, 이 과학이란 건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내가 이해하기로는 새로운 인간의 출현일세. ...... 하지만 슬프게도 신을 잃게 되지 않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혜안은 정말 놀랍다. 1880년은 신경 기능의 기초만이 밝혀진 때여서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경험이 떨리는 신경 꼬리에서 발생한다고 믿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뇌의 정보 처리 활동이 마음의 원인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그것이 바로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경우든 간에 정신 활동의 모든 양상이 뇌 조직 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사건들에 전적으로 좌우된다는 증거는 압도적으로 분명하다.(88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신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화를 보면 이 러시아의 대문호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 십분 만족되는 듯싶다. 넓은 이마와 움푹 꺼진 퀭한 두 눈은 곧 광활하고도 깊은 러시아의 영혼을 상징하는 것 같다. 서양인답지 않게 툭 불거진 광대뼈 역시 어딘가 독특한 느낌을 준다. 고동색의 무성한 턱수염 속에서는 이성의 광기와 영성의 은총이 영원토록 사투를 벌이는 것 같다. 끝으로, 어딘가 비스듬히 아래쪽을 향한 저 시선의 끝은 어디일까? 그의 소설을 들추는 수밖에 없다. 우선 전기를 간략히 보자.

 

(바실리 페로프, <도..키>

 

소설가로서의 무게에 비하면 생활인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래저래 문제가 많았다. 그는 가난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를 졸업했다전공에 따라 공무원(무관)이 되었으나 이내 싫증을 냈다. 결국 전업 작가의 길을 택했고 그 순간 가난은 그의 실존이 되었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면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된 셈이다. 뿐더러 간질병이 평생 그를 쫓아다녔다. 도박벽 역시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의 문학 속에서 승화작용을 거친다. 그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과 그들로 인해 고뇌하는 인텔리겐치아에 관한 소설이다. 그 고통이 너무도 크기에 그들은 간질발작이나 도박의 절정과 같은 찰나적인 황홀경을 꿈꾼다. 그들의 목표는 늘 유토피아 건설이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십대 때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을 드나들며 푸리에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의 서적을 읽고 새로운 사회 체제의 가능성을 논하곤 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의 애초 각본에 따라 사형 집행 당일 총이 발사되기 직전, ‘사형극이 극적으로 중단된다.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8년간 유형살이를 한다. 다시 문단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극단적 보수주의자에 슬라브주의자가 돼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좌익이나 우익이냐, 무신론자냐 광신도냐, 가 아니다. 삶이라는 것이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관념보다 소중하다는 것. 바로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목숨을 대가로 얻어낸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다. 그의 마지막 소설이자 최고 소설로 손꼽히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하 <카라마조프>) 역시 궁극적으론 삶에 바치는 찬가라고 할 수 있겠다.

 

2. 아비를 죽이다 - 친부살해의 테마

 

19세기 후반 스코토프리고니예프스크 시().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지주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세 아들을 얻었다. 첫 부인 소생의 드미트리(28)는 퇴역 중위인데, 난폭한 면이 있으나 타고나길 마음씨가 착하다. 두 번째 부인이 낳은 이반(24)은 이지적이지만 자기중심적인 자연과학도이다. 역시나 두 번째 부인 소생인 알료샤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얌전한 청년으로서 어머니의 광신에 가까운 신심을 물려받아 수도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밖에, 암암리에 표도르의 자식으로 통하는 스메르쟈코프가 있는데, 하인 겸 요리사 노릇을 하고 있다. 그를 빼면 모든 아들이 아비에게 버림받고 타인의 품을 전전하며 자라났다. 한데 세 아들이 갑자기 아비의 집을 찾아온다. 대체 왜? <카라마조프>는 여기서 시작된다.

 

 

 

 

 

 

 

 

 

 

 

 

 

 

 

 

일단 문제는 이다. 드미트리는 오래 전에 고인이 된 어머니가 자기 앞으로 남긴 유산을 받아내고자 한다. 물론 표도르가 돈을 내줄 리 없다. 그 와중에 드미트리는 표도르가 오랫동안 눈독을 들인, 그의 사업 파트너이기도 한 그루셴카에게 반하고 만다. 그뿐이 아니다. 겉보기엔 제법 점잖은 이반이 드미트리의 약혼녀인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사랑한다. 결국, 아비와 아들이 돈과 여자 때문에 다투고 배다른 두 형제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기괴한 신경전을 벌이는 형국이 된다.

 

 

 

 

 

 

 

 

 

 

 

 

 

 

 

 

이렇듯 <카라마조프>는 그 상상력의 측면에서 거의 신화에 가깝다. 아들이 아비를 살해하고 아비의 여자를 탐한다, 라니. 그 거칠고 적나라한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시쳇말로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질투에 사로잡힌 아들이 아비의 집에 쳐들어와 아비의 얼굴을 문자 그대로 짓밟고 쌍욕을 퍼붓는 장면을 보라. 이 소설이 두툼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빨리 읽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 오이디푸스 신화 자체의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측면과 작가의 직설적인 화법. 물론 추리 소설적인 장치(“누가 표도르를 죽였는가?”)도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소설적 흥미의 저변에 깔린 것은 죄와 벌, 자유와 양심, 신의 존재와 그 가치 등 대단히 철학적인 물음이다.

 

특히 <카라마조프>에서 친부살해는 일차적 의미의 범죄(아비를 죽이다)를 넘어 정치적 혁명(-차르를 죽이다), 나아가 형이상학적 반항과 무신론(신을 죽이다)을 아우른다. 실제로 이 소설이 쓰일 무렵 무신론과 허무주의를 표방한 급진파 쪽에서 각종 테러가 일어났고 황제(알렉산드르 2) 시해 시도도 있었다. <카라마조프>는 이런 현상에 대한 극우파 작가의 우려와 불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젊은 날 새로운 유토피아 건설에 목말라 했으며 그로 인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이 소설의 주인공들의 정신적 편력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단순한 찬반’(Pro et Contra)에 그칠 리는 없지 않겠는가. (계속~)

 

-- <신동아>

 

 

 

고전을 영화화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백치>. 므이시킨의  전기에 작가 도..키의 사형 직전의 체험을 은근슬쩍 집어넣었죠. 소개 없이도 누가 누구인지 보이죠? 로고진 -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 - 므이시킨 - 아글라야, 입니다. 물론, '번안' 영화라 일본 이름이었지만 -_-;; 

로고진 역은 물론(!) 미후네 토시로, 그리고 나스타시야 역에 참 잘 어울렸던 하라 세츠코입니다. 주로 구로사와 아키라보다는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많이 나오긴 하는데요... 정윤희처럼, 감격스러운 미모입니다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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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02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에서 새로 나온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직접 번역하신 분이 바로 푸른괭이님이시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졸업후 대학 입학하기 전까지 '두세달의 추운 겨울' 동안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 바로 <까라마조프 형제들>이었답니다. 대략 32년쯤 전에 읽었었지만 아직도 소설 속 장면들이 눈에 선하네요. 나중에 언젠가 이 작품을 다시 읽게 된다면 그때는 꼭 푸른괭이님의 번역본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오래 전에 제가 남겨뒀던 기록도 덧붙여봅니다.
* * *





푸른괭이 2013-01-03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다시 읽어보시면 감회가 새로울 겁니다^^; 라끼찐에 대한 인상이 강하셨나 봐요? "경박한 재줏꾼"이라는 말도 딱 맞는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