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 없는 유토피아 - 이반 카라마조프와 대심문관

 

도스토예프스키는 창작 노트에 이반을 무신론자라고 정의했다. 소설 속에 자주 나온 표현을 정리해보자. “인간의 마음속에서 불멸에 대한 믿음을 제거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반은 알료샤를 앞에 두고 반문한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왜 세계에 악이 존재할까? 인간이 신의 닮은꼴로 창조되었다면 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일까? 이 부조리함 속에 뭔가 대단히 고매한 목적이라도 있는 것일까? 설령 그럴 지라도 나의 유클리드적’, 3차원적 지성으론 이해할 수도 없으며 또 그러고 싶지도 않다, 라고 이반은 말한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테제가 나온다.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창조한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어린아이의 고통을 예로 들어가며 역설한다. 신이 의도한 조화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어린아이마저도 희생해야 한다면 그 비싼 입장료를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입장권을 양심에 따라 정중히 반납한다, 라고. 알료샤의 말대로 반역이다. 신에 대한 반역, 즉 이반의 무신론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 없는 유토피아건설이다. 대심문관을 보자.

 

 

 

 

 

 

 

 

 

 

 

에스파냐의 세빌리아, 종교재판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5세기말, ‘가 나타난다. 대심문관은 민중을 사로잡은 를 곧바로 체포한다. 이어 밤이 되자 남루한 수도복을 입은 대심문관이 감옥을 찾아온다. 대심문관의 기나긴 고백의 내용은 실상, 복음서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유혹을 다시 풀어쓰는 것이다. 악마가 황야에서 수행 중인 그리스도에게 세 가지 제안을 연거푸 내놓는다. 돌을 빵으로 바꿔라, 절벽에서 뛰어내려라, 내 앞에 경배하라 등. 대심문관은 그것을 각각 기적과 신비와 권위에의 유혹으로 풀이한다. 어떻든 그리스도가 당당히 물리쳤던 저 유혹을 대심문관은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대심문관> 공연 장면 중. 연극을 안 봤으나, 일인극으로 연출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는 아무래도 대심문관의 '판타지'일 수 있으니까요.)

 

대심문관의 논리의 핵심은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빵과 자유의 역학 관계에 있다. 인간이란 본디 그리스도의 믿음과는 달리 너무도 나약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자유라는 짐을 덜어주고 빵을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 라는 것. 대심문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을 받아들였다면, 너는 개개의 인간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총체적이고 영구적인 우수에 대한 해답을 함께 줄 수 있었을 것이니 그건 다름 아니라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하지만 인간이 찾는 그 대상이란()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일시에 만장일치로 그 앞에 함께 경배할 수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이는 이 가련한 피조물들은 나나 다른 사람이 경배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고 그 앞에 경배할 수 있는, 반드시 모든 사람이 함께경배할 수 있는 그런 존재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기 때문이지. , 바로, 경배를 하긴 하되 공동으로해야 한다는 요구야말로 인간 개개인이 개별적으로건 인류 전체로건 태초부터 골머리를 앓아온 주된 문제인 것이다.(1535쪽.)

 

이것이 신 없이 건설된 유토피아의 실체이다. 여기서 우리가 파시즘과 나치즘의 전조를 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제 역사 속의 대심문관이 많은 경우 세속적 권력에 눈이 먼, 극도로 부패한 가톨릭 위정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반의 대심문관은 극히 예외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또 저 선택받은 자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그리스도처럼 황야에서 풀뿌리와 메뚜기로 연명하며 수도 생활을 했다. 그랬던 그가 신이 아닌 악마의 원칙을 받아들여 유토피아 혹은 반()유토피아를 만든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무덤 뒤엔 아무 것도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글라주노프가 그린 대심문관과 '그'. 이 양반의 삽화들을 많이 좋아하진 않지만, 대심문관이 무척 처량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신도, 불멸도, 저 세계도 없다면 결국 양떼(우매한 중생)에게 필요한 것은 지상의 양식인 빵과 우상(경배의 대상) 밖에 없다. 이 도저한 허무주의가 인간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경멸의 복합작용에서 비롯됐다니,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데 그의 유토피아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그림자 신)을 기치를 내걸고 있다. 그는 민중의 행복을 위해 오직 자기 혼자만 이 거대한 기만의 고통을 감수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 역시 대심문관의 오만한 선민의식을 보여주는 셈이다. 어떻든 이반의 이론적 극단인 이 분신은 일종의 악마이되 매혹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한다. 인간의 본성과 맹점, 정치와 종교의 본질을 대심문관만큼 날카롭게 꿰뚫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반의 무신론이 실제 현실에서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4. 과연 모든 것이 허용되는가? - 아비를 죽일 수도 있는 자유

 

작가는 이반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도발적인 사상과 함께 무한한 자유를 선사했다. 다소 과격하게 말해, 나를 낳아준 아비를 죽일 수도 있는 자유, 바로 그것이다. 이론의 극단에서 신을 죽이고 신 없이 자기만의 왕국을 만든 이반이지만, 정작 아비가 살해되자 당황한다. 문제의 3천 루블을 내놓으며 스메르쟈코프는 반쯤은 씁쓸하게, 반쯤은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하인이자 제자이며 분신인 스메르쟈코프가 주인이자 스승이자 원상인 이반을 압도하는 섬뜩한 순간이다.

 

그때만 해도 도련님은 줄곧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자기 입으로 말씀하시더니, 이제 와선 왜 그렇게 불안에 떨고 계신 거죠, 정작 도련님 자신이 말입죠?”(3, 259)

 

이반이 무신론적 원칙하에 품었던 기대의 권리란 무엇인가. 실상 법률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에게 어떤 죄를 묻기는 상당히 힘들다. 구태여 지적하자면 부작위의 죄 혹은 미필적 고의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반 스스로 세운 내 안의 법정의 논리는 전혀 다르다. 이런 식이다. 형과 아버지 사이에 모종의 비극이 생길 것임을 예감하고 심지어 그러길 기대했다(“한 마리의 독사가 다른 한 마리의 독사를 잡아먹을 거야, 두 놈 다 그 길 밖에 없어!” 1, 296). 그 기대에 스메르쟈코프가 은근슬쩍 개입했음을 알면서도 적극적인 수단을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책임하게 집을 떠나버렸다. 말하자면 이반은 자신의 욕망과 욕망할 수 있는 자유 때문에 죄인이 된다.

(계속...)

 

-- 이반-대심문관(나아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델은 그리스도였던 셈인데요, 애초 <카라마조프...> 표지로 쓰고 싶었던 이미지입니다. 크람스코이의 <황야의 그리스도>! 진짜 먹을 거라곤 풀뿌리와 메뚜기뿐일 듯, 그나마도 거의 없을 듯합니다...ㅠ.ㅠ '빵' 유혹 거절하기가 진짜 힘들었을 듯...ㅠ.ㅠ  

 

 

 --  이 그림의 20세기(21세기?)판처럼 보이는 현대 작가(코스니체프)의 <수도사>. 울룩불룩한 손과 빨간 책, 즉 성경이 잘린 채로 <죄와 벌> 표지가 됐죠? ㅎㅎ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1:1 가르마, 수세미 같은 머리결 때문에 좀 반대했었는데요 ㅋㅋ 라스콜니코프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측면이 물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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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05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탐구가 이 소설의 전편을 흐르는 가장 강력한 주제라는 점에서도 이 책이 불멸의 고전이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을 믿지 않는 과학자'가 쓴 어느 책에서도 '신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혜안'에 놀라워 하더군요. 그 책의 주제가 하필이면 '신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하다'였기 때문에 까라마조프 형제들이 자연스레 등장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 * *
수감중인 드미트리 카라마조프가 그를 방문했던 학자에게서 방금 배운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누가 그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략)
알료샤, 이 과학이란 건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내가 이해하기로는 새로운 인간의 출현일세. ...... 하지만 슬프게도 신을 잃게 되지 않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혜안은 정말 놀랍다. 1880년은 신경 기능의 기초만이 밝혀진 때여서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경험이 떨리는 신경 꼬리에서 발생한다고 믿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뇌의 정보 처리 활동이 마음의 원인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그것이 바로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경우든 간에 정신 활동의 모든 양상이 뇌 조직 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사건들에 전적으로 좌우된다는 증거는 압도적으로 분명하다.(88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