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낭만주의자가 쓴 성장소설의 경전:

헤르만 헤세(1877-1962), <데미안>(1919)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 특히 <데미안>은 많은 독자들의 기억 속에 청춘의 책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이토록 젊은소설을 쓸 때 작가가 이미 불혹의 나이를 넘겼다는 사실이 오히려 새삼스럽다. 실제로 이 얄따란 소설의 기저에는 독일 문학 특유의 교양소설(성장소설)과 관념소설의 전통, 아직 환멸과 분열을 모르는 몽상적이고 이상적인 낭만주의, 그리고 관록이 쌓인 작가의 문학적 성찰이 깔려 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싱클레어는 일종의 서문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9)이라고 말한다. 과연 시적인 소제목이 붙은 여덟 개의 장()의 자아 찾기와 자아 완성의 과정을 다루는데, 그 출발점은 두 세계’, 정확히 그것에 대한 인식이다. 사랑과 행복이 가득 한 가족, 모범과 규율에 지배되는 학교로 대변되는 밝은 세계와 나란히, 혹은 바로 그 세계 안에 어두운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중략) 너처럼 부자 아버지가 없단 말이야.”(20)라는 계급의식에 사로잡혀 싱클레어를 괴롭히는 프란츠 크로머는 후자의 상징이다.

 

한편,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싱클레어 앞에 나타난 유복한 미망인의 아들 막스 데미안은 지덕체의 구현 같다. 또래들보다 지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우월한 그의 가르침을 통해 싱클레어는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된다. 지금껏 밝고 깨끗한 세계에서 살아온 일종의 아벨이었던 그가 카인의 표적(표식)’, 말하자면 카인의 후예쪽으로 한 발짝 다가서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처형당한 두 도둑 중 무덤을 코앞에 두고서 회개한 징징거리는 개종자”(82)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은 도둑이야말로 진짜 사나이라는 데미안의 얘기에도 감화된다. 말뿐만이 아니다. “그의 주위를 둘러싼 이 고요한 공허, 이 정기(精氣)와 별들의 공간, 이 고독한 죽음!”(89) 싱클레어가 포착한 데미안은 두 세계의 모순을 초월한 아파테이아의 화신이자 동양적 해탈의 경지에 오른 싯다르타이다.

 

 

 

 

 

 

 

 

 

 

 

 

 

 

 

 

몇몇 친구와의 만남, ‘베아트리체를 향한 관념적인 사랑, 오르간 연주자(피스토리우스)와의 영적인 교류 등 싱클레어의 성장과 구도(求道)는 계속된다. 그가 그린 거대한 노란색 매의 그림, 그에 대한 데미안의 답장이 유명하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123)

 

 

 

 

 

 

 

 

 

 

 

 

 

 

 

압락사스(Abraxas: 아프락사스, 아브락사스)는 기독교의 한 분파 혹은 한 원류인 영지주의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스티븐 횔러, <이것이 영지주의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전통이 강한 서구 지성사에 이토록 신비적이고 비의적인 전통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당연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이교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 독특한 신은 빛과 어둠, 신과 악마, 선과 악은 물론 남과 여, 인간과 동물 등 서로 모순되는 두 세계를 자웅동체처럼 한 몸으로 구현해낸다. 다시 싱클레어 앞에 나타난 데미안, 그리고 장신에 거의 남자 같은 여자의 모습을 한 그의 어머니(에바 부인)는 압락사스의 현현이기도 하다. 그들이 다양한 구도자들과 함께 하는 모임은 밀교적인 카발라를 연상시킨다.

 

 

(젊은 헤세.)

 

 

이런 상황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데미안과 싱클레어 모두 참전한다.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된 것 같았다. 그들은 조국과 명예를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운명이었다.”(217) 이 전쟁에서 싱클레어가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는 식의 결말에 불편함을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백년 가까이 성장소설과 구도소설의 경전으로 숭상되어온 이유는 무엇인가.

 

토마스 만은 <데미안>을 독일 민족과 독일 문학의 운명 속에서 이해하면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연장선상에 놓았는데, 그 와중에 이 동년배 작가의 초상화도 그려주었다. “나는 (중략) 그의 명랑하고 사려 깊은, 선량하면서도 악동 같은 특성을, 유감스럽게도 병든 눈의 깊고도 아름다운 눈길을 사랑한다.”(토마스 만, <데미안> 영문판 서문.) 이런 이미지는 1964년 이 소설을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한 전혜린의 글에서도 엿보인다. 헤세가 직접 그린 수채화를 두고서 그녀는 흰 구름헤세의 생활이나 사랑의 방랑의 상징이고 나무구도자 헤세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썼다.(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니체의 아포리즘(싱클레어는 니체를 탐독한다)과 은은한 수채화 위에 쓰인 서정시의 종합에 동양적 종교철학까지 가미한 에밀 싱클레어의 청춘 이야기는 어쨌거나, ‘질풍노도의 한가운데서 제각기 불안과 떨림의 병을 앓으며 데미안-압락사스를 갈구하던 우리 청춘의 기록이기도 하다.

 

-- <책&>

 

 

 

(헤세가 그린 수채화.)

 

 

-- 헤세 없이 우리의 성장이 가능했을까, 라는 물음. 결코 과장이 아닐 법한데요, 오랜만에 <데미안>을 읽으면서 그 관념성과 구도성에 깜.놀.하고 '아프락사스'의 낯섦이 이제는 덜해진 것 같아 흐뭇(?)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늙었다는 소리겠군요. 헤세의 소설 중 제일 좋아한 것은 <지와 사랑>, 즉 <골드문트와 나르치스>였습니다. 확실히, 비교-대조(대구)를 좋아하나 봅니다 ㅎ ㅎ 한편, 그의 최고작이라 불리는 <유리알 유희>는 대학 기숙사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너무 어려웠던 것 같아요..-_-;; <황야의 이리>는 여전히 못 읽고 있네요..ㅠ.ㅠ

 

 

 

 

 

 

 

 

 

 

 

 

 

 

 

 

-- 카인이니 아벨이니, 예수니 그 옆의 도둑이니 하는 얘기를 읽으며 떠올린 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마땅한 이미지가 없네요 ㅠ.ㅠ -- 내가 읽은 판본의 표지는 샤갈의 그림이었는데요),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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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원형, 인간의 근원을 찾아서:

류드밀라 울리츠카야(1943-), <소네치카>(2012, 비채)

 

 

199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의 러시아와 마주한 ‘P세대’(펩시 세대)의 딜레마를 가장 잘 대변해준 이는 모스크바 출신의 삼십대 작가 빅토르 펠레빈이었다. 도시적인 감수성과 비의적인 분위기, 도발적이고도 지적인 문체, 현란한 문화 코드와 다양한 장르의 혼합 등 그는 새로움과 젊음의 대명사였다. 그 무렵, 우랄 지역 출신에 두 아이의 엄마이자 쉰 살을 목전에 둔 아줌마소네치카(1992)라는 촌스러운제목의 중편소설을 들고 문단에 나타난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1943-)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소네치카는 한마디로 여자의 일생이다. 소냐(소네치카)는 네프 시대에서 스탈린 독재로 이어지는 격동기에도 도스토옙스키의 불안한 심연투르게네프의 그림자 드리운 가로수”(10)에 빠져 사는 독서광이지만 어느 중년 화가(로베르트)와 결혼하면서 삶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책 속의 삶을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은 사라진 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변변치 않았던 것들, 예를 들어 직접 만든 쥐덫으로 쥐를 잡은 일”(22)이 중요해진다. “고상한 소녀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안주인이 된 그녀의 꿈은 수도관이 설비된 부엌, 딸이 혼자 쓰는 방, 남편의 공방이 딸린 사람이 살만한 평범한 집”(34-35)을 갖는 것이다. 노화의 폭탄을 맞은 그녀를 슬프게 하는 것도 아이를 더 많이 낳지 않으면 남편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35)는 생각이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일부러 젊었을 적 사진을 올려봅니다 ^^; 예쁘지요? 최근 사진 보면 너무 튼실(?)해보이는데, 인터뷰 동영상 보면 은근히 조심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1950년대 초, 중년의 소냐는 아이의 양말을 기우며 남편과 예술가 친구들의 고상한대화를 듣는 가정주부이다. 그런데 남자애들과 어울리는 데 싫증이 난 딸(타냐)이 작고도 요염한 고아 소녀(야샤)를 데려오면서 가족 구조가 재편된다. 집이 철거당할 절박한 순간에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소냐는 예외적이고 비범한 그이에게 젊고, 예쁘고, 부드럽고, 날씬한 아가씨가 생긴 것은 공평한(66)이라고 생각하고는 푸시킨의 소설을 꺼내 읽는다. 딸마저 페테르부르크로 떠나자 다시 문학이라는 마약”(71)에 손을 댄다. 반쪽짜리 남편이 죽은 다음 야샤를 챙기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그녀[야샤]는 고아였고, 소냐는 엄마였다.”(78) 그렇기에 남편을 포함하여(!) 모든 아이들이 떠난 이후 그녀의 삶은 오직 문학만이 희망이다.

 

 

 

 

 

 

 

 

 

 

 

 

 

 

소네치카는 짧은 분량임에도 고전적인 가족 서사의 충실한 복원으로 읽힌다. 물론 대러시아제국이 소비에트연방으로, ‘아버지와 아들어머니와 딸로 바뀐 것이 도드라지긴 한다. 소위 웰 메이드가족 서사의 대가인 톨스토이, 특히 소냐가 탐독한 <전쟁과 평화>의 경우 구성적 주인공은 여성(나타샤 로스토바)이지만 사상적 차원은 제각기 톨스토이의 분신인 남성들이 담당한다. 울리츠카야의 가족 서사는 모든 점에서 명실상부한 여인천하이다. 한 남자가 여자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자들이 다양한 역할(어머니, 아내, 애인, )을 맡아가며 한 남자를 공유한다. 자유와 욕망의 발칙한 화신인 마녀-타냐와 야샤, ‘자기낮춤을 통해 성성(聖性)을 획득하는 성녀-어머니소냐, 이들 모두 제각기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발레리 부토노프는 왠지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아요, 스포츠맨이라 몸은 탄탄한데  은근히 수도사 같은 이미지, 그리고 방탕 자체가 아니라 방탕의 관념에 탐닉하는 지하인의 이미지.)   

 

 

 

 

 

메데야와 그 피붙이들의 이야기인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에 이르면 그림이 더 또렷해진다. 이 시노플리 집안에서 제일 부각되는 것은 메데야(불모의 성녀)와 알렉산드라(다산의 마녀) 자매의 성화같은 대조이다. 메데야는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온 남편 사무일이 죽은 직후 그와 알렉산드라가 연인관계였으며 여동생의 딸(니카)이 자기 남편의 아이였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 예정되었던 남편의 저 아이를 여동생의 유쾌하고 가벼운 몸에 넣어주었던 운명”(308)에 대한 원망을 뒤로 하고 멋진 과부, 모두의 어머니로 거듭난다. 얽히고설키는 아이들의 이야기 중 니카와 그녀의 조카 마샤 사이를 오가며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음탕의 권태에 탐닉하는 강철 같은 몸에다 꽁지머리를 길러서 사제 같은”(274) 발레리 부토노프가 소설적 흥미를 더한다. 그의 연인이자 저명한 학자(알리크)의 아내인 마샤는 심각한 조울증 끝에 몇 편의 시를 남기고 자살한다.

 

 

 

 

 

 

 

(이참에 <메데이아>를 다시 읽었는데, 의외로(??) 가정드라마 - 미국 현대 희곡에서 자주 보는 - 같은 데가 있어서 놀랐어요.)

 

 

 

 

 

메데야-알렉산드라가 이 파란만장한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말하자면 그들이 아이를 잘 낳는 암컷”(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이기 때문이다. 이 순혈 그리스인 자매는 공히 성녀-마녀로서 인간의 근원이자 서사의 근원으로 거듭난다. 여기서, 에우리피데스가 절묘하게 포착한 바, 고뇌와 번민 끝에 두 아들을 죽이고 그로써 (그들이 크레온 집안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철저히 욕망에 충실했던 자신을 단죄함과 동시에 아버지-수컷에게 최고의 복수를 선사한 신화 속 메데이아가 묘한 음화로 되살아난다.

 

여성 중심의 가족 서사는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더 극적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더 질기게 살아남은 아흔 살의 무르, 어머니의 추한 음욕을 견뎌내는 예순 살의 안나(‘성녀’), 마흔 줄에 이른 안나의 딸 카챠, 끝으로 카챠의 아이들 등 총 4대가 만들어내는 풍속도는 스페이드 여왕보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현대판 미니어처에 가깝다.

 

 

 

 

 

 

 

 

 

 

울리츠카야는 붕괴와 해체의 시대에 통합에 대해 쓴 작가이다. 핏줄의 그물망을 축조함으로써 서사의 원형을 복원하고 하늘-우라노스’(아버지/아들)보다 앞서는 대지-가이아’(어머니)를 소설화하려는 시도는 우리말 번역에서도 잘 표현된 문체적 독특성과 은근한 지성주의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다. <박경리 문학상> 수상소감에서 그녀는 <김약국의 딸들>을 언급했는데, <토지>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면 마땅히 이 경이로운 대작 앞에 경의를 표했으리라 생각된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소설의 다음 장(), 다음 부()는 쓰일 수 없음을, 사람은 사람과 엮일 때 비로소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 <토지>이다. 새로운 문학은 일견 그것이 아무리 새로워보일지라도 어쨌거나 핏줄의 산물이고, 가족 서사는 여전히 모든 소설가의 로망이다. 러시아문학을 흠모하는 우리 독자에게 울리츠카야의 소설이 많은 호응을 얻기를, 무엇보다도, 다양한 문화 체험을 통해 우리 문학의 가계도에 더 많은 <토지>가 생겨나길 바란다.

 

-- <창비> 2013년 봄호.(편집 전 파일.) 

 

 

-- 분량 때문에 많이 못 썼는데, <토지> 얘기를 좀 더 하고 싶었답니다. 팔은 당연히 안으로 굽죠! ^^ 남의 나라 작가가 아무리 잘 쓴들, 우리 것이 좋죠 ㅎㅎ

대학 때 읽은 굵직한 대하소설(뭐, 못 읽은 것도 많지만 -_-;;) 중 제일 좋아했던 작품이 <토지>인데요, 다시 읽으면 어떨지 궁금합니다! 서희와 길상이, 상현이와 봉순이의 아들딸들 얘기도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은데...  대학원 시절 학회 때문에 원주 갔다가 먼 발치에서 본 기억도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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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정면에서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라.”

- 멜빌, <모비딕>(1851)

 

 

  <모비딕>이 자신의 다리를 빼앗아간 고래에게 복수를 하다가 파멸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래 뼈로 만든 의족에 몸을 의지한 채 두려움을 모르는 시선으로 앞만 바라보며 서 있는 노인, 신을 믿기는커녕 그 스스로 신이고자 하는 존재, ‘대학물까지 먹었으면서도 식인종과 어울린 적도 있는 거친 뱃사람. 에이해브 선장은 시종일관 신비스러운 존재로 그려지는데, 고래를 향한 집요한 복수심과 비장한 투지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스타벅의 눈에는 광기로, 불경스러운 반역으로 보인다. 근육질의 건강한 몸에 청교도적인 윤리와 합리적 실용주의를 겸비한 30세의 일등항해사는 당차게 말한다. “저는 고래를 잡으러왔지, 선장님의 원수를 갚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216) 복수 따위는 돈벌이도 되지 못하거니와 그저 맹목적인 본능으로 공격을 했을 뿐인 말 못 하는 짐승에게 원한을 품었다가는 천벌을 받으리라는 것.

 

 

 

 

 

 

 

 

 

(세상에 쉬운 번역이 없겠지만, <모비딕> 완역하신 분,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짐승에게서 에이해브는 가시적인 판지 가면로 가려진 뭔가 거대한 힘의 원천을 본다. “공격하려면 우선 그 가면을 뚫어야 해! 죄수가 감방 벽을 뚫지 못하면 어떻게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겠나? 내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벽일세.”(217) 개인적인 복수심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신 혹은 자연)을 향한 분노를 모조리 고래에게 쏟아 붓는 것이다. 어떻든 열여덟 살의 어느 아름다운 날 처음 고래를 잡은 이래 40년 동안을 바다의 고래와 더불어 살아온 노선장의 한탄은 교향곡처럼 깊고 묵직한 울림을 낸다. 그는 당장 진로를 바꾸어 돌아가자는 스타벅의 바람직한 충고를 따를 수 없다. 고래, 특히 모비딕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까닭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681) 그러고서 에이해브는 고답적인 비극의 주인공답게 고래와 함께 바다 깊숙이 침몰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하지만 이 비장한 운명극은 이 소설의 일부를 이룰 뿐이다 

(모비딕, 향유고래.)

 

<모비딕>은 원제(“Moby-Dick or, The Whale”)가 말해주듯 고래의 생김새와 생태와 종류, 고래를 잡고 해체하고 보관하고 활용하는 법, 고래 요리의 종류와 역사 등 정녕 고래학과 포경(捕鯨)에 관한 책이다. 모비딕은 고래 일반을 대표하는 짐승임과 동시에 <피쿼드> 호의 여느 선원들보다 더 또렷한 형상과 성격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몸집, 이마에는 주름이 잡혀 있고 등에는 하얀 혹이 피라미드처럼 높이 솟아 있는, 인간처럼 교활한 지성과 영원한 악의를 뽐내는 독특한 향유고래!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색깔이라기보다 눈에 보이는 색깔이 없는 상태인 동시에 모든 색깔이 응집된 상태”(246)와 같은 저 흰색이 압도적이다. 검푸른 바다를 뚫고 용트림하는 하얗고 거대한 힘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을 수 있을까.

 

(뱃사람처럼은 안 보이죠?ㅎㅎ)

 

한데 최후의 접전에서 살아남은 자는 비장함과도, 합리적 실용주의와도 무관한 인물이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31) 이렇게 운을 떼는 청년은 지갑도 거의 바닥나고 뭍에는 딱히 흥미로운 것도 없어 기분 전환 삼아 배를 타게 되었다. 하필 포경선이었던 것은 거대한 고래, 그 경이롭고 신비로운 괴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 출사표에 대해 때론 비장한 말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그의 어조는 대체로 덤덤하다. 자신이 속한 연극판과 자신의 역할에 대한 인식도 명징하다. “다른 사람들은 고상한 비극에서 당당한 역할을 맡거나 우아한 희극에서 짧고 쉬운 역할을 맡거나 익살극에서 유쾌한 광대 역할을 맡는데, ‘운명이라는 무대감독이 왜 나한테는 고래잡이 항해의 이 초라한 역할을 맡겼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나도 알 수 없다.”(36) 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것도 그렇다. 퀴퀘그의 관과 <레이첼> 호 덕분인데, 이런 흐름을 관장하는 메커니즘의 원리는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이슈메일 나름의 답은 이렇다. “인간들이여! 불을 정면에서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라.”(511)

 

 

 

 

 

 

 

 

 

 

 

 

 

 

 

 

포경선은 나의 예일 대학이며 하버드 대학”(158)이라는 이슈메일의 고백은 작가에게도 적용된다. 멜빌 문학의 자양분 중 하나는 포경선과 남태평양의 섬에서 쌓은 경험이다. 그 토대 위에서 형상화된 자연의 이면에는 물론 문명이 도사리고 있다(멜빌의 후기의 역작인 필경사 바틀비는 문명의 한가운데 놓인 인간의 본질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인종 박물관처럼 보이는, 총 서른 명의 선원을 실은 <피쿼드> 호는 19세기 중엽 미합중국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의 이름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나는 성경 텍스트가 이 작품의 보편성과 영구성을 부여해주기도 한다. 삼십대 초반의 작가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공들여 쓴 소설이 <모비딕>이다. 이 소설과 함께 작가가 망각과 침묵의 바다 속에 침몰한 형국이랄까. 20세기 , <모비딕>의 부활은 눈 덮인 산 같은 모비딕이 바다 위로 웅비하는 모습을 반복하는 것 같지 않나.

 

-- <책&>

 

-- <모비딕>의 작가가 가장 열등감을 느낀 작가는 너대니얼 호손이었던 것 같은데,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봐야죠 ㅋ  <큰바위얼굴>은 연극도 하고 그랬는데...

 

 

 

 

 

 

 

 

 

 

 

 

 

 

 

-- 오로지 거대한 이미지, 숭고함, 뭐 이런 것 때문에 <모비딕>과 함께 연상되는 화가는 아이바조프스키입니다. 그의 그림은 종류 불문, 갤러리에서 실제로 보면 문자 그대로 압.도.(압사?)당합니다..^^;; 칸트의 숭고미 설명할 때 항상 언급하는 화가이기도..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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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삶을 쟁취하다

-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외숙부의 집에 맡겨진 소녀가 있다. 외숙부마저 죽어버리자 소녀는 그야말로 군식구가 된다. 그런데도 고분고분하기는커녕 곧잘 악다구니를 쓰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결국 그 벌로 붉은 방에 갇힌다. 게이츠헤드 저택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방, 하지만 외숙부가 그곳에서 임종을 맞은 뒤로 아무도 살지 않는 방, 불도 때지 않아 썰렁한 방, 유령이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방. 붉은 방의 어둠을 응시하며 소녀는 억울해! 정말 억울해!”라고 외친다. 못 생긴데다가 당돌하기까지 한 열 살짜리 소녀는 못된외숙모와 외사촌들 틈에서 세상이 참 공평하지 않다는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제인 에어는 로우드 자선 학교에서 8년을 보낸 후 자유를 갈망하며 손필드 저택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열여덟 살이 되었건만 여전히 못 생기고 키고 작고 비썩 마른 그녀 앞에 로체스터가 나타난다. 말하자면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로맨스도 없고 흥미도 없는 평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조한 생활의 한 시간에 변화를 갖다 준 셈이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하였고 희구되었고 또 나는 그것을 부여하였다.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이 내게는 기뻤다. (중략) 게다가 그것은 새 얼굴이었고 흡사 기억의 화랑에 집어넣은 새 그림과 같았다. 이미 거기에 걸려 있는 딴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첫째, 남성의 얼굴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했고 둘째로는 사납고 씩씩하고 검은 얼굴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였다.(1, 209)

 

본격적으로 열정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수시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고딕소설 속의 성과 같은 손필드 저택, 미남도 아니고 성격도 괴팍하지만 어딘가 우수에 차 있는 남자, 가정교사와 부유한 귀족이라는 신분의 벽, 스무 살에 가까운 나이 차이. 이로써 로맨스소설의 요건이 갖추어진다. 사건의 흐름과 속도는 더 기막히다. 한밤중에 로체스터의 방에 불이 나고 제인은 그를 구한다. 파티 날, 로체스터는 점쟁이로 분장해 제인의 속마음을 떠본다. 외숙모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제인이 한 달간 손필드를 떠난다. 그리움이 그들의 사랑을 점검하도록 해준다. 잉그램 양을 사이에 둔 삼각관계가 진전되면서 사랑은 더 깊어간다. 손필드 저택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 아슬아슬한 긴장을 더한다. 애정의 표현 방식 역시 적절한 수위를 넘지 않으며 우리의 연애 욕망을 간질인다. 드디어, 제인과 로체스터의 결혼식. 그러나 뜻밖의 파국으로 인해 제인은 손필드를 도망치듯 떠난다. 다시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연인들은 재회하여 가정을 꾸린다. 인물들도 행복하고 독자도 행복한 결말이다. 가히, 달콤한 낭만성을 무기로 내세운 최고의 연애소설답다.

 

(여러 <제인 에어> 중 제일 마음에 들었던 BBC 영드 <제인 에어>. 단, 원래 제인은 체구가 왜소해야 하는데, 이 제인은 너무 튼실했다는..-_-;; 꽤 길지만 보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 

 

이 러브스토리를 재구성해보자. 불쌍한 고아 소녀가 가난한 가정교사를 거쳐 대저택의 어엿한 안주인이 된다.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실현, 시쳇말로 된장녀이야기이다. 과연 그런가? 빅토리아조의 19세기 영국, 여성은 오직 여자의 길을 충실히 감으로써만 인간일 수 있었다. 간단히 결혼, 출산, 육아, 살림 등이다. 물론, 제인이 추구했고 또 손에 넣은 가치도 그것이다. , 그녀에게는 그럴 듯한 집안도, 미모도 없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분수를 똑똑히 알고서 세상의 법칙과 당당히 맞섰다. 인간으로서의 최소치의 존엄은 이런 식으로 유지된다.

 

제가 가난하고 미천하고 못생겼다고 해서 혼도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혼도 있고 꼭 같은 감정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복이 있어 조금만 예쁘고 조금만 부유하게 태어났다면 저는 제가 지금 당신 곁을 떠나기가 괴로운 만큼, 당신이 저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게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저는 지금 관습이나 인습을 매개로 해서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고 육신을 통해 말씀드리는 것도 아녜요. 제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게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두 영혼이 다 무덤 속을 지나 하느님 발밑에 서 있는 것처럼, 동등한 자격으로 말이에요. 사실상 우리는 현재도 동등하지만 말이에요!”(2, 32)

 

억울해! 정말 억울해!”라며 엉엉 울던 소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 남자를 향해 대책 없이 열정을 불태우고 결국 그 남자를 자기 품에 안음으로써 제인은 사랑 이상의 것을, 삶 자체를 쟁취한다. ‘로체스터 씨가 아닌 그냥 에드워드’, 원죄와도 같은 어두운 과거 때문에 눈이 멀고 쇠락한 한 남자. 첫 눈에 반한 사랑이자 마지막까지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 여성이 열정과 삶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 나아가 기록-문학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은 비단 제인의 인생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도 놀라운 성취이다. 물론, 그것은 <제인 에어>의 작가가 이룩한 위업이기도 하다.

 

(외유내강 이미지의 제인으로는 샬럿 갱스부르가 떠오르네요. 위에 인용한 저 대사 읊을 때 인상적이던데.) 

 

샬럿 브론테는 이십대 때 뼈아픈 사랑을 겪고 계속 노처녀로 살다가 서른여덟에 결혼했다. 그리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임신한 상태에서 병사했다. 여자로서, 아니, 그냥 인간으로서도 제법 처량한 운명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기억을 투영하여 만들어낸 제인 에어는 붉은 방을 빠져나와 행복과 평온의 왕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다. 이만하면 브론테의 운명도 어느 정도 보상되지 않았을까.

 

-- 네이버 캐스트

 

-- 제각기 나름 걸출한 작가였던 브론테 자매를 소재로 만든 영화. 에밀리 역을 이자벨 아자니가 맞는 바람에 형평성(??)이 완전 깨져버렸어요 ㅋ 인지도가 제일 낮은 앤 브론테 역은 보다시피, 이자벨 위페르가 맡았습니다.

 

--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한 소설은 아무래도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입니다만, 소설 자체는 샬럿이 좀 더 잘 썼던 것 같아요....^^;

 

 

 

 

 

 

 

 

 

 

 

 

 

 

-- BBC판 <제인 에어>의 마지막 장면(가족 사진 찍는)인데, 이미지가 너무 작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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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의 내적 풍경:

권태와 우울을 발명하다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파리의 우울>은 작가 자신의 말마따나 이상한책이다.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총 51편에 이르는 이 ()산문시는 니체의 아포리즘이나 카프카의 장편(掌篇) 소설을 미리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제목은 어떠한가. ‘파리의 우울이라지만 이 책 속의 파리는 상당히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이 도시를 향해 시인은 외친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 더러운 수도여! / 창녀들, 그리고 강도들, 그대들은 대개 그처럼 자주 가져다준다. / 무지한 속물들은 알지 못하는 갖가지 쾌락을!”(에필로그, 287) 말하자면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파리의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다. 그것에 작가는 우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울과 권태는 모더니티의 수도, 19세기의 파리를 몸으로 살아냈던 보들레르의 발명품이다. 이 독특하고 새로운 정서의 진앙은 시간, 혹은 시간에 대한 의식이 아닐까 한다.

 

 

! 그렇다! ‘시간이 다시 나타났다. 시간은 이제 지배자로 군림한다. 그리고 이 혐오스러운 늙은이 시간과 함께 추억, 회한, 경련, 공포, 고통, 악몽, 분노, 신경증 등 시간의 악마 같은 수행원들이 모두 되돌아왔다. / 맹세코 초침 소리가 이제 더욱 힘차고 엄숙하게, 일 초 일 초 시계추에서 튀어나와 말한다. “나는 이다. 견디기 힘든, 냉혹한 삶!” / 인간의 삶에서 어떤 희소식을 알려주는 임무를 띤 것은 다만 일 에 지나지 않는다. 그 희소식이라는 것도 결국 우리에게 설명할 수 없는 공포를 불러일으킬 뿐이지만. / 그렇다! 시간이 군림한다. 시간이 그의 난폭한 독재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시간은 마치 황소를 부리듯 그의 두 개의 바늘로 나를 몰아세운다. “이러! 짐승 놈아! 땀을 흘려 일해. 노예 녀석! 살아라, 망할 녀석아!”(이중의 방, 41)

 

무지막지한 시간 앞에서 시인은 정녕 나태의 화신에 지나지 않을까. 거리를 빌빌대거나(산책자!) 정반대로 방바닥을 긁는 것(몽상가!)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 ‘혁명의 시대에 이어 자본의 시대가 도래했건만 우울과 권태에 절어 있는 자가 시간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 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취해라. / 그리고 때때로 궁궐의 계단 위에서, 도랑가의 초록색 풀 위에서, 혹은 당신 방의 음울한 고독 가운데서 당신이 깨어나게 되고, 취기가 감소되거나 사라져버리거든 물어라. (중략)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당신에게 대답할 것이다. “이제 취할 시간이다!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취해라! 술이든, 시든, 덕이든 무엇이든, 당신 마음대로.”(취해라, 206-207)

 

이른바 취함의 미덕은 부르주아적인 절제와 중용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대체로 보들레르는 데카당스가 하나의 미학 체계로 확립되기 전부터 이미 퇴폐의 시인으로 자리매김 됐다. 놀라운 것은 그것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공존하는 민감한 윤리 의식이다.

 

 

(자화상, 이랍니다. 처음 봐요.)

 

 

가령 괘씸한 유리 장수에 재미있는 얘기가 나온다. 세상에 누구보다도 악의 없는 한 몽상가가 오직 과연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쉽사리 불이 붙는지 어떤지 보기 위해서숲에 불을 지른다. 이어 화자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어느 날 아침 무심코 창밖을 내려다보다가 유리 장수를 발견하는데 그에게 갑작스러운 포악한 증오를 느낀 나머지 괜히 그를 집까지(7층에 있다!) 불러들인 다음 온갖 생트집을 잡아 그를 밀치다시피 내려 보낸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가 다시 문 앞에 나타나자 화자는 발코니에서 조그만 화분 하나를 집어 그의 지게를 향해 수직으로 던진다. 유리 장수는 나뒹굴고 유리는 박살난다. 그러자 화자는 자신의 광기에 더욱더 도취되어 인생을 아름답게! 인생을 아름답게!”라고 외친다.

 

 

 

을 향한 끌림은 자주 을 향한 갈망을 동반한다. 마찬가지로 패륜적이고 패덕적인 무보상적 행위의 저변에 윤리와 도덕에 대한 강박관념이 깔려 있는 일이 왕왕 있다. 실제로 으로 번역되는 프랑스어 단어(mal)에는 고통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보들레르에게 있어 문학 자체가 악덕에 빠진, 온갖 소외된 자들을 향한 고통과 연민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한데 그의 병적인 자학 속에 자기 연민은 없었던 것일까. 더 이상 웃지도, 울지도, 노래를 부르지도, 춤을 추지도 않는 늙은 광대를 보며 그는 큰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서 이 광경에 마음이 사로잡혀 나의 갑작스러운 고통을 분석해 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방금 본 것은 한 늙은 문학자의 이미지다. 그는 한 세대를 즐겁게 해준 훌륭한 광대였으나, 그 세대는 지나가 버린 것이다.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고, 어린애도 없으며, 그의 빈곤과 몰이해한 대중으로 인해 망가진 늙은 시인의 이미지! 잊기 잘하는 세상 사람들은 그의 막사에는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늙은 광대, 94)

 

-고통의 꽃을 응시하며 우울과 권태에 몸부림치다 고독과 연민과 병마 속에서 죽어간 시인, 그런 시인의 이미지! 보들레르는 시를 통해, 더 정확히 자신의 시보다도 더 시적이었던 그 삶 자체를 통해 자신의 동갑내기인 두 소설가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업적을 성취했다. 바로 근대의 내적 풍경을 발견, 아니 발명하고 창조한 것이다.

 

-- 네이버캐스트

 

 

-- <악의 꽃>을 읽지 않고 보들레르를 말할 수 없지만 시를 읽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져 차선책(?)으로 택한 책이 <파리의 우울>이었는데, 십수년만에 다시 읽고 많이 놀랐더랬지요. 너무 '모던'(!)해서요.  언제부터인가 벤야민과 보들레르가 한 쌍이 됐어요 -_-;;   

 

 

 

 

 

 

 

 

 

 

 

 

-- 시를 읽는 일이 어려워진다 했는데, 최근에, 간만에, 그리고 얼른 시집 두 권을 샀습니다. "오다, 서럽더라"와 "사는 기쁨". 두 시인의 (잘은 모르나) 삶의 궤적만큼이나 시 세계도 (일단 표제작부터!) 너무 다르지만, 다르기 때문에 둘 다 좋습니다 ㅎㅎ  '정든 유곽'과 '즐거운 편지'가 세월이 흘러흘러 이런 모습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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