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조지 오웰(1903-1950), <1984>(1949)

 

 

 

198444일 현재,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 등 세 개의 거대 국가로 재편돼 있다. 소설의 배경인 오세아니아의 런던.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문구처럼 모든 것이 B.B., 즉 빅 브라더의 통제 하에 있다. 텔레스크린, 증오 주간, 영사(영국 사회주의), 승리맨션, 승리담배, 신어. 극히 단순화된 미래 사회를 움직이는 원칙은 당의 슬로건(“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 암시하듯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의 부정, 이른바 이중사고’(‘현실 제어를 의미하기도 한다)이다. 진리부의 일원으로서 역사의 재편-날조에 종사하고 있는 윈스턴 스미스는 대략 7년쯤 전부터 당과 빅 브라더에 반감을 품어왔는데, 그 표현이 일기 쓰기이다. 2부에서는 연애를 통해 저항한다. 줄리아는 당의 부패와 타락의 상징처럼 제시되고 그녀와의 육체적 관계는 일종의 전투”, “사랑의 행위이기 전에 당에 일격을 가하는 정치적 행동”(179)이다. 그들은 함께 형제단에 가입함으로써 체제 전복을 꾀하지만 그들에게 밀회 장소를 제공해 주었던 늙은 상점주인 채링턴, 정확히, 그렇게 위장해 있던 사상경찰에게 체포된다. 3부는 어둠이 없는 곳”(321), 즉 애정부에 갇힌 윈스턴이 오브라이언의 고문과 세뇌 끝에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디스토피아 소설로 널리 알려진 조지 오웰의 <1984>는 여러 모로 정치풍자적인 우화에 가깝다. 검은 콧수염을 기른 마흔 댓 살쯤의 잘 생긴 남자(빅 브라더)는 스탈린을, “인민의 적골드스타인은 외모(가느다란 염소수염과 어딘가 지적이면서도 비열해 보이는 얼굴), 유대인이라는 점과 일련의 전기적 사실에 있어 트로츠키를 연상시킨다. 윈스턴과 오브라이언의 두 번에 걸친 긴 대화(심문), 골드스타인의 책(<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에서 인용되는 문장은 소설이 아니라 선동적이고 교시적인 팸플릿에서 가져온 듯하다. 실제로 문학과 정치의 상관성은 <1984>, 나아가 조지 오웰의 문학을 받치고 있는 축이기도 하다.

 

 

 

 

 

 

 

 

 

 

 

 

 

 

인도 주재 영국 공관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첫 직업은 버마(미얀마)의 경찰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형태에 대해 분노하면서 제국의 식민지 경찰 에릭 아서 블레어는 작가 조지 오웰로 다시 태어난다. 그가 1930년대에 쓴 책들(<런던과 파리의 따라지 인생>, <위건 부두 가는 길>, <카탈로니아 찬가> )은 대도시의 슬럼가, 탄광 지대, 전쟁터 등 민중속으로, 또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충실히 기록하고 보도하려는 소명감을 여실히 보여준다여전히 모더니즘의 영향력이 막강한 때였음에도 그는 전통적 리얼리즘과 저널리즘의 원칙을 고수하며 르포르타주(다큐멘터리)와 순수 문학의 경계를 오가는 소설을 썼다. 기록문학의 대가가 <동물농장>, <1984>와 같은 알레고리로 옮아간 것은 당연해 보인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니까 나이 다섯 아니면 여섯 살 때부터, 나는 내가 나중 커서 작가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나는 왜 쓰는가)로 시작하는 유명한 에세이에서 그가 작가가 되려는 네 가지 동기 중 가장 강조하는 것도 정치적 목적이다. 여기서 정치적이란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을 말한다. 고로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아주 자유롭지 않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이다.”

 

 

 

 

 

 

 

 

 

 

 

 

 

<1984>를 쓰기 전 조지 오웰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으로 꼽히는 자먀친의 <우리들>(1923)에 대한 짧은 평(자유와 행복)을 남겼다. 그가 지적하듯 이 소설은 스탈린 체제가 시작되기 전에 쓰인 소설이다. 형식주의 이론의 대두와 맞물려 다양한 문체와 형식 실험이 행해지는 가운데 자먀친은 SF소설에서 나올 법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도스토예프스키(특히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던진 화두를 소설화한다. 건물은 유리벽으로 돼 있고 인간은 알파벳과 숫자로 환원되고 인간의 욕망과 자유의지는 “2x2=4”, 즉 수학과 이성의 논리에 따라 엄밀하게 측정, 계산된다. 단일제국의 우주선 축조에 참여하는 엔지니어 D-503의 일기(수기)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반역을 시도했던 주인공이 일종의 로보토미 수술을 받고서 제국의 충실한 종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전체주의의 악몽 속에서 철저히 마모돼 가는 개인의 실존을 포착한 걸작의 닫힌 구조를 <1984>도 반복한다.

 

 

 

 

 

 

 

 

 

 

 

 

 

 

 

1, 윈스턴 스미스의 일기에는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31),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자유이다.”(114)와 같은 문장이 들어 있다. 3, 철저한 재교육이 끝난 뒤 그는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고 쓴다. 소위 쥐 고문을 받은 뒤에는 빅 브라더를 향한 증오도 사라진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중략) 투쟁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417) 묵시록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결말이다. 여기에 덧붙인 부록: 신어의 원리는 인간의 의식 구조의 형성과 변화에 언어-문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새삼스레 환기시킨다.

 

-- <책앤>

 

-- 바깥의 기운과는 별개로, 아니면, 그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여하튼 무척 우울하다, 라고 쓰고 보니, 딱히 그렇게 우울할 것도 없네요, 쩝. '우울'에 관한 문장을 쓰는 순간, 우울이 졸지에 희화되는 느낌..-_-;; 뭐, 여하튼. 오랜만에 다시 읽은 <1984>, 정치 알레고리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 놀랐습니다. 국내 독자에게 인지도는 낮지만 자먀틴(-찐)의 <우리(들)>가 문학적 관점에서는 훨씬 더 뛰어난 소설인 것 같은데, 취향의 문제일까요....? ^^;;  남들 다 재미있어 하는 (<1984>에서 시작된) 하루키의 소설은 또 왜 그리 지루할까요...ㅠ.ㅠ 아무래도 <상실의 시대>가 제일 재미있었던 듯...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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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탄생 -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

 

 

 

옛날에, 아주 살기 좋던 시절, 음매 하고 우는 암소 한 마리가 길을 걸어오고 있었단다. 길을 걸어오던 이 음매 암소는 턱쿠 아기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사내아이를 만났단다.”(11)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한 소년이 예술가로서의 소임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 성장 소설이자 교양 소설이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용서를 빌지 않으면 독수리들이 와서 눈알을 빼버릴 거라는 단티(아줌마)의 말이 오랫동안 아이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친다. 학창 시절 스티븐이 겪는 일도 비교적 전형적이다. 가령 아놀 신부의 라틴어 시간, 학감인 돌란 신부가 나타나 게으른 학생플래밍을 체벌한 다음 스티븐을 주목한다. 왜 쓰기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안경을 깼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지만 게으름뱅이에 속임수나 쓰는 아이로 매도당한다. 자초지종을 설명할 기회도 없이 그의 손바닥에 수치와 고통과 공포의 회초리가 갈겨진다. 정말로 안경을 깼고 새 안경을 보내달라고 집에 편지를 썼고 그것이 도착할 때까지 쓰기를 면제 받았는데 회초리질이라니, 얼마나 부당하고도 잔인한가! 스티븐은 교장실을 찾아가 목이 막히고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가운데 조곤조곤, 또박또박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이 대범하고 영웅적인 행위로 스티븐의 성장의 한 고리가 마무리된다.

 

 

 

 

 

 

 

 

 

 

 

 

 

 

전학한 스티븐은 한 친구의 말마따나 전형적인 모범 청년”, “담배도 안 피우고, 바자에도 안 가고, 계집애들과 시시덕거리지도 않고, 제기랄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119)는 학생이다. 다른 학우들과는 달리 테니슨보다는 반항과 환멸의 상징인 바이런을 위대한 시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영어 선생은 그의 에세이에서 이단적인 생각”(123)을 엿본다. 열여섯의 반항은 사창가로 이어지고 사악한 자기방기(自己放棄)의 부르짖음”(156)과 함께 순수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다. 통렬한 죄책감과 진정어린 참회로 성장의 새로운 고리가 열린다. 이런 그에게 교장은 성직자가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스티븐도 예수회 소속 신부 스티븐 디덜러스”(249)의 모습을 그려보지만 더블린 만(),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의 진짜 소임은 종교가 아니라 예술, 즉 문학임을 깨닫는다. “그의 영혼은 소년 시절의 무덤에서 일어나 그 시절의 수의를 떨쳐버렸다. () 이제는 영혼의 자유와 힘을 밑천으로 하나의 살아 있는 것, 아름답고 신비한 불멸의 새 비상체(飛翔體)를 오만하게 창조해 보리라.”(262)

 

 

 

 

 

 

 

 

 

 

 

 

 

 

 

 

더쿠 아기가 예술가로 태어나는 이 순간은 신의 존재와 그 뜻이 구체화되는 종교적 황홀경을, 거룩한 현현(epiphany)을 방불케 한다. 대학생이 된 스티븐이 한 친구 앞에서 하는 말은 젊은 예술가의 테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말해 주마.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나의 조국이든 나의 교회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이나 예술 양식을 빌려 내 자신을 가능한 한 자유로이, 가능한 한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무기인 침묵, 유배(流配) 및 간계를 이용하도록 하겠어.”(379)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스티븐의 일기 역시 그 옛날의 아버지여, 그 옛날의 장인(匠人)이여, 지금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나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소서.”라는 기도로 끝난다. 물론 그가 부르는 저 신은 디덜러스라는 이름 속에 포함된 다이달로스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3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대체로 고독이나 소외도, 추방이나 망명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한 주인공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성장은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기보다는 가파른 계단처럼 비약적으로 이루어지고, 성장의 각 단계를 반영하는 문체는 후반부로 갈수록 현란한 기교를 뽐내며 지적이고 난해한 담론을 선보인다. 여러 모로 모더니즘과 의식의 흐름의 시작을 알리는 소설답다. 조이스가 그 무렵 비교적 전통적인세태 소설(<더블린 사람들>)을 같이 쓰고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자전 소설의 혁신성이 더 도드라진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정확히, 그 전신인 <스티븐 히어로>)과 유사한 유일한작품으로 조이스는 러시아의 낭만주의 시인 레르몬토프가 쓴 자전소설(<우리 시대의 영웅>)을 꼽았다. 작품의 길이와 주인공의 성향에는 차이가 있으나 목적과 제목”, “신랄한 논술은 비슷하다는(리처드 엘먼, <제임스 조이스>) 것이다. 과연 개별적 시공간을 떠나 영웅-주인공을 꿈꾸는 젊은 예술가의 오만한 반항에는 보편적인 유사성이 있다.

 

 

(조이스 관련 책이면 어디나 나오는 사진. 노라와 함께 혼인신고 하러 가는 길...^^;;)

 

 

조이스는 이십대 때 조국 아일랜드를 떠났고 이후 두 번의 방문을 빼면 평생 유럽을 떠돌며 살았다. “더블린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면 세계 모든 도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리처드 엘먼) 조국을 향한 그의 감정은 복잡다단했지 싶다. 유럽의 변방, 척박한 섬나라 출신의 작가가 비단 영국문학사가 아니라 세계문학사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부당하고 잔인한 회초리질이 얼마나 많았을까. 어린 스티븐이 지리책의 여백에 써놓았듯, 아일랜드는 그의 삶과 문학의 중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스티븐 디덜러스 / 기초반 / () / 아일랜드 / 유럽 / 세계 / 우주”(25)

 

-- 책앤

 

-- 머릿속에 재미없는 악몽(ㅠ.ㅠ)처럼 남아 있는 조이스! <율리시스>는 여전히 엄두를 못 내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다시 읽어봤는데, 그대는 여전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율리시스>에 대한 미련은 깔끔히 접는 걸로... ㅋ 어릴 때 영산문 강독(?) 시간에 원문 강독한 <더블린 사람들>은 그나마 읽을 만하다고 쳐도, 조이스의 이른바 '에피파니'가 나에게는 별다른 에피파니를 주지 않더라고요...-_-;; 흠, 그럼에도 그가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건 어째 뇌리에 남는군요.(그리고 안질환으로 고통 받았다는 사실도.) 

 

역시나 아일랜드 출신인 이 양반이 조이스 밑에서 비서 노릇을 했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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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관습을 넘어, 자연과 호흡하는 자유의 삶을 찾아

-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미시시피 강을 따라 펼쳐지는 십대 소년의 모험담을 그린 동화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만한 실례도 없을 것 같다. 실상 남북전쟁 직전의 미국 사회, 특히 남부의 생활상과 세태, 모럴과 관습을 이 정도로 밀도 있게 조망한 소설도 드물다. 헉은 더글라스 과부댁의 양자이고 짐은 그녀의 여동생인 왓츤 아줌마의 노예이다. 둘은 나이, 그보다는 피부색의 차이 때문에 좀처럼 어울리기 힘든 사이지만 도망이라는 정황 때문에 문자 그대로 한 배를 탄다. 헉은 알코올 중독자이자 부랑자인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짐은 올리언스 지방으로 팔려갈 위기를 피해 도망친 것인데, 가정과 국가-사회의 폭력(노예제도)이 묘한 유비를 이룬다. 어쩌면 이 때문에 검둥이’(nigger)와 소외된 백인 하층 소년 사이에 유대 관계가 돈독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허클베리…>에서 흑백의 대립과 인종 문제는 단순한 휴머니즘과 훈훈한 온정주의로만 환원되지는 않는다.

 

 

 

 

 

 

 

 

 

 

 

 

 

 

 

가령 희대의 사기꾼인 공작이 짐을 펠프스 농장에 팔아버린다. 헉은 법률과 관습에 따라 검둥이를 내줄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어기면서까지 검둥이를 구할 것인지 고민한다. 왓츤 아줌마에게 짐의 행방을 알리는 편지를 쓰기도 하지만 결단을 내리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좋아, 난 지옥으로 가겠어.- 그러고는 편지를 북북 찢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끔찍스러운 생각이었고 무서운 말이었지만 벌써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뱉은 말을 취소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었지요. (중략) 다시 나쁜 짓을 하기로 하자고 했습니다. 나란 놈은 자라나기를 그런 식으로 자라났으니 나쁜 짓이 내 천성에 맞고, 착한 일은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맨 첫 번째 일로 나는 짐을 다시 한 번 노예 상태에서 훔쳐내자,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일을 생각해 낼 수 있다면 그것도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나쁜 짓을 하기로 한 이상, 더구나 끝까지 하기로 한 이상, 철저하게 해내는 것이 좋을 테니까요.”(451-452)

 

절친한 친구를 구하는 일이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지옥과 동일시되는 정황은 시대적인 맥락을 고려해야만 이해될 수 있겠다.

 

 

 

 

 

 

 

 

 

 

 

 

 

 

헉의 눈에 비친 짐은 어리석고 미신적이며 따라서 어딘가 야만스럽지만 인정이 많고 생활의 지혜를 보여주는 일도 잦다. 그럼에도 이런 긍정적인 자질들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다. “짐이 하는 말은 대체로 늘 옳았습니다. 짐은 검둥이치고 비상한 머리를 갖고 있었지요.”(166) 한편 짐은 자유주에 도착하면 열심히 돈을 모아, 다른 농장으로 팔려가는 바람에 뿔뿔이 흩어진 처자식을 되사겠다는, 만약 주인이 팔지 않으면 노예 폐지론자에게 부탁하여 애들을 훔쳐오겠다는 생각을 하고 가족이 그리워 수시로 눈물을 흘린다. 이에 대해 헉의 반응이 참 아이러니하다. “자기 가족을 생각하는 심정은 흑인이나 백인이나 다를 것이 없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340) 간단히, 검둥이는 인간에 근접한 그 무엇이지, 온전한 의미의 인간은 아닌 것이다. 노예제도의 위력이 실감남과 동시에 이 소설의 리얼리즘이 도드라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헉은 얼떨결에 펠프스 집안의 조카 톰 역할을 떠맡은 다음 그 특유의 거짓말과 연기 능력을 발휘하여, 또 느닷없이 등장한 톰 소여의 도움을 받아 짐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짐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다소 황당하게도, 왓츤 아줌마의 갑작스러운 개심덕분이다. 짐은 이렇게 수동적으로 자유를 얻는 반면, 헉은 그 스스로 그것을 찾아 떠난다. 그가 글을 쓰는 일에 회의를 표하고 무엇보다도 교양으로써 자신을 길들이려는 은혜로운자들을 피하는 것은 문명에 대한 저항이자 자연-자유를 향한 추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교양 있는’, 그리하여 자신이 읽은 책에 따라 삶을 그야말로 모험-유희로 즐기고 어딘가 주일학교냄새를 풍기는 톰 소여와 확연히 구분되는 헉의 특징이기도 하다.

 

, 이제 더 이상 쓸 이야기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기쁩니다. 그 까닭은 만일 책을 쓴다는 것이 이렇게 귀찮은 일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아마 이 일에 덤벼들지 않았을 것이고,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을 하려고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나머지 사람들보다 앞서 인디언 부락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샐리 아줌마가 나를 양자로 삼아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 하고 있고, 나는 그 일이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 일이라면 전에도 한번 해본 적이 있으니 말입니다.(596)

 

여기다 무슨 얘기를 더 보태는 것 자체가 작가의 의도를 배반하는 행위일 것 같다. 이 소설이야말로 흐르는 강물처럼쓰인, 또한 그렇게 읽는 것이 더 옳지 않겠는가. 이 책의 맨 처음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동기를 찾으려고 하는 자()는 기소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추방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플롯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총살할 것이다.

- 지은이의 명령에 따라

군사령관 G. G.

 

 

-- <네이버캐스트>

 

-- 미국 문학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마크 트웨인이 이렇게 비중있는 작가라는 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동화로만, 티브이 만화로만 알았던 <허클베리...> <톰 소여...>, 어릴 때 동화로만 읽은 <왕자와 거지> 등의 작가인 그가 실은 러시아문학으로 치면 고골쯤 된다는군요...-_-;;  실제로 정신차리고(?!) 읽어보니, 어려운(=지루한 ㅠ.ㅠ) 책이더라고요... ㅋㅋㅋ

마크 트웨인 하면 떠오르는 건, 자기는 담배를 끊을 때마다 성공했다는(^^;) 식의 말뿐인데 대단한 애연가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많이 크지만 이런 사진을...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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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히 기회가 되어 제법 공들여(^^;) 번역한 톨스토이 동화인데, 나름 물 같고 산소 같은(^^;) 톨스토이 할아버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꼬마 필립

(실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필립이었습니다.

한 날은 아이들이 전부 학교에 갔습니다. 필립은 모자를 집어 들었습니다. 학교에 가고 싶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네요.

어딜 가려고 그러니, 필립?”

학교요.”

너는 아직 어려서 학교에는 못 간단다.”

어머니는 필립을 집에 남겨두고 나갔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버렸고요. 아버지는 아침 일찍 숲에 가버렸답니다. 어머니는 오늘 하루 일을 하러 간 것이고요. 그래서 오두막 안에는 필립 밖에 없었습니다. 아참, 그리고 할머니가 페치카 위에 누워 있네요. 필립은 혼자 있자니 심심했습니다. 마침 할머니가 잠이 들었습니다. 필립은 모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모자가 보이지를 않는군요. 그래서 필립은 낡은 아버지 모자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학교로 향했습니다. 

 

 

 

 

학교는 마을 뒤쪽 교회 옆에 있었습니다. 필립이 자기 동네를 지나갈 때는 개들이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다들 그가 누구인지 알았거든요. 하지만 남의 동네로 나가자 쥬치카가 튀어나와 컹컹 짖기 시작했습니다. 쥬치카에 이어 커다란 개 볼촉이 튀어나오는군요. 필립은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개들이 필립의 뒤를 마구 쫓아왔습니다. 필립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런, 발을 헛디뎌 그만 넘어졌네요.

그때 한 농부 아저씨가 나와 개들을 쫓아주었습니다. 그러고는 말했지요.

어딜 그렇게 혼자서 달려가는 거니, 이 장난꾸러기야?”

필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깃만 매만졌습니다. 그러고 나선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필립은 학교 근처까지 다 왔습니다. 학교 앞 현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학교 안에서는 아이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필립은 갑자기 무서워졌어요.

선생님이 나를 쫓아내면 어떡하지?’

필립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되돌아가면 또다시 개한테 물릴 지도 몰라. 학교 안으로 들어가자니선생님이 무서워!’

그때 학교 옆으로 양동이를 든 아줌마가 지나가며 말했습니다.

다들 공부하는데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이 말에 필립은 학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현관에서 모자를 벗고 문을 열었지요. 교실은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다들 제각기 뭐라고 외쳐댔고, 빨간 목도리를 두른 선생님이 한가운데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 무슨 일이냐?”

선생님이 필립을 보자 소리쳤습니다. 필립은 모자를 꼭 붙든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너는 대체 누구야?”

필립은 또 침묵했습니다.

혹시 벙어리냐?”

하지만 필립은 너무 겁을 집어먹어서 아무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말하기 싫으면 그냥 집에 가려무나.”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다면 필립은 정말 기뻤을 거예요.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목구멍이 바싹 말라버렸지 뭐예요. 그래서 선생님을 쳐다보며 그만 울음을 터뜨렸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필립이 가엾어졌어요. 그는 필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에게 이 소년이 누구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필립이에요, 코스튜쉬카의 동생! 저 애는 오래 전부터 학교에 가겠다고 떼를 썼지만 어머니가 보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몰래 학교에 온 거예요.”

그럼, 형 옆 자리에 앉아라. 내가 어머니에게 너를 학교에 보내달라고 부탁하마.”

 

선생님은 필립에게 글자를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필립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답니다. 약간은 읽을 줄도 알았지요.

자 그럼, 이름을 한 번 써보렴.”

그러자 필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다들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훌륭하구나. 누가 너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주었지?”

필립은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코스튜쉬카 형이요! 나는 정말 영리해서 뭐든지 당장 이해했어요. 머리가 얼마나 잘 돌아가는지 몰라요!”

그러자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기도문은 알고 있니?”

필립이 말했습니다.

그럼요!”

그러고는 성모송을 읊조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단어가 죄다 틀렸지 뭐예요. 선생님은 그만 하라고 한 뒤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 자랑은 좀 있다가 하고, 일단은 공부를 하자꾸나.”

 

그때부터 필립은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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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얼굴이 많을 수록 좋지만, 톨..은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 중 아마 그가 사랑하고 흠모한 얼굴은 말년의 이 얼굴이었던 듯. 어릴 때부터 자기가 못 생겼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실제로 그런 면도 좀 있죠??), 나이 들면 대략 평준화(?)되기도 합니다. 젊은 날의 톨...은 좀 독한(?), 그리고 못된(?) 느낌이 강한 듯..^^;; 이러나저러나, 자신의 원래 모습과 이상을 젊은 지주 귀족(니콜라이 로스토프 / 네흘류도프), 젊은 장교(안드레이 볼콘스키), 촌스럽고 괴팍한 젊은 구도자(피에르 베주호프 / 콘스탄틴 레빈) 등등 여러 남성 주인공들에게 골고루 투사했습니다. 다들 조금씩 틀리지만, 공통점은 그 나름으로 다 미남이라는... ㅋㅋ 저는 저들 중 볼콘스키를 제일 좋아합니다.(더 정확히, 히스테리 대마왕인, 그 볼콘스키의 아버지인 노공작 볼콘스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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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 속물스러움을 어찌할 것인가

- 고골,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고골은 러시아문학 최고의 수수께끼이다. 그는 얼굴이 너무 많거나 아예 없다. 능글맞고 의뭉스러운 재담꾼의 얼굴, 이상과 현실의 괴리 앞에서 파멸하는 광기 어린 예술가의 얼굴, 궁상맞고 추레한 노총각의 얼굴, 구원의 열망에 사로잡혀 고통 받는 메시아의 얼굴. 이 얼굴들이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속을, 환상의 도시 뻬쩨르부르그를 유령처럼 배회한다.

 

그러나 가장 기묘한 것은 네프스끼 거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 이 네프스끼 거리를 믿지 마라! (중략) 모든 것이 기만이고 모든 것이 꿈이며 모든 것이 겉보기와는 다르다!(281)

 

인간은 그를 구성하는 각종 부속물로 해체된다. 프록코트, 넥타이, 중절모, 콧수염 등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그 파편들이 인간을 장악한다.(네프스끼 거리) 오죽하면 엄연히 인간의 한 부분인 신체마저도 속을 썩인다. 가령 에서 는 분명히 코발료프의 일부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 더욱이 그보다 더 높은 관등을 뽐내며 그를 위협한다. 과연 이 모든 것이 한낱 꿈에(-NOS를 뒤집으면 꿈-SON이 된다) 불과한 것일까.

 

 

 ([코] 러시아 본 중 하나.)

 

외투처럼 사실주의의 외투를 걸친 소설 속의 세계는 더 환상적이다. 가난한 하급 관리가 북국의 혹한에 맞서려고 힘들게 장만한 새 외투를 강탈당하고 절망 끝에 사망한 뒤 귀신이 되어 뻬쩨르부르그를 떠돈다. 실상 이 소설의 환상성은 전설의 고향 같은 줄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하나의 외투, 하나의 자리로 환원되는 세계야말로 그로테스크하다.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시신은 어디론가 옮겨져 매장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뻬쩨르부르그에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누구의 보호나 사랑도 받지 못하고, 흔한 파리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핀으로 꽂아 현미경을 들이대는 자연 관측자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던 존재가 사라졌다. (중략) 이렇게 하여 관청에서도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죽음을 알게 되었고, 벌써 그 다음날부터 훨씬 키가 큰 다른 관리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89-90)

 

말하자면 고골은 카프카 보다 먼저 관료제의 암흑과 심연을 엿보았던 것이다. 광인 일기는 관료제의 부품이 된 인간의 내면을 포착한다. 뽀쁘리시친은 상관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승진을 하려는 야무진 포부를 키우지만 그것이 좌절되자 완전히 미쳐버린다. 이 광기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의 저 독백은 한 편의 시처럼 읽힌다.

 

나는 9급 관리이다. 9급 관리가 되었을까? 어쩌면 나는 백작이나 장군인데, 다만 9급 관리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아마 나 자신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고 있을 거다. 사실 역사에도 그런 예가 얼마든지 있다. (중략) 어떤 평민이나 농부가 어쩌다가 그 신분이 드러나 갑자기 어떤 귀족이나 황제라는 것이 밝혀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중략) 나도 당장에 총독에 임명되거나 경리 국장이나 그 밖의 어떤 관직을 받지 않을까? 내가 왜 9급 관리인지 알고 싶지 않을까? 다시 말해 내가 9급 관리인 이유가 뭘까?(121-122)

 

뽀쁘리시친은 정체성이라는 화두를 붙든 채 자신의 광기의 궤적을 고스란히 추적할 만큼 뛰어난 시적인 능력을 지녔다. 그럼에도 그의 실존적 고뇌와 그 저변에 깔린 속물스러움의 충돌은 가히, 미학적 충격에 가깝다.

 

(참 고골스럽게 생겼지요? ^^;;)

 

 

초상화의 주인공 차르뜨꼬프도 현실 법칙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우연찮게 구입한 초상화 속의 인물이 떨어뜨린 돈으로 그는 양복, 향수, 오페라글라스 등을 사고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고급 음식과 샴페인을 주문한다. 예술이라는 이름하에 이 가난한 청년이 억눌러왔던 속물적인 욕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보여주는 안쓰러운 대목이다. 순수한 열정의 화신조차도 결코 완전히 죽일 수는 없었던 내 안의 악마, 그것의 이름이 바로 속물성이다.

 

 

 

 

 

 

 

 

 

 

 

 

 

 

 

고골은 인간 본연의 속물성을 종교를 통해 극복하려 한다. 자기가 그린 초상화가 많은 사람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렸음을 통감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평생을 속죄하며 산 성상화가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의 벽 안에서 순결함과 고고함을 유지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도 않거니와 숫제 무의미하다. 인생의 문제는 항상 홍진에 묻힌 세상에서 생겨나되, 우리는 그것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딜레마가 결국 고골을 광기로 몰아간다.

 

 

 

 

(나보코프는 고골을 가장 잘 읽어낸 작가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좀 얇긴 하지만  고골론을 썼습니다.)

 

 

 

 

 

 

 

고골의 소설가적 재능은 예민한 코와 왕성한 위장에 있었다. 러시아문단이 낭만주의의 끝물을 붙잡고 있을 무렵, 그는 잘 먹고 잘 살자는, 절대 죄스러울 것 없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에 주의를 기울인 최초의 작가였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초월성도 담보하지 못하는 이 허망한 욕망을 혹독히 단죄하고자 했다. 속물스러운 가치를 탐했던 그의 주인공들은 실제로건 은유적으로건 모두, 죽는다. 한편, 소설 바깥에서 고골은 자기 자신을 단죄한다. 말년에 이르러 종교에 심취한 그는 기괴한 단식을 감행, 포도주 몇 방울로 연명하다가 굶어죽는다. 서른 살만 돼도 다들 웬만큼 타협하게 되는 속물스러움에 고골은 왜 그토록 큰 우수를 느꼈던 것일까. 누구보다 타인을 배려할 줄 알았던 그가 자신의 평범한주인공들에겐 왜 그토록 혹독했던 것일까. 그러게, 고골은 수수께끼란 말이다.

 

-- <네이버캐스트>

 

-- 언제부터인가 이 학기가 마지막 학기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이란 말을 조롱하고 있지만, 이번이야말로 진짜 '마지막'이다, 라고 단언하는 이유는 운을 맞추기 위해서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나의 대학 입학년도에 들어 있는 끝자리 숫자(-3)가 이십년을 흘러흘러 다시 끝자리에  왔기 때문이다. ~~~ 뭐, 개강과 더불어 이런 말이 주저리주저리 나오는 와중에 고골을 잠시 떠올려 봅니다. 그의 딜레마와 광기에 대해 제법 많이 생각했는데(즉 두 편의 논문을 썼는데) 결국에는 다 나의 문제를 거기다가 투사했던 것 같습니다. 뭐, 다 좋지만, 특히, 인용한 포프리쉰(뽀쁘리시친)의 말은 최근 들어, 더 귓전에 맴도는군요...!

(일리야 레핀이 1870년에 그린 포프리쉰(뽀쁘리시친), 이랍니다. 처음 보는데, 좋군요!)

 

여하튼. 환상과 괴기 역시 단지 기법이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라, 작가별로 그 양상이 다르고 각기 자기만의 방식으로 '참을 수 없는 현실-실제의 무거움'(!)을 담아냅니다. 가령, 이런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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