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세상, 한 판 붙어보자

- 발자크, <고리오 영감>

 

 

 

 

세계문학사는 발자크를 소설의 교과서로 정의했다. 근대, 자본주의, 대도시, 속물들, 야망에 찬 청년, 전혀 미화되지 않은 날 것의 삶. 이 모든 것이 <고리오 영감>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장황하게 묘사되는 보케르 부인의 고급 하숙집의 풍경은 마냥 비루한, 하지만 그렇기에 진실한 우리 삶의 축소판 같다.

 

끝으로, 그곳에는 시적인 데라곤 전혀 없는 가난이 있다. 더 이를 데 없이 궁핍하고 넝마 같은 가난이 도사리고 있다. 그 가난은 진흙이 묻지 않았다 해도 얼룩이 지고, 구멍이나 누더기가 없더라도 곧 썩어 넘어질 지경이었다.(14)

 

이 하숙집에 고리오 영감, 보트랭(자크 콜랭), 빅토린 타페이유, ‘할멈노처녀 미쇼노 양, 으젠느 드 라스티냐크 등 일곱 명의 하숙인이 산다. 이들 중 라스티냐크는 청운의 꿈을 안고 이제 막 파리로 상경한 법대생이다. 근대화가 한창 진행되던 시절 우리의 청년들이 그러했듯, 그가 가진 것이라곤 머리와 야망밖에 없다. 하지만 당장 그를 끌어당기는 것은 두툼한 법전이 가득 찬 도서관이 아니라 현란한 세속적 불빛이 번득이는 파리의 사교계이다. 그곳을 드나들던 그는 고리오 영감의 작은딸인 델핀 드 뉘싱겐의 연인이 된다. 19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도식적 틀에서 부각되는 것은, 그러나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연애가 아니다. <고리오 영감>의 관심사는 첫째, 라스티냐크의 눈을 통해 포착한 인간 본연의 속물스러움을, 둘째, 그 속물스러운 세계와 마주하여 그가 겪는 내적인 운동성을 보여주는 데 있다.

 

 

 

 

 

 

 

 

 

 

 

 

 

 

고리오 영감은 두 딸의 행복을 위해 제분업으로 모은 재산을 거의 다 써버리고 마지막 남은 은그릇마저 부수어서 내다 판다. 작가의 비유를 빌자면 개의 성격에서 볼 수 있는 숭고한 경지에까지 도달한 부성애가 곧 그의 실존이다. 하지만 두 딸은 아비를 자기 집에 들이지도 않고 돈이 필요할 때만(가령, 무도회에 필요한 드레스를 마련하기 위해) 아비를 찾는다. 아비가 졸도하여 생사를 헤매고 있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을뿐더러 장례비도 대주지 않는다. 이 고리오 부녀의 얘기는 라스티냐크의 눈에 비친 파리 풍속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이기도 하다.

 

세상은 시적인 데라곤 하나도 없이 시종일관 속되고 치사하다. 여기서 라스티냐크의 목표는 단 하나,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알쏭달쏭한 세상이라는 책을 정복하고 출세하는 것뿐이다. 보트랭은 그 나름의 처세술을 설파하며 청년을 길들인다.

 

자네는 보세앙 사촌 집에 가서 사치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를 이미 맡았네. 자네는 고리오 영감 딸인 레스토 부인 집에 가서 파리 여성의 냄새를 맡았어. 그날 자네는 이마에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단어를 적어서 돌아왔네. 그 단어란 <출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출세해야 한다는 것이었네. 브라보! () 출세하기 위해서 자네가 해야 할 노력과 필사적 싸움이 어떤가를 판단해 보게.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거미들처럼 자네들은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네. 왜냐하면 좋은 자리가 오만 개밖에 없기 때문이야. 이곳 파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출세하는가를 알고 있나? 천재성을 떨치든지 아니면 능수능란하게 타락해야 하네. 사회 집단 속으로 대포알처럼 뚫고 들어가거나 페스트균처럼 스며들어 가야 하네. 정직이란 아무 소용이 없네.”(147-148)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이 현실 앞에서 청년은 고민한다. 그의 분류법에 따라 복종(귀찮다), 투쟁(불확실하다), 반항(불가능하다)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청춘 시절에 흘려야 할 마지막 눈물을고리오 영감의 무덤에 묻은 뒤 등불이 빛나는 파리를 내려다보며 그는 이렇게 외친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396)

 

그 대결의 첫 행동은 아비의 죽음을 나 몰라라했던 뉘싱겐 부인 댁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스티냐크는 체포되는 순간까지 도도함을 잃지 않았던 도형수 보트랭의 방식(반항) 대신에 복종이나 투쟁의 길을 선택한 것일까. 어떻든 이로써 순수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과연, 이 소설의 결말은 언제 봐도 불편한 구석이 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초점을 라스티냐크에 맞춘 탓이다.

 

 

 

 

 

 

 

 

 

 

 

 

실상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은 고리오 영감이나 라스티냐크 같은 어떤 구체적인 개인도, 파리라는 근대적인 공간도 아니다. 훗날 발자크가 자신의 소설을 모조리 아우르는 제목으로 생각한 인간 희극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이 웃긴 인간 세상이 곧 주인공이다. 발자크 자신도 평생을 그야말로 웃긴 속물로 살았다. 그러나 어떤 속물도 자기 안의 속물스러움과 세상의 속물스러움을 이토록 깊이 꿰뚫어보지 못했고 또 이토록 적나라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준 소설적 진실이 하나 더 있다. 세상이 더럽고 비루할수록 그 세상과 한 판 붙어볼 자유가 소중하다는 것. 설령 그 역시 라스티냐크의 경우처럼 속물스러운 타협의 형태가 될지라도, 그것 없이는 우리의 인생은 결코 어떤 진정성도 확보할 수 없는 것이다.

 

-- 네이버캐스트  

 

-- 오랜만에(그런 것 같은데 아닌가?) 하나 올려 본다.

발자크의 소설은 언제나 지루했고, 지금 읽어도 지루하다. 처음 읽은 건 혜원사판이었지 싶은데 <골짜기의 백합>. 지루한 연애 소설로 기억에 남아 있는데, 주기적으로 읽게 되는 그의 소설들은(<고리오 영감>, <잃어버린 환상>, <나귀 가죽> 등등) 대체로 다 그렇다. 그럼에도(!)  계속 읽는 것은, 저 글의 맨 처음에 썼듯, 그의 소설이 아무리 봐도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교과서가 재미있는 거 봤나. 교과서는 항상 지루하다! 그 지루함을 견디다 보면 더러 재미있는 대목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본들 지루한 건 지루한 거다. 한데, 지루한 소설을 잘 쓰는 작가들이 의외로(?) 전기가 재미있는 경우가 많다. 톨스토이가 대표적. 발자크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소설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는 것이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 덧붙여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형상(즉, 진정한 소설쟁이!)처럼 보이는, 로뎅이 조각한 발자크. 한데 마땅한 이미지가 왜 이리 없냐. 언제가 프랑스 가면 꼭 봐야지...  

 

- 저 동상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이, 볼쇼이 극장 맞은편에 서 있는 마르크스 동상. (발자크와 마르크스(더 정확히 엥겔스)도 뭐, 붙이자면, 못 붙일 건 없다.) 돌에 새겨진 문구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구. 여름에는 좋았지,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진 날, 저거 또 보러 갔다가 얼어죽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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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그 나름 애정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 그러다가 한동안 무시(?)했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을, 아들-딸의 입장이 아닌, 아버지-어머니의 입장에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들-딸의 역할에 덧붙여, 아버지-어머니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황이 됐기 때문에, 오랫동안 던져두었던 이 소설을 다시 꺼냈다고 해야 하나. 암튼.

 

 

 

 

 

 

 

 

 

 

 

 

 

 

 

옛날에는 거의 전적으로 바자로프의 입장에서 읽었던 것 같다. 그의 성격, 사상, 반항, 사랑, 실연, 환멸, 죽음 등등. 어쩌면, 당시로선 너무 촌스럽게(!!!), 궁상과 청승의 복합체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애써 보지 않으려 덮어두었던 아버지-어머니의 모습이 새롭게 보인다. 가령, 3년(?)만에 고향집을, 부모집을 찾아왔다가 고작 사흘을 머물고 매몰차게 떠나는 아들을 보낸 다음, 부모는 이런 대화를 주고 받는다.

 

우릴 버렸어. 우리와 있는 게 답답했던 거야. 이젠 혼자야. 이 손가락처럼 혼자 남았어!”그는 몇 번이나 되뇌었고, 그때마다 집게손가락만 편 한쪽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가 다가와 백발이 성성한 자기 머리를 하얗게 센 남편의 머리에 가져다 대면서 말했다.

바샤, 어쩔 수 없어요! 그애는 매처럼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지만, 우리는 한 구멍 속에 난 버섯처럼 나란히 앉아서 꼼짝하지 않지요. 나만은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당신도 그럴 테지요.”(215-16)

 

그리고,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한데, 바자로프가 죽은 다음, 먼저 보낸 아들의 무덤을 찾아 돌보고 또 흐느끼는 노부부의 모습. 뭐, 여기는 옛날에도 눈시울을 적시며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것인데, 투르게네프 산문시 <거지>(1878)와 윤동주의 <투르게네프의 언덕>(1939년 9월)이 아주 놀라운(!) 대비를 이룬다. 전자는 기본적으로 조화, 상생, 화해, 형제애 등을 역설한다. 어쩜, 모순의 해결이, 이리도 쉬운가! 무척 훈훈한 분위기이다. 한 번 보시라. 번역은 내가 했다.

 

나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늙어빠진 노인 거지 때문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충혈되고 눈물이 고인 두 눈, 푸르스름한 입술, 거칠거칠한 누더기, 불결한 상처…. 오, 가난이 이 불행한 존재를 얼마나 추하게 갉아먹었는가!

그는 나에게 팅팅 부은 불그스름하고 더러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신음했다, 웅얼대며 도움을 청했다.

나는 호주머니를 온통 뒤지기 시작했다…. 지갑도, 시계도 없다, 손수건도 없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거지는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내민 그의 손이 힘없이 흔들리며 떨리고 있었다.

당황한, 곤혹스러워진 나는 떨고 있는 그 더러운 손을 꼭 잡았다….

―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형제. 가진 것이 하나도 없구먼, 그래.

거지는 충혈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퍼런 입술에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싸늘해진 내 손가락을 꼭 쥐었다.

― 뭐가 어때서요, 형제. ― 그가 우물거렸다. ― 이만 해도 고마워요. 이것도 적선인걸요, 형제."

나는 나 역시 나의 형제로부터 적선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면, 윤동주는 우리가 익히 아는, 학사모를 쓴 은은한 미소의 꽃미남의 느낌에 찬물을 확~ 끼얹듯 너무도 냉소적이고 복잡하고 꼬여 있다. 늙은 거지는 소년 거지로, 더욱이 세 명으로 바뀌어 있고, 상황도 정반대. 즉, 아무것도 주고받지 않았음에도 쉽사리 화해에 도달하는 투르게네프-인텔리겐치아와 민중에 비해, 윤동주의 시 속에서는 모든 것이 있음에도 소통은 처절하게 결렬된다. 있어도 주지 못하고(줘야 되나, 주는 게 낫나, 줄 수 있나 등등), 또, 아무것도 없음에도 딱히 뭘 받으려 하지도 않는 거지 소년 셋. 새삼스레, 니가 정말 시인이구나!, 하는 감탄을 내질러본다. 과연 '수치'의 시인.  하여간 놀랍다!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 그때 세 少年(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 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 짝 等(등) 廢物(폐물)이 가득하였다. /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充血(충혈)된 눈, / 色(색) 잃어 푸르스름한 입술,

너덜너덜한 襤褸(남루), 찢겨진 맨발. / 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少年(소년)들을 삼키었느냐! / 나는 惻隱(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 두툼한 지갑, 時計(시계), 손수건…… 있을 건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勇氣(용기)는 없었다. / 손으로 만지작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多情(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充血(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相關(상관)없다는 듯이

自己(자기)네끼리 소곤소곤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黃昏(황혼)이 밀려들 뿐 ―

 

 

다시 앞으로. 비도 주룩주룩 내리니, 눅눅한 소설이 나쁘지 않다. 고전은 고전인지라, 도키, 톨스토이, 투르-프로 이루어진 트로이카는 이미 망가진 것 같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여전히 일독의 가치가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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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전체를 놓고 볼 때 라스콜니코프와 그의 사상을 패러디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스비드리가일로프이다(루쥔과 레베쟈트니코프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그가 그 특유의 음습한 아이러니와 냉소가 담긴 어조로 말하듯, 라스콜니코프의 사상이란 그저 그런 이론에 불과하고 대체로 이론이란 그놈이 다 그놈”(6, ?)이다. 그의 나폴레옹 숭배도 냉소적으로 속화되고 희화되거나 심지어 원래 그런 사상이었음이 폭로된다. 한편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 자체로 극히 완성도가 높은 인물로서 라스콜니코프의 이상적 낭만주의(‘실러’) 이후의 단계인 환멸적 낭만주의를 구현한다. 청춘 이후의 시간, 말하자면 시간적인 뒷골목을 보여준다고 할까. ()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환영 얘기 끝에 그가 피력하는 독특한 내세관(거미줄이 쳐진 시커먼 시골 목욕탕의 모습을 한 저 세계)에서는 허무주의의 극단이 엿보인다. 과연 그의 말대로 그와 라스콜니코프 사이에는 동질성이 존재한다. 그를, 분신을 죽임으로써 작가는 영웅-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를 살린다. 이를 위해 어둠-죽음’(스비드리가일로프)의 맞은편에 -’(포르피리, 소냐)을 마련해놓은 것이기도 하다.

 

 

포르피리는 문제의 사건을 맡았을 때부터 라스콜니코프에게 혐의를 두었으며 나중에는 결정적인 단서(그것이 무엇인지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까지 확보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오히려 라스콜니코프의 실질적인 구원자가 된다. ‘양날의 칼을 휘두르며 쥐를 갖고 노는 고양이처럼 라스콜니코프를 괴롭힌 것은 정녕 기법-수법’(심리전)이었던 것이다. 용의자의 하숙방에 살짝들러 에잇, 삶을 하찮게 여기지 마십시오!”(6, ?)라고 말하며 자수를 권하는 예심판사! 서른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볼 장 다 본 노인처럼 구는, 골초에 치질로 고생하는 이 뚱뚱한 예심판사가 작가의 대변자로 나서는 것이다. “() 이론을 생각해냈으나 영 틀어져버려서, 영 독창적이지 못한 놈이 나와 버려서 창피스러웠겠죠! () 생각은 그만 하고 곧장 삶에 몸을 내맡기십시오. () 저는 그저 선생의 앞날이 창창하다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6, ?.) 포르피리와 접촉을 통해서 라스콜니코프의 몽상과 시험은 이론(사상)의 차원에서 실제(), 아니 생존의 차원으로 이월한다.

 

 

(라스-프를 그린 건데, 정말 후덜덜...ㅠ.ㅠ / A.N. Korsakova.) 

 

 

 

소냐 마르멜라도바에 관한 한, 라스콜니코프는 그녀를 직접 보기 전부터 그녀에게 막연한 끌림을 느낀다. 동질감 때문이다. 그녀와 대면하게 됐을 때 그는 결국 당신도 똑같은 짓을 한 셈이잖아? 당신도 역시 넘어섰으니까넘어설 수 있었으니까.”(4, ?)라고 말한다. 그들은 세계의 부조리에 대해 맞서는 태도는 달랐지만(겸허한 수용 대 오만한 반역, 이타주의 대 이기주의) 어쨌거나 넘어섬으로써 공히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여하튼 삶-생명을 파멸시키고 카인의 표식을 달게 된다. 죄의 체험과 그 인식이 두 청춘을 엮어주는 절망의 친화력으로 작용한다. 한데 6부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소냐의 시선이 최후의 심판의 주체이자 용서의 주체인 신의 시선으로 대체되는 듯하다. 라스콜니코프의 마지막 말(바로 제가 그때 관리 미망인인 노파와 그 여동생 리자베타를 도끼로 살해하고 금품을 훔쳤습니다.” 6, ?)자수이면서 동시에 고해성사이기도 하다. 이렇게 고매한 살인자성스러운 매춘부의 결합이 상당히 종교적인 차원에서 실현된다. 하지만 소설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

 

(M. S. Shemyakin.) 

 

 

라스콜니코프는 정말로 공기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포르피리와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입을 빌려 이 점을 강조한 작가는 에필로그에 이르러 한여름의 페테르부르크 대신 한겨울의 시베리아를 자신의 젊은 주인공에게 선사한다. 이 연옥의 시공간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와병 중에 꿈을 꾼다. 인류가 일종의 선모충(旋毛蟲)에 감염되어 자멸의 길을 걷는다는 내용인데, 이로써 그의 사상의 맹점이 드러남과 동시에 부활의 가능성이 암시된다. 병에서 회복된 라스콜니코프와 소냐가 이른 아침에 강기슭에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도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을 두고 작가는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는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나야 했다.”(에필로그, ?)라고 썼다. 변증법 대 삶이라는 이분법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적 사유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변증법, 즉 라스콜니코프의 이념은 뒤로 물러섰을 뿐, 삶에 의해 기각된 것이 아니다. 이론이란 오직 그와 똑같은 층위의 어떤 것에 의해서만 지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에서 부정되는 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일 뿐, 이론은 희화되고 속화된 채로 고스란히 주인공의 삶의 저편으로 넘겨진다. 그렇다면 변증법 대신에 삶은 결과라기보다는 두 인물 앞에 놓인 과제에 가깝다. 작가의 의도를 좇자면 지금까지 <죄와 벌>을 지탱해온 이념의 변증법삶의 변증법으로 치환되고 나아가 진정으로 죄를 통한 구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소냐가 가져다 준 복음서는 그 상징이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에필로그에서도 라스콜니코프가 성경책을 펼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로써 근대적 주인공의 방황 이후의 풍경(갱생과 부활을 담은 새로운 이야기) 역시 <죄와 벌>의 바깥으로 넘겨진다.

 

결국 인물은 물론이거니와 작가적 차원에서도 넘어섬은 완료되지 못했다. 하지만 󰡔죄와 벌󰡕이 매력적인 것은 인물이든 작가든 그들 스스로 설정한 특정한 ’(혹은 ’)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의지 사이의 긴장 때문이다. 작가는 스비드리가일로프 절망, 가장 냉소적인. / 소냐 희망, 가장 실현 불가능한.”(󰡔죄와 벌󰡕 작가 노트)이라는 메모를 남겼다. 라스콜니코프의 몽상과 환멸은 이 양극단의 팽팽한 줄다리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강렬한 소설에 싱거운 사족처럼 붙은 에필로그와 영원히 쓰이지 못한 후속편도 마찬가지인데, 근대의 미망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성의 광기영성으로써 극복하려는 의지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이끌고 가는 보이지 않는 원동력인 것이다.

 

* * *

 

번역 과정에서 몇 종의 영역본, 불역본, 일역본, 기존의 국역본들을 두루 참조하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흔히 라스콜니코프의 사상을 (좀 더 뒤에 나올 니체의 사상과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초인사상이라 부르지만 초인, ‘초인사상도 <죄와 벌>에는 언급되지 않는 단어이다. ‘비범인(非凡人) 사상이라는 말도 포르피리와 라스콜니코프가 후자의 논문 <범죄론>을 논하며 사용하는 개념을 토대로 만들어진 조어이다. 한데 기존의 국역본에서 범인’(凡人)비범인으로 옮겨진 러시아어 단어는 각각 평범한 사람()’비범한 사람()’으로 옮겼다. 원어 자체도 극히 평범한 것이거니와 라스콜니코프의 사상 역시 진부할 정도로 평범한 것, 바로 이것이 그의 절망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이 부분에서 나폴레옹, 마호메트, 리쿠르고스와 함께 비범한 사람의 예로 언급되는 또 다른 인물은 기존의 국역본에서 잘못 옮긴 솔로몬이 아니라 솔론이다.

(...) 

* * *

 

여러 말이 필요 없다. <죄와 벌>은 모든 소년소녀의 로망이었다. 소년소녀의 머릿속에 생각에 대한 생각, 즉 삶과 관념 사이의 틈새가 생겨날 때 라스콜()니코프는 그 자체로 인간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길고도 기괴한 이름은 소설가의 동의어였고 <죄와 벌>은 소설-문학의 동의어였다.

2004년 초, 러시아에서 아카데미판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구입하자마자 제일 먼저 펼쳐든 책은 물론, <죄와 벌>이었다. 해빙의 봄이, 이어 백야의 여름이 오기까지 매일매일 수험생처럼 <죄와 벌>을 읽어갔고 그와 나란히 <죄와 벌>을 패러디하는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을 출간하지는 못했으나 그렇게 읽고 쓰면서 한 시절을 살아냈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죄와 벌> 번역을 맡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번역을 하는 동안 뜻밖에도 더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됐다(...)  최선을 다했고, 현재로서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번역이다. (...) 

 

-- 끝.

 

'철완 아톰'으로 유명한 데츠카 오사무가 각색하고 그린 <죄와 벌>의 일부. 역시 대가(!)임을 보여줍니다! (썩 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조용필의 <바운스>가 싸이의 <잰틀맨> 만큼의, 심지어 그걸 능가하는 인기를 누리는 것처럼. 흠, 쓰고 나서 봐도, 적절한 비유는 아님..-_-;;) 대학 시절 연극도 했었다는군요. 흠, 그가 맡은 역은 뜻밖에도(!) 칠쟁이 미콜카였다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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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죄와 벌>: 라스콜니코프의 몽상과 환멸 -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다

 

1860년대 후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초의 페테르부르크. 저녁 7시가 지난 시각, 한 청년이 도끼로 전당포 노파를 죽인다. 거의 그 직후에 귀가한 노파의 이복여동생 리자베타마저 죽인다. 그제야 청년은 자신이 첫 번째 범행을 저지르는 동안 문을 잠가 놓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가 걸쇠를 걸기가 무섭게 노파의 지인 두 명이 차례로 나타난다. 그들은 집안에 사람이 있으면서도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임을 알아차리고는 나름의 대책을 강구한다. 그러다 그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아주 짧은 틈에 청년은 노파의 아파트를 빠져나간다. 도중에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과 마주칠 뻔하지만, 마침 열려 있던 텅 빈 아파트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가(그때 훔친 금품 하나를 떨어뜨리고 그것을 나중에 칠장이 니콜라이가 줍게 된다) 적시에 밖으로 나온다. 그러고는 하숙방으로 돌아가 거의 기절하다시피 쓰러진다.

 

이것이 <죄와 벌>1부의 줄거리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독자는 문제의 청년, 즉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니코프가 대학에 다녔으나 경제적인 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을 뿐더러 하숙비가 밀려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 3년간 떨어져 있던 어머니와 여동생이 조만간 페테르부르크에 올 것이며 그에 앞서 여동생의 약혼자인 루쥔이 그를 방문하리라는 것 등을 알게 된다. 노파의 전당포를 방문한 직후 우연히 허름한 술집에 들렀다가 만난 마르멜라도프와 그의 가족(특히 황색 감찰을 갖고 사는 소냐)도 흥미를 자극한다. 어떻든 소설이 막 시작된 시점에서 핵심적인 사건, 즉 누가 누구를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였는지가 모조리 알려졌다. 따라서 소설적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여느 범죄소설과는 다소 다르게 범행의 동기(‘’)와 그 귀추이다. 실제로 총 6부와 에필로그로 구성된 이 소설의 나머지 부분은 관처럼 비좁고 갑갑한 하숙방(지하!)에 스스로를 감금하고 자기만의 몽상에 탐닉하다가 기어코 거리(지상!)로 나와 그 일을 감행하고 그로써 선악의 피안을 넘어선(러시아어에서 넘어서다라는 동사는 범죄라는 명사와 어근이 같다.) 한 청춘이 겪는 환멸과 좌절의 기록이다. 도무지 왜 죽였는가? 물론 어떤 근거나 목적이 있으면 사람을 죽일 수 있거나 죽여도 된다는 생각 자체가 작가가 가장 경계한, 정녕 죄스러운 것이라는 전제 하에 라스콜니코프의 죄와 벌을 둘러싼 일련의 정황을 짚어보자.

 

 

 

 

 

 

 

 

 

 

 

 

 

 

우선 라스콜니코프의 사회적 입지가 주목을 요한다. 그는 단기적으론 학업을 위해, 장기적으론 입신출세를 위해 페테르부르크에 온 지방 출신의 명문대 학생, 더군다나 법학도이다. 그의 동선은 중심(대도시의 번화가, 상류층-귀족)과 주변(대도시의 빈민굴, 하류층-민중)을 아우를 법하지만 대체로 후자에 더 집중된다. 어떤 수사를 갖다 붙이든, 또 아무리 호기를 부려 봐도 가난에 짓눌려 주눅이 든 것도 사실이다. 덧붙여 그가 가장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가족의 희망임을 상기하자. , 그의 몽상에는 앞으로의 성공을 위한 토대를 마련함과 동시에 가족의 희생에 보답하고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하는 장자 콤플렉스가 깔려 있다. 계급의식(라스콜니코프는 잡계급에 속한다)도 제법 엿보인다. 그렇다면 라스콜니코프의 범행은 생계형 범죄인가. 

 

(러시아 티브이 시리즈 <죄와 벌>.)

 

 스물세 살의 청년이(더군다나 그는 대학생씩이나 된다!) 육십 대의 전당포 노파와 삼십대 중반의 지적 장애 여성을 살해하고 금품을 빼앗은 흉악 범죄에 이른바 메시아 콤플렉스가 개입돼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 그의 첫 번째 꿈이 여러 모로 상징적이다. 어린 로쟈는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의 추도 미사에 다녀오는 길에 술 취한 남자들이 허약한 암말을 채찍으로 휘갈기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연민에 사로잡힌다. 암말(약자)을 구원하려는 소년 로쟈와 그 일을 감행하려는 청년 로지온 사이에 묘한 유비 관계가 형성된다. 한데 전자는 간절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말을 죽음에서 구하지 못하고(결과만 놓고 보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로쟈의 아버지와 비슷해진다) 후자는 구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살인을 정당화하려 한다(결국 폭력을 즐기는 술 취한 남자들과 다를 바 없어진다). 이런 모순을 명민한 라스콜니코프가 몰랐을까. [] 꿈을 꾼 직후, 즉 범행 전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를 연상시키는 기도를 읊조린다. ‘주여! () 저에게 저의 길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저 빌어먹을저의 몽상을 단념하겠습니다!’(1, ?) 그러나 단념은커녕 이튿날 일종의 환시(사막의 오아시스)를 보자마자 곧장 방을 뛰쳐나가 몽상을 실행에 옮긴다

 

(60년대(?) 영화 <죄와 벌>의 라스-프. 대학생은 고사하고 지도교수라고 해도 믿을 노안..ㅠ.ㅠ)

 

라스콜니코프에게 가장 어려운, 더 정확히, 가장 하기 싫은 일은 자기기만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리라. 핍박받는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능력과 자격을 갖춘 메시아가 되는 것, 혹은 그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이 문제였으며 결과적으로 그 일은 오만한 자기중심주의와 자폐적인 선민의식의 산물이었다는 것. 소냐를 앞에 두고 그는 광적인 어조로 고백한다. 나는 그냥 죽였어. 나 자신을 위해, 나 하나만을 위해 죽인 거야. () 나는 그때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이에 불과한지, 아니면 인간인지를 알아야만 했어, 그것도 어서 빨리 알아야만 했지. , 내가 넘어설 수 있는지, 아니면 그럴 수 없는지를!”(5, ?.) 3부에서 얘기되는 라스콜니코프의 논문을 참조한다면 자기와 비슷한 존재를 생산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재료’)인가, 아니면 새로운 말을 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장애물을 발견하면 과감하게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비범한 사람인가. 간단히, 나폴레옹인가, 그냥 이[]인가. 그 답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과연 나폴레옹이 노파의 침대 밑으로 기어”(3, ?) 들겠는가. 이렇게 미학에 사로잡힌 그는 스스로를 조롱조로 미학적 이[]”(3, ?)라고 부르기에 이른다. 하지만 미학만이 문제인가.

 

(BBC판 <죄와 벌>. 도..키에 대한 오마주가 아니라 희화로 여겨질 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음..-_-;;) 

 

라스콜니코프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절대 자신의 범죄를 뉘우치지 않는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시종일관 판단 착오로 인해 주제넘게 (자기에게는 있지도 않은!) ‘넘어섬의 권리를 행사하려 들었다는 사실이다. 범행 이후에 꾸는 꿈에서 조롱당하는 것도 일차적으론 바로 이 오류이다. 꿈속에서 그는 여전히 도끼를 내리치지만 노파는 죽지도 않을뿐더러 키득키득 웃고 있으며 심지어 그 모습을 감추려고 몸을 최대한 수그린다. 그 주변으로 구경꾼들까지 몰려들어 수군대며 그를 비웃는다. 범행이 완료된 순간부터 그를 괴롭힌 미학적 수치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여기서 미학적 수치는 윤리적 수치와 하나가 된다. 리자베타가 그 절절한 몸짓과 표정을 통해 상처 받을 가능성을 지닌 타자의 얼굴(레비나스)로 나타났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혹은 그럴 수 없었다!). 비웃음으로 무장한 불멸의 노파와 타자들은 그런 자신에 대한 단죄로 읽히기도 한다. 스스로를 나폴레옹으로 내세우며 장애물을 당당히 처리한 자,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도 () 창백한 천사처럼 거리를 활보”(6, ?)한 자에게 내려진 가장 참담한 선고는 너는 나쁜 놈이야!’가 아니라 너는 웃긴 놈이야!’가 아니겠는가. 백야의 미망에서 깨어난 라스콜니코프를 기다리는 것은 더 참담한 희화, 즉 타자와의 대면이다. 애초 1인칭 소설로 구상되어 일정 부분 그렇게 쓰였던 작품이 현재와 같은 3인칭 소설로 바뀐 이유 중 하나도 주인공의 바깥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계속...)

 

- 민음사판 <죄와 벌> 역자 해설.

 

-- <죄와 벌> 수업을 하다보니 이 소설을 내 맘대로(요즘은 더 그런 것 같은데) 읽으면서 열에 들떠 있던  십대 시절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렇게 쓰고 보니, 차라리 이런 떠올림을 위해 이 소설을 또다시 읽는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러나저러나 마흔을 코앞에 둔 내가 한 시절 '구덩이 오막살이' 구석에서 끼고 살았던 <죄와벌>을 다시 펴보는 심사는, 뭐, 제법, 야릇하다. 정확히, 그 때 그 책은 아닌데, 아무튼 그 책은  빨간 불꽃이 이글거리는 촌스럽지만, 그 당시로선 무척 강렬하게 여겨졌던 <글방문고>판, 글자포인트가 작아서 정말이지 깨알 같은 문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던 <죄와 벌>이었다. 한데 그 책이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 사실을 알고서 무척 쪽팔렸던(-_-;;) 기억이 있다. 아니, 그렇게 소중한(-그렇다고 떠벌린) 책을 잃어버리다니!

아무튼 역자는 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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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소송>에 관한 14매짜리 원고를 보낸 다음, 바쁜(혹은 그런 척 하는, 그런데 척, 하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되기도 하는) 일상의 와중에 주저리주저리 잡담을 써본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9)

 

이렇게 시작되는 당혹스러운 소설. 한때는 <심판>이었다. <실종자>(<아메리카>), <성>과 함께 '고독 삼부작'이라 불린다.(그렇다고 한다.) 실제로, 이건 너무나 고독한(!) 소설이다. 뭐랄까. 이걸 쓰는 작가가 얼마나 고독했을지, 그 고독이 거듭, 이 소설을 읽는 독자인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고독한 원의 고독한 중심"(!) 고독뿐이냐.

 

이런 구토도 있다. 이 사법기관의 내부도 그 외부만큼이나 역겨운 모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에서였다. 그런데 그의 이런 추측은 옳은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파고들고 싶지 않았고,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이 답답했다.”(92) 그리하여, 두 번째로 법정을 찾았던 K는 힘겹게 건물을 빠져나가며 배멀미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어마어마한 구토(!)이다. 복도가 좌우로 흔들리고, 파도소리가 들리고 물이 덮쳐올 것 같다. 그러다 마침내 벽이 갈라지면서 바람이 들어온다. 드디어 탈출! 흡사 <큐브>의 한 장면 같다.

 

과연 탈출이냐. 힘겨운 탈출 끝에 마주한 바깥 세계(일상!)야말로 더 심한 욕지기를 불러일으킨다면...? 적어도, 이 경이로운 소설의 결말, 마지막 부분은 정녕 '개 같은 실존'을 그야말로 카프카식으로(달리 표현할 수가 없고나!) 보여준다.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판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가 아직 이르지 못한 상급 법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두 손을 쳐들고 손가락을 쫙 펼쳤다. / 그러나 K의 목에 한 남자의 양손이 놓이더니 동시에 다른 남자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고 두 번 돌렸다. K는 흐려져가는 눈으로 두 남자가 바로 자기 눈앞에서 서로 뺨을 맞대고서 최종 판결을 지켜보는 것을 보았다. ”개 같군!“ 그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287)

 

진정한 희극은, 칼날이 목전에 왔는데도 '희망'이라는 괴물의 꼬리를 붙잡아보려는(그것도 너무 무성의하고 부실하게?!!) K의 태도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어쩌랴. 존재와 존재함 자체가 '죄'인 것을. 그렇기에 더더욱, 대성당, 법원 소속 신부 앞에서 무죄를 역설하는 K의 절규가 안타깝게 들린다. 안타까우면서도, 다시금, 또 웃긴다!  쿤데라의 표현을 빌자면, "농담의 검은 밑바닥"이 보일 것 같단 말이지.

 

뭔가 잘못된 겁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인간입니다.”(264)

 

이 지점에서 정녕 웃어야 하는데, 쉽지 않고나.

<소송>의 첫 장을 낭독했을 때 다들 즐거워했단다. 실제로 <체포>는 좀 많이 웃긴다. <첫 심리>, <태형리>도 그렇고, 나는 그놈의 숙부(카를-알베르트, 이름도 왔다가 갔다 한다)가 왜 그리 웃기냐. 그의 호들갑은, 말하자면, 무척 조건화돼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조건화된 웃음을 웃어줘야 할 의무가 좀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좀 웃기기도 하다. 웃음에도 의무가 있다니, 원. 횡설수설.

 

강조하건대, 이건 잡설이라... 언젠가 다시금 <성> 안으로 깊이 침투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흠, 그 역시 새로운 패배(!)로 이어질 터. 이런 정황을 꼬집는 같은 신부의 말. 도무지 매혹되지 않을 수 없는 '성담'인 <법 앞에서>('기만'!)에 붙어 나오는 말이다.

 

글은 불변하는 것이고, 해석들은 종종 글에 대한 절망의 표현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심지어 문지기야말로 기만을 당한 자라는 의견까지 있어요.”(273)

 

 

절망! 절망하기에, 또 쓴다. 하필, 지금 내가 바쁜 건, 아니, 바쁜 척 하는 건, 나보코프의 <절망>에 대해 쓰고 있기 때문이니, 이 역시 운율이 맞는다. 운율은 맞는데, 글의 아귀는 왜 이리 맞냐. 영원히 짜이지 못하는 엉성한 플롯, 구멍이 숭숭 나 있는 음모처럼. 에라잇.  

 

보지 못해 유감인데, 오손 웰스가 만든 <소송>의 한 장면. 앤서니 퍼킨스가 K역을 맡았다. 그럼, 오손 웰스는? 변호사 홀트 박사 역이라 한다. 보아하니, <첫 심리> 장면인 듯. 

 

 

 나보코프의 <처형장으로의 초대>와 비슷. 나보코프의 작품이 카프카의 영향을 받았다는 혐의(?)가 제법 설득력 있다, 나보코프는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뭐, 여하튼, 나의 취향은, 아무래도 타고난 천재에 가까운 나보코프 보다야, 소설 쓰느라 죽도록 고생하고 그 핑계 대고서 장가도 못 간(혹은 안 간) 카프카 쪽이다. 실은 <소송>도 펠리체 바우어와 파혼한 사건(아닌 사건-_-;;)이 제법 자극이 됐던 듯하다. 겸사겸사, 펠리체 바우어의 남성스러운(?) 외모란. 카프카의 취향의 독특함을 증명해준다 ㅎㅎ

 

카프카가 도...키를 좋아한 것도 제법 유명하다. 특히 격찬한 건, 당근, <카라마조프.> 이거 번역한 건 (<죄와 벌> 번역과 더불어) 내가 삼십대에 한 일 중 제일 잘 한 일이다, 진짜로.

 

 

 

 

 

 

 

 

 

 

 

 

 

 

 

 

 

둘의 소설 세계가 너무 다르니(혹은 달라 보이니), 처음엔 놀랄 법도 하다. 도..키는 타고난 이야기꾼이고, 카프카는 어쨌거나 '학문적인'(!) 작가다. 그럼에도 좋아한 건 좋아한 건데, 작가마다 다 자기만의 조그만 모퉁이(!)가 있는 듯하다. 그 모퉁이가 그토록 수치스러웠던 것이냐. 왜 원고를 불태우라고 했나. 자기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고골은 눈물을 흘리며(!!) 직접 불태웠는데... 흠. 흠. 흠. 레핀의 그림 속 고골은, 그러나, 은근히 희극적으로 보인단 말이지. 내가 꼬롬한건가..? 아니아니, 진정한 고뇌는 왠지 저럴 것 같단 말씀.

 

 

 

 

아무튼. 어느 날 생각했는데, 카프카는 정녕 불멸(!)의 욕구가 강했던 것 같기도 하다.  심드렁(!)의 포즈(포스, 인가?) 밑에 감춰진 어마어마한 야망의 덩어리. '단식'의 형식 속에 포함된 '포식'의 욕구. 웃음-광대의 내부에 도사린 비극의 무게.

 

주저리주저리.  어느 순간 왕창 어긋난 인생(=시간)의 돌쩌귀가 다시 맞춰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 그럼, 어긋남 자체를 그냥 받아들이자, 이 말씀. 자, 그럼, 다시 <절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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