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보다 길어진 <고슴도치> 연재를 마친다.

 

성장소설(가족소설)을 쓰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 2007년 여름 오랜만에 고향에 다녀왔고, 우리 가족이 살았던 부산의 여러 동네를 아버지와 함께 순례했다. 나름 절치부심 끝에 두툼한 소설을 썼지만 참혹할 만큼 형편없는 놈이 나왔다. 그 다음에 썼던 소설에는, 딱히 성장소설이 아니었음에도, ‘성장소설의 매혹이라는 이름을 붙여보기도 했다. 언젠가 살릴 수 있길 바라며 통째로 버린 그 원고들 대신 <고슴도치>를 완성했다. 동화의 문법을 빌렸는데, 아니, 동화를 쓴다고 생각하고 썼는데, 쓰고 보니 동화가 아니었다. 뿐더러 성장소설에 필수적인 성장이 없는 소설이 나왔다. 말하자면, 걸어도 걸어도, 걸어서 걸어서 제 자리임을 보여주는 소설. 그런 느낌을 안개 속의 고슴도치(노르슈테인)를 처음 봤을 때 받기도 했다.

 

2008년 초, 여동생이 거제도 **리에 있는 초등학교로 발령받았다. 어릴 때처럼 단 둘이 손을 꼭 잡고 에 갔다. 섬마을 선생님이라니. 동생의 학교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1학기를 다닌 거창 **리의 학교와 너무 비슷했다. 학교 뒤쪽으로 넓고 푸른 논밭 대신 넓고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는 것이 달랐을 뿐. ‘구덩이 오막살이를 이어받는 얘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은 유학생활 이후 내 거처가 된 원룸()에서 나왔다. 이듬해에는 추석을 맞아 외갓집이 있는 영도에 갔다. 얼치기 일문학도에서 초등특수교사로 옮아가기 전 동생이 일 년간 근무했던 재활원도 거기 있었다. 덕분에 이야기를 얼추 마감할 수 있었다. 그러고도 미덥지 않아 계속 들었다 놓았다 했는데, 일기장이 기억하는 최종 탈고일은 2011330일이다.

그 사이 영도다리 밑, 점집 한 군데를 찾아간 적이 있다. 내 이름의 한자도 제대로 받아 적지 못하는 점쟁이 할아버지의 점괘가 참, 교과서였다. “마흔이 되면 인생이 전연 달라질 거요.” 전연 달라진다면 그건 인생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자기기만이 없으면 좀처럼 넘기 힘든 것이 인생의 고비()인 것도 맞다.

 

지금보다 조금은 더 많은 선택지를 갖고 있었을 열여덟 살의 나를 잡아다가 족쳐볼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왜 그토록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느냐. 워낙 오래 된 꿈이니까 더 어린 나를 소환하여 추궁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소설 쓰는 나는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원한에 사로잡혀 턱없는 오만함과 궁상맞은 열패감 사이를 오가는 인간, 균형 잡힌 자존감이란 전혀 없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내가 가장 아끼는 나는 소설 쓰는 나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 답인즉, 인생이 걸어서 걸어서 제 자리인 만큼이나, 대놓고 동어반복이다. 나는 소설가니까.

 

철저히 고독만 먹고살며 소설을 쓰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들어줬으면 하는 것이 의 본성, 나아가 이야기(소설)의 본성임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공리적 관점에서는 소설과 같이 올린 세계문학 관련 글들이 오히려 좋은 일을 한 것 같은데, 그렇기에 더더욱 <고슴도치>를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김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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