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토요일 오후, 아파트 근처 복덕방. 그녀, 69년생의 우연이가 나타났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참 예쁘다. 차분하면서도 이지적인 표정과 몸가짐도 눈에 들어온다. 육아와 살림의 최전선에서 연일 참혹한 전투를 치루는 전업주부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선망이 꿈틀댄다.

애기 너무 예쁘네요. 안아 봐도 돼요?”

그녀는 내 표정을 잠시 살핀 다음 건우를 조심스레 안아 올린다.

낯가림도 안 하네요? 어쩜, 웃는 것 좀 봐. 돌 지났어요? 애 키운 지 너무 오래 돼서.”

건우와 달리 아기 때부터 낯가림이 심했던 우진이는 지금도 내 옆에 꼭 붙어서 눈알만 굴린다.

돌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 못 걸어요.”

지희도 그랬잖아? 나중에는 다 잘 걸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새댁.”

일전에 통화한 주인 할머니가 끼어든다. 꾸부정한 허리를 받치고 있는 삭정이처럼 마른 두 다리가 양옆으로 애매하게 벌어져 금방이라도 무너질 기세이다. 살과 뼈를 팔십 여년의 세월에 충실히 헌납했음을 보여주는 얼굴도 새삼스럽다. 주글주글한 얼굴 한가운데로 진분홍색 립스틱이 기세등등하게 굴며 입술의 기를 꺾는다. 그악하고 왁살스러운 노파의 얼굴에서 순간순간 우연이의 모습이 잎사귀에 이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갱신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있을 때 한 남자가 헐레벌떡 복덕방 안으로 들어온다. 삼십대 중반, 배가 둥그렇게 나오다 못해 이제는 옆으로 지긋이 퍼져가는 전형적인 회사원. 양복바지는 접촉 부위마다 주름이 가 있고 그 사이로 반들반들하니 때가 앉아 있고 와이셔츠의 소매는 걷어 올리고 맨 위의 단추 두 개는 풀려 있고 넥타이는 둘둘 말린 채 바지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다. 그리 덥지도 않은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고 고불고불한 머리카락이 땀범벅이 된 관자놀이 주변에 들러붙어 있다.

아빠다!”

아빠, , , !”

두 아이가 듀엣처럼 화음을 넣는다. 정말 감격한 건 오히려 내 쪽이다. 어제 오후에 통영으로 출발한다고 할 때 이미 체념한 터였다. 아빠를 보자 안심이 되는지 우진이가 마침내 입을 연다.

아줌마, 캥거루 나라에서 왔어요?”

? 그런데?”

아줌마, 캥거루 봤어요?”

.”

아줌마, 코알라는 봤어요?”

아니. 코알라는 외곽으로 나가야 볼 수 있거든.”

외곽? 그런 말, 나는 몰라요.”

코알라는 멀리, 숲속이나 야생동물 공원에 산다는 얘기야.”

아줌마가 방실대며 대꾸를 해주자 우진이도 자꾸 질문거리를 생각해낸다.

아줌마, 캥거루 고기 먹어 봤어요? 코알라 고기도 먹을 수 있어요? 동물은 다 고기예요? 아줌마, 미어캣도 거기 살아요?”

우진이의 질문은 천일야화처럼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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