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라벤의 소멸과 함께 다시 출장 인생이 시작됐다. 운전대, 카페인이 다량 함유된 각성제, 고속도로, 휴게소. 내가 팔에 링거를 꽂고 있을 때 남편은 부장, 합천 거래처 사장과 함께 해인사 근처 음식점에서 산채 정식을 먹고 있었다. 같이 나온 자연산 송이버섯의 맛이 일품이었다. 멀찍이 앉아 있던 할머니가 직각으로 굽은 허리를 움직이며 어기적어기적 다가왔다.
“더 먹을라나?”
이번에 나온 송이의 양은 처음 것의 서너 배는 족히 됐다. 구운 송이는 물론 그 물까지 다 받아먹었다. 그러나 나른한 포만감은 계산서 앞에서 경악으로 바뀌었다.
“어, 그거 서비스 아니었어요?”
“젊은 양반들이 미쳤나, 요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노?”
할머니는 직각 허리를 용케 잘 움직이며 천연덕스레 돈을 받아 챙겼다.
<고바우식당>을 나와 노래방으로 향하는 중에도 부장은 계속 투덜댔다.
“촌 인심이라서 후한 줄 알았더니, 무슨 귀곡산장이냐, 꼬부랑 할머니가 우리를 홀린 거잖아, 원. 그나저나 도우미가 있어야겠죠, 사장님?”
부장의 선심에 거래처 사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구에서 불러와야 되는데, 출장비가… 부장님이 내실라우?”
시커먼 노래방 안, 도우미도 없이 시커먼 남자들만 엉거주춤 설쳐대니 분위기도 영 침침했다. 일찌감치 자리를 파한 남편과 부장은 오늘 따라 웬일로 문을 연 인근 여관으로 향했다. 갑자기 사나워진 바람을 타고 굵은 빗방울이 우박처럼 떨어졌다.
<만봉장>. 낡은 4층짜리 건물 옆에는 건물보다 더 낡은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텅 빈 여관을 홀로 지키고 있는 주인의 차였다. 투숙객이 없어 방도 골라잡을 수 있었다.
2층. 문을 열자마자 텔레비전이 눈에 들어왔다. 두툼한 몸체며 목재 틀에 새겨진 ‘Gold Star’라는 문자며 영락없이 골동품이었지만 멀쩡히 잘 나왔다. 남편은 불을 끄고 텔레비전만 켜놓은 채 침대에 누웠다. 장마철에 제대로 말리지 않은 빨래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가득했다. 에어컨은 다이얼을 돌리는 식이었는데, 냉방은 고사하고 제습도 안 됐다. 남편은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창밖의 비바람이 여관방 벽을 뚫고 들어올 기세로 거칠었다. 남편의 눈꺼풀 위로 낡은 여관방의 어둠이 드리워지고 그 위로 간간히 ‘골드 스타’의 불빛이 번득거렸다. 거세고 대범한 비바람 소리와 윙윙대는 잡음 속으로 뭔가 분절적인 말도 들려왔다.
“태풍 볼라벤에 이어 태풍 덴빈이 지금 경상남도 거창을 지나고….”
남편은 아내, 즉 나의 고향이 거창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맞다, 아까 거창을 지나왔지… 참, 아무것도 없는 그런… 촌구석에도 사람들이 살고…. 이런 상념과 함께 의식이 완전히 명멸하기 직전의 황홀한 찰나를 짧고 날카로운 기계음이 망쳐놓았다. 남편은 입안에 막 고인 침을 추슬렀다. 역시 대리 운전이었다. 10시가 다 됐음을 알려주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남편은 다시 등이 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고된 행군을 마친 군인처럼 곯아떨어졌다. 이번에는 길고 긴 음악소리가 단잠을 부숴놓았다.
“이봐, 김대리, 씨방, 난데 말이야, 알지? 나, 한영수?”
완주의 농장주였다. 왕벌과 솔방울과 뱀 등 각종 술 냄새가 한꺼번에 풍겨 나왔다.
“젊은 사람이 말이야, 인생 그렇게 살면 못 써!”
말끝을 그윽하게 끌며 거국적인 말로 입을 연 농장주는 평생 쌓인 울분을 토로했다. 걸쭉하게 재구성된 그의 전기의 말미에 소일삼아 파이프 대리점을 경영하는 노년의 풍경이 펼쳐졌다. 남편은 졸지에 소박하고 착실한 촌부의 꿈을 잔인하게 짓밟은 질 나쁜 깡패, 양아치가 되었다. 그러나 어리둥절한 미안함과 본능적인 짜증 사이를 오가다가 후자 쪽으로 폭발해버렸다.
“할아버지, 지금 누구한테 신세타령이세요?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나이 많은 게 무슨 유세예요?”
굳이 이런 말까지 내뱉은 것은, 누적된 수면 부족을 해갈하려는 순간, 막 진입에 성공한 잠의 세계로부터 느닷없이 호출당한 까닭이었다. 농장주는 뜻밖의 응수에 당황한 나머지 한마디 대꾸도 못했다.
남편은 다시 잠을 청했으나 잠도 성질이 났는지 좀처럼 다시 찾아와 주지 않았다. 캔 맥주 하나를 마셨다. 몸이 묵직하고 머리가 알딸딸하고 눈앞이 침침해졌다. 그럼에도 잠은 들지 않고 오히려 늙은이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자책감이 커졌다. 혹시 무슨 몹쓸 짓이라면 하면 어떡하지. 이런 염려에 스마트폰을 잡는데 갑자기 잠이 왕림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