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욕실 문이 활짝 열리면서 우진이가 뛰어 들어온다. 문 앞, 깔개 위에는 건우가 엄마를 기다리며 떡하니 앉아 있다. 누나가 공습경보를 발령하자 즉시 두 손을 들고 엉덩이를 든 채 무릎을 세운다. 곧 일어설 기세, 아니 일어서다가 앞으로 꼬꾸라질 기세이다. 딱딱하고 미끄러운 욕실바닥에 얼굴이라도 찧는다면! 이런 말들이 머릿속을 획획 오가는 짧은 순간, 고함이 터져 나온다.
“애들 안 보고 뭐해, 정말!”
희뿌연 증기가 의식의 흐름처럼 자욱이 드리워진 가운데, 내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칠순의 촌부와 초로의 영문학도와 유칼립투스를 갈아타는 코알라와 커피콩을 고르는 남자는 온데간데없다. 알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수건으로 닦아내는 둥 마는 둥 얼른 건우를 안아 올린다. 마루에는 장남감과 주방도구와 걸레통과 옷가지가 한껏 널브러져 있다. 계속 졸다가 이제 막 눈을 번쩍 뜬 남편은 아직도 마누라의 호통이 잘 접수되지 않는 눈치이다. 누적된 피로와 수면 부족 때문에 시뻘겋게 충혈 된 그의 눈에 문자 몇 개가 제멋대로 찍힌다. “여기가 묵시록이다” 혹은 “Welcome to the real world.”
아침부터 신경질을 부린 대가가 참혹하다. 우진이의 체온이 급속도로 상승한다. 37도를 넘긴 열은 순식간에 38도를 뛰어넘는다. 많이 보채지는 않지만 저녁 무렵에는 39도에 육박한다. 해열제를 먹이고 가재수건을 미지근한 물에 적셔 이마며 목덜미, 겨드랑이를 닦아준다. 하강한 열은 네다섯 시간이 지나자 또 상승하더니 기어코 40도를 찍는다. 동틀 녘, 아이의 몸은 땀방울 하나 흘리지 못하고 마른 나뭇잎처럼 바싹바싹 타들어가며 부지깽이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월요일, 새벽 같이 소아과로 달려간다. 입 안이 헐고 목 안에는 하얀 물집이 잡혀 있다. 역시나 또 구내염이다. 배가 고파 음식을 입안에 넣으면 엉엉 울음이 나온다. 그럼에도 배고픔을 해소하려고 힘껏 음식을 삼키면 이제는 목구멍이 아파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엄마, 나, 아파, 아파….” 아이는 엄마보고 어떻게 좀 해달라고 계속 보채다가 까무러치듯 잠이 든다. 아플까봐 차마 다시 입안에 넣지 못한 곰 젤리를 쥔 채로.
이틀쯤 지나자 우진이는 열이 가셨다. 그동안의 치열했던 전투를 증명하듯 배와 등에 좁쌀 크기만 한 붉은 반점이 울긋불긋 피어난다. 열꽃이 만개하자 밥 한 공기를 바닥내고 곰 젤리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숟가락으로 퍽퍽 퍼먹는다.
한숨을 돌리자니 건우의 몸에 열이 오른다. 평생 처음 겪는 바이러스의 침입에 몸이 얼마나 놀랐는지 눈동자가 풀리고 끈적끈적 신음소리를 내며 온 몸을 부들부들 떤다. 숨이 곧 끊길 것 같은 무서운 경련이 10분, 어쩌면 20분은 족히 지속된다. 우진이에게서는 본 적이 없는 현상에 오장육부가 다 뒤틀린다. 허겁지겁 응급실로 달려가니 경련은 멎어 있다. 그러나 열은 여전히 높아 해열 주사를 놓는다. 건우의 울음이 귀청을 찢어놓을 것만 같다. 평생 처음으로 목이 잠길 만큼 운 아이는 비몽사몽간에도 악착 같이 젖을 빨아댄다.
힘겨운 하루를 마감한 다음 날, 건우는 정상 체온을 되찾았다. 경련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시종일관 보챈다. 함께 보채는 남매를 상대하느라 나는 나대로 보챔을 경험한다. 뒤틀렸던 오장육부가 제자리를 찾는지, 식은땀을 뻘뻘 쏟고 방과 화장실을 오가며 구토와 설사를 반복한다. 남편은 지방 출장 중. 그것도 경기도 어디도 아닌 합천에 가 있다. 결국 두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겨놓고서, 어제 아이가 누워 있던 응급실의 그 침대에 누워 수액과 혈관주사를 맞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주가 사라지고 없다. 남편의 한 주도 만만치 않다.
8.
부장의 염려대로 다음 주가 시작되자마자 완주군 농장주가 전화를 걸어왔다. 얼결에 전화를 받은 남편은 사건 아닌 사건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이삼일 뒤 걸려온 전화는 아예 받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는 사이 남편은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잊힌 농장주를 대신하듯 남쪽에서 태풍이 올라왔다. 나주가 쑥대밭이 됐다는 기사를 보자 문득 완주가 생각났다. 지갑을 열어보았다.
한영수, 전라남도 완주군 ***, 010-***-***.
고도로 상큼한 명함이었다. 안부전화라도 해볼까. 그러나 오디 박스를 건네주며 눈을 찡긋하던 표정이 떠올라 이내 아서라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