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 할아버지한테 연락할 거야?”
남편은 바지호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명함을 잔뜩 꽂아둔 칸에 줄무늬 종잇조각 하나가 생뚱맞게 들어 있다. 옛날 공책에서 찢었는지 냄새가 난다. 그의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가 또박또박 적혀 있는데, 볼펜 똥이 시커멓게 묻어 있다.
“뭐? 부장은 아예 전화도 받지 말래. 혹시라도 대리점 차렸다가 노후 비용 다 날리면 어떡하냐고.”
이렇게 말하며 남편은 자기 배에 붙이다시피 안고 있는 건우를 내려다본다. 일요일 오전, 온 가족이 다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며 여유로운 산책을 즐기는 중이다.
우리 옆을 지나가던 중년 여자들이 쑥덕댄다. “주중에는 실컷 일하고 주말에는 애보고…. 우리 아들도 저런 대접 받을까봐 장가를 못 보내겠어.” “에이, 저런 사위 보면 되잖아?” “난 아들만 셋이잖아.”
중년들의 대화에 귀가 간질간질하고 눈도 따끔거린다. 이런 불편함에 종지부를 찍듯 시어머니의 전화가 걸려온다.
작년에도 둘째 출산을 핑계로 쉬었으니까 올 추석 때는 꼭 성묘를 가야한다는 요지이다. 곁다리 얘기처럼 지난 주말에도 안 왔는데 이번에도 안 오느냐고 묻는다. 물김치 새로 담갔다, 소꼬리뼈 고아 두었다, 장조림도 해놓고 멸치도 잣을 넣어 함께 볶아 뒀다 등의 말도 이어진다.
“애들 먹기 좋게 소금도 거짓말 같이 조금만 넣고….”
소와 소의 꼬리와 그 꼬리의 뼈 대목부터 대략 놓고 있던 정신 줄을 얼른 붙잡는다.
“어머니, 오디 드실래요?”
“어?”
“애들 아빠가 출장 갔다가 오디를 얻어왔는데요, 어머니는 뭔지 아시죠?”
간만에 고부간의 대화가 활기를 띤다. 그 와중에 주말을 통째로 희생하느니 지금 후다닥 움직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어마어마한 깨달음처럼 뇌수를 뒤흔든다.
시어머니는 웬일로 손자손녀도 보는 둥 마는 둥 오디부터 찾는다. 불과 삼십 여분 거리지만 이 한여름에 냉장고에서 아이스박스로, 거기서 다시 실온으로 옮겨오는 동안 오디는 형편없이 망가져 있다.
“아이고, 아까워 죽겠네. 그러게 가까이 살면 내가 어젯밤에 바로 처리를 했을 텐데….”
진짜 아까운 건 응급처치를 못 받아 망가진 오디가 아니라 먼 곳으로 장가를 보낸 아들이다. 그 아들과 그 아들의 가족 앞에서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방치해두고 있는지 보여주겠다는 듯 그녀는 이내 행동에 돌입한다.
불에 덴 살갗처럼 짓물러버린 오디는 살림의 대가의 손 안에서 마파람에 게 눈 사라지는 속도로 씻김과 선별 작업을 거쳐 믹서 안으로 들어간다. 바싹 갈린 오디는 블루베리와 체리를 섞어 놓은 것 같다. 거기에 우유를 붓고 얼음을 몇 개 띄우자 과일 주스가 따로 없다. 두 아이는 신바람이 나서 날뛴다. 남은 오디는 시댁의 냉동실로 들어간다.
7.
욕실 문이 닫힌다. 따뜻한 물이 흘러나와 욕조를 데우며 사라진다. 무더운 여름임에도 물은 따뜻한 것이 좋다. 욕실에 뽀얀 증기가 어린다. 닫힌 공간에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바로 알몸으로 욕조 안에 앉아 샤워기의 물세례를 받는 이 시간이다.
청신한 초록빛의 뽕나무 숲 위로 검푸른 어둠이 내린다. 시커먼 천정에 환한 구멍처럼 뚫린 달의 비호를 받으며 칠순을 넘긴 촌부가 오디를 따고 있다. 뽕나무 사이를 누비는 솜씨가 탄복할 만하다. 촌부의 밤은 어느덧 거창의 밤으로 바뀐다. 시퍼런 어둠이 내린 산비탈, 저승사자처럼 우뚝 선 나무들을 바라보며 초로로 접어든 영문학도가 희랍어 알파벳을 외우고 있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시그마, 오메가…. 그 풍경화 속의 나뭇가지 사이에 코알라가 매달려 있다. 만년 영문학도의 고독을 완성해준 침엽수가 유칼립투스로 바뀐다.
어제만 해도 엄마 똥을 먹던 아기 코알라가 엄마 등에 찰싹 붙어 있다. 엄마와 아기 코알라는 슬며시 잠드는 듯, 그 잠에서 슬며시 깨어나는 듯, 무심히 죽어가는 듯, 그 죽음에서 무심히 부활하는 듯 우아한 춤을 춘다. 그 사이사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늙은 유칼립투스 이파리를 먹는다. 옆집 코알라들이 이사를 한다. 땅바닥으로 내려가지도 않고 공중에서 유칼립투스를 갈아타는 기술이 거의 신공, 공중부양 수준이다. 휘청대는 유칼립투스 나무 가지 사이로, 어딘가 뜨거운 나라에서 커피콩을 고르는 옛 남자 친구가 출몰한다. 얼핏 그의 얼굴이 보이려는 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