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토요일 아침. 건우가 누나 뒤를 졸졸 따라 다닌다. 그러다 얼음 망치 놀이를 하는 것처럼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다. 발끝을 살짝 들면서 다리 한쪽을 움찔하기도 한다. “엥!” 한 차례의 파고가 지나갔는지, 터질 것처럼 시뻘게졌던 얼굴빛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잠시 뒤 아이는 엄마에게로 설설 기어오더니 엄마의 어깨를 잡고 엉성하게 선다. 다시 온 몸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이 시뻘게진다. 조심스레, 격려하듯 아이의 등을 쓰다듬는 동안 두 번째 파고가 지나간다. 저만큼 기어가는 아이에게서는 막 나온 똥이 모락모락 연기처럼 냄새를 피어낸다.
“엄마, 건우 응가했어!”
우진이는 손뼉까지 친다. 엄마를, 엄마 젖을 빼앗아간 동생을 마구 할퀴고 싶어도 혼날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분한 마음에 손만 부르르 떨던 녀석이 동생이 대변을 볼 때는 그렇게 신이 나는 모양이다.
건우의 대변을 치우는 걸로 시작된 하루는 또다시 말과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아이들 아침을 먹이고 나도 먹고 아이들 목욕시키고 나도 씻고 청소를 하고 빨랫감을 싹 쓸어 세탁기 안에 넣고…. 어느덧 점심때다. 한숨을 가다듬고 전열을 정비하는 엄마를 향해 건우가 엉금엉금 기어온다. 내 어깨를 잡고 선 아이를 살포시 안아준다.
“엄마, 나도, 나도!”
우진이가 옆에서 까불어댄다.
“엄마 몸은 하나인데 둘을 어떻게 다 안아주니?”
큰아이는 금세 불퉁하고 시무룩해진다. 짧은 시간, 분노와 반항, 체념과 인내 사이를 오가다 후자 쪽으로 마음을 굳혔는지, 슬그머니 내 등 뒤로 와서 머리를 기댄다. 몸의 앞판과 뒤판에 아이 둘을 붙이고 있자니 묘하게 뿌듯하고 푸근한 느낌이다. 갑자기 건우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 오늘 건우 응가하는 날이야!”
날도 덥고 양도 많아 다시 씻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10킬로가 훌쩍 넘지만 아직 제 몸도 잘 못 가누는 사내아이를 두 번이나 씻기자니 힘에 부쳐 슬슬 성질이 난다. 이런 심사를 귀신 같이 아는 건우는 또 건우대로 더 버둥거린다. 건우의 손에 크림 통 뚜껑을 쥐어 주고서 간신히 기저귀를 채우고 나니 우진이가 크림 통에서 크림을 신나게 파내고 있다.
“김우진!”
그 일에 어찌나 몰입했는지 우진이는 몸을 부르르 떤다. 엄마의 성난 얼굴을 보면서도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투다. 그 사이 건우는 냉큼 몸을 뒤집은 다음 누나 옆으로 기어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어설픈 몸짓으로 크림 통에 손을 푹 집어넣는다. 나는 얼른 건우의 손에서 통을 낚아챈다. 그 반동 때문에 건우의 상체가 앞으로 수그러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자지러질 것 같은 울음이 터져 나온다. 순식간에 건우의 입이 피범벅이 된다. 건우를 안아 올려 달램과 동시에 손에 잡히는 대로 가재 수건을 입안에 넣었다가 뺀다. 내 어깨도, 가재 수건도 금방 피에 흠뻑 젖는다. 우진이도 옆에서 엉엉 울고 있다. 이 최악을 멋지게 장식해준 것은 막 도착한 남편의 메시지.
“마누라야, 흑흑, 늦잠 잤어. 저녁은 아빠랑 먹자^^;”
목 놓아 울고 싶은 마음을 두 아이가 표현해준다. 우선 건우에게 젖을 물린다. 금방 곯아떨어지는 걸 보니 상처는 크지 않은 모양이다. 그 사이 울음을 그친 우진이는 엄마의 젖무덤에 얼굴을 파묻은 채 새근대는 동생을 우수에 찬 눈으로 하염없이 지켜보다가 조용히 잠이 든다.
남편이 집에 온 시각은 밤 9시 경. 서울 근처에서 길이 막혔단다. 항상 이런 식이다. 길은 어디선가, 언젠가는 꼭 막힌다. 막히기 위해 뚫려 있는 것이 길이다.
“그렇게 큰 교통사고는 처음 봤어. 뇌수가 터졌나봐. 노란 물이 뇌수밖에 더 있겠어?”
녹초가 된 그의 얼굴에는 죽을죄를 지은 것 같은 표정이 드리워져 있다. 그 죄를 사해달라는 듯 플라스틱 상자 두 개를 내놓는다. 그것은 놀랍게도, 오디였다. 한 알을 집어 입안에 넣어 봤다. 물컹하고도 달달한 기운이 입안으로 퍼지지만 어딘가 울적한 맛이다.
“아빠, 이거 블루베리야?”
누나의 물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생은 손부터 갖다 댄다. 손에 닿는 감촉이 신기한지 움찔 물러서더니 한 박자 쉬고 다시 손을 갖다 대는데 이번에는 제법 대담하다. 낮잠을 푹 잔 탓에 둘 다 눈이 말똥말똥하다. 박스 두 개를 냉큼 냉장고에 집어넣었지만 뭔가 마뜩치 않다. 시쳇말로 ‘즉취 식품’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