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논문을 통해 엘리엇의 쓴맛 단맛을 다 보았다고 판단한 삼촌은 일찌감치 주제를 바꾸었다. 파고 또 파도 마르지 않는 샘물, 셰익스피어였다. 주제 하나를 잡아 몇몇 작품을 연구해볼까, 아니면 한 작품을 골라 집중적으로 해부할까. 이 고민을 하는 동안 한 학기가 흘렀다. 아무래도 후자가 낫다는 결론에 도달, 작품을 고르기 시작했다. 비극과 희극과 로맨스와 역사극 중 어떤 걸로 할까. 돌고 또 돌아 저 유명한 햄릿으로 낙착되는 데 꼬박 세 학기가 지났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나는 삼촌 집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삼촌은 강의가 없는 날이면 하루 종일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다. 삼촌의 책상 위에는 원서들이 여보란 듯 펼쳐져 있었다. 책장에 입추의 여지도 없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것도 전부 그렇게 두툼하고 묵직한 원서들이었다. 녹초가 되어 귀가하는 삼촌의 손에도 원서가 들려 있었다. 부질없이 손때를 탄 어딘가 처량해 보이는 <Hamlet>. “To be, or not to be.” 어느덧 삼십도 후반으로 접어든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도 아닌, 그 문구의 해석을 담은 무수한 논문과 연구서를 정리하느라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그 사이 삼촌의 시간의 돌쩌귀가 왕창 어긋나 버렸다. “The time is out of joint.”

몇 년이 지나도록 논문이 쓰이지 않자 삼촌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놈의 박사, 그놈의 교수는 남한테 주고 영어 강사로 살자, 그렇게 자본금을 모아 마흔 다섯이 되기 전에 학원을 하나 세우자. 그러고서 애매하게 발가락 몇 개를 걸어두었던 대학을 박차고 나왔다. 할아버지 수준의 지지부진한 늦깎이 연구생보다 여전히 젊은 축에 들어가는 관록 있는 강사가 몇 배는 더 상쾌해 보였다. 실제로도 그의 삶은 상쾌했다. 그럴수록 삼촌에겐 더 잘 사는 동네, 더 넓은 아파트, 더 질 좋은 음식이 필요했다. 그 요구를 삼촌은 간당간당 만족시켰고 그 간당간당함을 즐겼다. 다른 변수가 없었더라면 그의 한 세월은 그렇게 끝났을까.

유나이티드 킹덤에서 누군가가 날아왔다. 영문학도 아닌 영어학 전공에 교수법까지 공부한데다가 어엿한 박사였다. 그런 자가 대학에 자리 잡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학원 판에 뛰어든 것이다. 학원이 통째로 흥분했다. 삼촌은 자신의 성실함과 노회함,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입시제도에 대한 방대한 정보력을 믿었다. 그 자신감으로 네이티브 스피커나 다름없는 박사 강사와 맞섰다. 패배가 예정된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삼촌은 오랜 시간, 호기롭게 저항했다. 질기게 버팀으로써, 그리하여 참담한 파국을 맞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 정녕 서사는 몰락에서 시작된다.

 

 

사십대의 삼촌은 거창 군민이었다. 그는 영강 근처의 새 아파트에 살면서 고물처럼 낡은 엘란트라를 몰고 거창 일대의 소도시를 돌아다녔다. 교육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적어도 그런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부산에서 이름을 날리던 명강사의 출현은 가뭄의 단비였다. 게다가 바람을 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귀향한 것이라지 않나. 다들 나가려고만 하는 세상에서 다시 들어오는 데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는 누구나 알았고, 이 점을 높이 쳐주었다. 영어 선생으로서 그의 주가는 나날이 치솟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삼촌은 비교적 건강한 생활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숙모의 얼굴은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커다란 두 눈은 허허로운 구멍처럼 덩그러니 뚫려 있었다. 부산 토박이인 그녀가 일거리도, 친척도, 친구도 없는 산간벽지에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됐다. “너거 삼촌 평생 한 될까봐 들어가긴 했지만 애들 대학만 가면 나도 거창 나올라고.” 삼촌은 그녀 옆에 헐렁하고 엉성한 자세로 앉아 초연과 달관의 표정을 지었다. 각각 엄마와 아빠를 쏙 빼닮은 두 딸은 부모의 찬란했던 한 시절을 다부지게 보여주려는 듯 너무나 예뻤다. 인간의 몰락과 상승의 찰나적인 접점을 포착한 것 같은 풍경에 눈이 시려왔다. “거창에도 있을 건 다 있어요.” 큰 딸은 쌍꺼풀이 크게 진 영롱한 두 눈을 굴리며 이런 말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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