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서 어젯밤에 만들어둔 당근 브로콜리 진밥을 꺼낸다. 끓인 물을 부어 찬기를 없앤다. 엄마가 부산을 떨자 아이도 흥분한다. 그러나 쟁반에 담겨온 물그릇과 밥그릇을 보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밥숟가락을 입에 갖다 대니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다. 한 손으로 머리를 쥐고 억지로 먹이려고 하자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고 팔을 마구 내젖는다.

건우 밥 먹기 싫어? 그럼 엄마도 건우 밥 안 줄 거야.”

모자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대치한다.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던 아이는 한 손을 들더니 쟁반으로 가져간다. 그러고는, 엎을 줄 알았는데, 저리로 슬쩍 밀어내는 것이다. “으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기까지 한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엄마가 냉장고의 쪽문을 여는 모습을 보자 아이의 목소리와 표정이 금세 달라진다. “, !” 격렬한 기쁨 뒤에 어설프지만 ! !” 소리도 들린다.

치즈 한 장을 바닥내고 밥 반 공기를 비운 다음 나른한 포만감에 젖어 엄마 품으로 안겨드는 아이. 이 아이가 나의 둘째 아이 건우이다. 아들이다. 첫 아이는 딸이고 이름은 우진이다. 우진이는 예정일보다 두 주 빨리 태어났고 8개월이 지나면서 걸음을 떼고 돌을 넘기고는 뛰어다녔다. 건우는 예정일보다 닷새 늦게 태어났고 십오개월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기고 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생길까? 성별? 딸아이는 빠르고 남자아이는 늦다고들 한다. 순서, 즉 첫째냐, 둘째냐? 보통 첫째는 느리고 둘째는 빠른데, 그 이유는 말 그대로 둘째이기 때문, 즉 첫째의 행동을 모방하기 때문이란다. 몸집의 차이? 몸집이 작으면 발달이 빠르고 몸집이 크면 그 반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실제로 두 아이가 생겨나 자라가는 과정은 이런 인과론을 지지해주는 척하면서 의뭉스럽게 비켜간다. 아니면, 엉성하고 느슨한 우연론의 망 밑에 촘촘한 인과론의 고리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

 

4시가 훌쩍 넘은 시각, 건우를 유모차에 태우고 집을 나선다. 우진이가 막 어린이집에서 나온다. 셋이 함께 근처 부동산에 들렀다가 놀이터로 간다. 우진이는 말을 탄다. 시커먼 때가 낀 노란 플라스틱 말인데 정말 볼품없는 생김새이다. 그 옆에는 시소가 하나 있다. 열 서너 살쯤 돼 보이는 소녀가 한 쪽에 앉아 있다. 얼굴이 제법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어딘가 이상하다. 맞은편에는 늙은 엄마인지 젊은 할머니인지 헷갈리는 중년 여자가 앉아 있다. 둘이 함께 춤추듯 시소를 탄다. 그 소리에 맞추어 건우가 시나브로 잠이 든다.

우진이가 말에서 자동차로 옮겨간다. 역시나 시커먼 때가 낀 볼품없는 빨간 플라스틱 자동차이다. 시소를 타던 소녀가 큰소리로 엄마!”라고 외치며 뭐라고 옹알댄다. 순간, ‘다운증후군이라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임신 중에 받았던 각종 검사와 그때마다 정도의 차이를 두고 수반되었던 불안이 상기된다. 의학은 모든 것을 인과론으로 환원하지만, 본질상 그래야 하지만. 소년들이 돌멩이처럼 굴러와 파란 시소와 노란 말과 빨간 자동차를 몽땅 차지한다. 모녀의 행복한 시소 놀이도 끝난다. 여전히 자고 있는 건우도 깨울 겸 유모차를 조심스레 밀며 슈퍼마켓에 간다.

찬거리를 사는 동안 잠에서 깬 건우가 칭얼댄다. 허기가 진 탓도 있을 것이다. 진짜 허기가 졌고 자기가 허기가 졌음을 아는 우진이는 대놓고 짜증을 낸다. 애호박과 표고버섯과 두부를 유모차 밑의 광주리에 넣고, 칭얼대는 작은 아이는 등에 업고, 짜증내는 큰아이는 유모차에 태운다. 볼썽사나운 귀갓길이다.

 

9시를 넘긴 시각. 스무 평 남짓한 아파트, 우레탄 덮개 밑에 모래를 감춰놓은 놀이터, 공터와 잔디밭과 나무 벤치가 있는 구청 앞, 매일매일 축산물과 수산물과 채소 중 하나를 싸게 파는 슈퍼마켓 사이를 오가며 그리는 동선이 마무리되었다. 어둠이 내렸고 아이들이 잠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 움직임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이 상황이 너무 좋아 얼마간을 그렇게 있다. 인스턴트커피 몇 알을 뜨거운 물에 녹인다. 코를 간질이는 뜨거운 기운과 향기, 혀끝에 와 닿는 옅은 커피 맛. 다시금,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 움직임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상황이 너무 좋다. 너무 좋아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다. 아무 데도 가지 않고서 전주로 간 남편, 거창의 산골로 들어간 삼촌, 코알라와 캥거루의 나라로 떠난 69년생 우연이, 값싸고 질 좋은 커피콩을 찾아 우간다와 네팔과 페루를 오가는 69년생의 옛 남자 친구를 되는 대로 마구 생각한다.

 

3.

 

내 기억 속의 용태 삼촌, 즉 막내 삼촌은 항상 대학생이었다. 다른 삼촌들과는 달리 키가 훤칠 크고 몸매가 늘씬했으며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에는 풍성한 턱수염과 구레나룻의 파르스름한 뿌리자국이 도드라졌다. 우리 집에 얹혀사는 처지임에도 삼촌은 왕자처럼 늠름하고 성주처럼 당당했다. 단층짜리 주택에 방 두 칸을 빌려 쓰는 우리 집에는 참 어울리지 않는, 향긋한 비누냄새를 풍기는 미남의 영문학도. 이 초상화를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한 소품이 그의 손에 들린 한 권의 양서였다. 책은 주기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햄릿맥베스였고 등대로떠나는 율리시스”,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었다.

영문학도는 대학에 오래 머물렀다.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얄궂은 작품이 그의 연구 대상이었다. 석사논문을 준비하는 동안 삼촌은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이년 쯤 뒤에는 얼굴이 계란처럼 갸름하고 쌍꺼풀이 크게 진 예쁜 언니와 결혼했다. 뽀얀 피부에 젖살이 다보록한 그녀는 삼촌 강좌의 수강생이었다.

숙모가 뱃속에서 둘째를 키우고 있을 때 삼촌은 거의 사오년간 붙들고 있던 석사논문을 끝냈다. 이른바 엄정한 심사를 거쳐 석사학위를 따고 박사 과정을 밟는 동안 그의 청춘도 저물어갔다. 처자식이 딸린 삼십대 가장, 육아와 가사에 시달리는 서른을 목전에 둔 아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망졸망 커가는 두 딸, 방 두 칸의 전세 연립 주택. 삼촌은 모든 희망을 박사논문에 걸었다. 일단 쓰기만 쓰면 박사논문이고 제출만 하면 학위를 따는 것이고 학위만 따면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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