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을 끝낸 다음날, 그는 회사에 나가지 않았어. 감기에 걸렸거든. 하지만 감기가 나은 다음에도 회사에는 가지 않았어. 하루 종일 자기 방에 누워 있었던 거지. 두 눈을 뜬 채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꽤 마음에 들었던 거야. 몸을 옆으로 돌리면 벽이 보였지. 그의 방 벽지는 무늬가 하나도 없는, 그냥 상아색 벽지였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 무슨 그림을 그려보기에 딱 좋았어. 하지만 말이야, 사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 그림도 떠올리지 않았어. 그래도, 아니 그래서 더 좋았던 거야. 누워 있다 지치면 몸을 엎드렸어. 코가 살짝 방바닥에 닿았겠지? 이건 좀 불편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눈을 내리깔았지. 그러곤 나뭇결과 비슷한 모양의 장판 무늬를 살펴보았지. 저절로 눈이 스르르 감겨 왔어. 그러면 그냥 그대로 자는 거야. 다시 눈을 뜨면 또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이런 상황이 그는 제법 마음에 들었던 거야.”
“에이, 그럼 밥도 먹지 않아?”
지금껏 얘기에 열중했던 정은이가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거짓말이야! 밥 안 먹고 어떻게 살아?”
“음…. 실은 바로 그게 문제야. 문지기는 하루 종일 밖에도 나가지 않고 방만 지켰어. 첫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잤어.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잠을 잤으니까. 다음날은 방에서 뒹굴며 만화책을 읽었어. 그러니까 이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 만화책을 읽었잖아? 다음날은 그간 굶주린 배에 음식물을 가득 집어넣었어. 너무 오랜만에 과식을 하는 바람에 소화제까지 먹어야 했어. 어쨌거나 그날도 밥을 먹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그 다음날은 밖으로 나가 반나절 동안 섬을 돌아다녔어. 구석구석 다 돌아봤어.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왔던 길을 또 오락가락했지. 집에 들어온 뒤에는 퍼즐조각을 흩어놓고 맞추기 시작했어. 한데 그는 퍼즐은 정말 젬병이었거든. 한참을 붙들고 있었지만 절반도 맞추지 못했어. 이게 그는 참 마음에 들었어. 빨리 끝나 버리면 새로 할 걸 찾아야 되잖아? 그러니까 바로 이게 문제야. 어쨌거나 그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결국, 그는 깨달았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잠깐이라도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멈추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떡붕어 아저씨는 마른 빨래를 개기 시작했다. 지금껏 졸고 있던 가람이가 깨어났다. 대신 정은이가 졸기 시작했다. 희주는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옆에 누운 빛나의 다리를 긁고 있었다.
“마녀는?”
잠결에 정은이는 이렇게 내뱉고는 또 스르르 잠이 들었다.
“마녀는 문지기와는 달리 너무 많은 것을 하고 싶어 했어. 그래서 늘 바빴지. 하지만 왠지 마녀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것 같아. 마녀는 매일 아침 학교에 가서 선생님 놀이를 했어. 모래 장난을 좋아하는 은학이와 세상이 전부 미웠던 태형이와 몹시 시끄러운 아름이를 데리고 말이야. 마녀는 선생님 놀이를 할 때도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어. 그냥 아이들과 놀았을 뿐이야. 동화를 들려주고, 종이를 접고, 숫자를 세보고 그렇게. 집에 오면 마녀는 주부 놀이를 즐겼어.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심지어 농사도 지었지. 하지만 뭔가 이상했어. 문지기와는 부부 사이였지만, 그래서 같은 성에 살았지만, 그들은 어딘가 부부 같지 않았거든. 아참, 마녀는 또 동화 작가이기도 했어. 하지만 단 한 번도 동화를 종이에다 직접 쓴 적은 없었으니, 이것도 얄궂지 뭐야. 어떤 한 아이를 위해 꾸준히 동화를 쓰는 것도 같았는데, 어쨌거나 마녀는 분명히 아이가 생기길 바랐어. 하지만 있던 아이는 사라졌고, 없던 아이는 생겨나지 않았어. 마녀는 제법 슬펐을 거야. 그래도, 아니, 그래서 마녀는 동화를 썼지. 동화는 절대 써지는 법이 없었어. 그저 항상 동화를 생각하고 또 말하고…. 그걸로 끝이었어. 그러다가 마녀는 죽을 때가 됐어. 자기가 언제 어떻게 죽는지 마녀는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때도 마녀는 마법을 쓰지 않았어. 마법만 쓰면 죽지 않을 수 있었는데도 한사코 마법을 쓰지 않으려 했어. 무엇을 위해서 마법을 아껴뒀던 것일까? 혹시 마법을 한 번이나 두 번 밖에 쓸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마법을 한 번 쓰면 그 대신 눈이나 손이나 뭐 그런 걸 내줘야 됐던 걸까? 설마 마법을 쓸 줄 몰랐던 건데 계속 거짓말을 했던 걸까?”
소영이의 말에 대꾸를 해주는 아이는 없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한 자리에 붙박인 듯 앉아 있었다. 그때 벨소리가 들렸다. 떡붕어 아저씨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저녁식사였다. 소영이도 일어나 음식을 날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