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베란다 바깥의 산기슭이 온통 녹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내와 나는 여느 때처럼 한가롭게 각자 토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 가졌어.”
“처제? 잘 됐네.”
대충 대꾸를 하긴 했지만 블로깅을 하는 중에 자꾸만 에러가 나서 신경이 곤두섰다. 두어 번 화면이 멎더니 급기야 컴퓨터가 먹통이 됐다.
“에잇, 병신! 새로 사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보니, 베란다 너머의 푸른 숲을 배경으로 아내의 자그마한 등이 비스듬히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꼬부랑 할머니 안 되려면 바른 자세로 앉아야 된다고 몇 번을 얘기했건만, 도무지 사람 말을 듣지 않고 꼭 저렇게 의자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나는 아내를 뒤에서 살짝 껴안았다.
“아이 가졌다니까.”
“너 드디어 이모 되는 거야?”
“아니,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아내는 특별히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묵직하고 단호한 강세를 넣어 또박또박 말했다.
“뭐?”
나는 아내의 의자를 획 돌렸다. 두 다리를 의자 위에 세워 놓았던 까닭에 아내의 몸도 획 돌아갔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낭패스러웠다. 갑자기 귓가로 ‘꺼-억’ 소리가 들려왔다. 15년쯤 전, 내 손을 거쳐 간 익명의 시체들의 시선이, 심지어 눈이 완전히 감겨져서 도저히 포착해낼 수도 없었던 시선 아닌 시선들까지도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일그러진, 아니 일그러질 것조차 없는 얼굴 아닌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내는 나의 혼란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빠 되기 싫다는 소리는 하지 마. 벌써 5개월째야.”
“혜민아, 너 설마…? 아, 그때 일부러 그런 거였구나….”
“응. 나름대로 노력했어. 병원 다니면서 배란일까지 체크했단 말이야.”
“옛날에는 그렇게 당당하더니 이제는 왜 이래?”
“그때는 정말로 엄마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단 말이야. 너도 그땐 학생이었잖아. 또 아이 같은 건 언제든지 원하면 생기는 건 줄 알았지, 젊었으니까. 하지만 나도 낼 모레면 서른여섯이야. 몸 나이는 마흔도 훌쩍 넘는단 말이야.”
“나이는 너만 먹어? 왜 매사가 다 네 맘대로야? 나를 속여서까지 아이를 만드는 건 대체 무슨 횡포야? 의기양양하게 커가다가 비참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악취미 아니야? 대체 왜 기왕지사 죽을 생명을 만드는 거냐고?”
“이봐, 이동훈씨, 그 문제라면 나도 할 말 많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냉소적일 필요는 없잖아. 인생이 별 거 없다는 건 일곱 살짜리도 다 알아. 하지만 냉소에서 시작하면 결국 냉소로 끝난단 말이야.”
“냉소고 뭐고 사실이 그렇잖아. 왜 이렇게 사람을 비열한 놈을 만들어? 내가 무슨 정자은행이야?”
“뭐?!”
아내는 기가 차다는 듯 나를 노려보더니 방으로 획 들어가 버렸다.
나는 혼자 거실에 남아 베란다 밖의 공기를 마셨다. 역정을 내긴 했지만 낭패스러운 느낌은 생각보다 빨리 잊혔다. 서글퍼졌기 때문이다. 결혼 이후 내가 시체한테 복수를 당하는 동안, 아내는 자신의 허기진 배를 응시하고 있었으리라. 내 귓전을 맴도는 꺼-억 소리에 집착한 나머지, 아내의 이런 허함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매일 한 침대에서 자면서도 아내의 달거리가 끊긴 줄도 몰랐다. 간혹 아내가 헛구역질을 하거나 속이 더부룩하다며 끼니를 거를 때도 그냥 논문 스트레스인 줄만 알았다. 틈만 나면 아내의 배를 간질이면서도 도톰해진 배가 그냥 나잇살이 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넉 달이 몇 장의 짧은 컷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동안, 뱃속에서는 꺼-억 소리가 요동쳤다.
갑자기 한여름의 초저녁, 선선한 바람이 거실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아내가 다시 거실로 왔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나를 쳐다보더니 어린애처럼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야, 이동훈, 너 뭐야? 잘못했으면 따라와서 용서를 빌어야 될 거 아니야?”
아내의 어조는 발랄했지만 시선은 애처롭기만 했다. 그 시선을 감추고 싶었는지 아내는 얼른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무조건 반사처럼 아내의 등을 토닥거렸다. 토닥거림이 잦아졌을 때 어디선가 뭐라고 묘사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려?”
아내가 이렇게 묻지 않았다면 내 뱃속에서 기어 나오는 꺼-억 소리인 줄 알았을 거다.
“네 배였어?”
나의 질문에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손을 잡아 자기 배에다가 갖다 댔다.
“아직 활발하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느껴지지? 꽤나 시끄러운 녀석이 나올 것 같아.”
아내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약간의 수줍음, 약간의 흐뭇함, 약간의 미안함, 약간의 경이로움, 약간의 기쁨 등이 복잡하게 뒤섞인 웃음이었다.
나는 대자리 위에 아내를 비스듬히 눕히고 아내의 아랫배에 귀를 갖다 댔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죽음 저편과 이편의 경계 어디에서 나오는 꺼-억 소리처럼 없음과 있음의 경계 어디에서 뭔가가 꼼지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미네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