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6월이 중순을 넘겼을 때도 나는 여전히 그 꿈과 환청을 가벼운 감기처럼 달고 살았다. 동문회 게시판에서 그 친구의 청첩장을 보게 된 건 이 무렵이었다. 짙은 와인색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하얀 색 턱시도를 입은 친구가 스튜디오 안에서 촬영한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윤상원. 그렇다, 바로 이 이름이었다. 그때 아내한테는 손사래를 쳤지만 나도 모르게 결혼식 날짜를 기다리게 됐다.
반팔을 입어도 후텁지근할 만큼 햇빛이 강하고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다. 그 친구, 그러니까 윤상원은 작년에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모 법무법인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지금의 신부를 만난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학과 동기들은 신랑신부를 본 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주고받았다. “변호사 판사 부부의 탄생” 어쩌고 하며 의례적인, 심지어 의무적인 부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지정된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내 머릿속에선 그 꿈 얘기가 곪을 대로 곪은 종기마냥 속을 썩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저 친구의 얼굴을 보란 말이다. 원래도 진취적이고 밝은 성격이긴 했지만, 오랜 노력의 결실로 원하던 직업을 갖게 됐고 서른다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이십대 중반의 여성을 신부로 맞이한 그의 얼굴 어디서도 그날 저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 꺼-억 소리와 토사물 때문에 그의 얼굴에 번진 경악과 공포, 어린애 같은 울음은 그의 기억 창고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다.
결혼식이 끝난 뒤 호텔 근처 호프집에서 조촐한 술자리가 마련됐다. 나는 나를 다소 불편하게 여기는 친구들의 시선을 무릅쓰면서까지 자리를 지켰다. 윤상원은 바쁜 와중에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야, 네 결혼식 못 가서 미안하다. 워낙 바쁜 때여서….”
“뭘 그런 거 같고….”
이렇게 응수를 하면서도 내심 허탈했다. 한 시절엔 그래도 밥 한 끼 정도는 서걱거림 없이 먹을 수 있는 사이였건만 이제는 사교적이고 외교적인 말들, 훈련되고 다듬어진 표정들로 시간을 견뎌야 하는 관계가 돼 버렸다. 윤상원도 사정은 비슷하여 허망한 말들만 내뱉었다.
“공기업이라 좀 편하긴 하지?”
“요즘은 딱히 그렇지도 않아. 연봉도 적고.”
사실 연봉이 적다는 생각은 딱히 안 해봤지만, 피로연에 참석한 동창들이 대부분 고등고시합격자라서 괜히 주눅이 들었는지 이런 말까지 무심결에 덧붙어버렸다.
“그냥 밥 먹고 살면 되지, 사람 사는 거 별 거 있냐? 부자라고 하루 다섯 끼 먹는 것도 아닌데. 아이는?”
“어, 아직 없어.”
“서둘러. 우리도 이제 나이가 있어서 뜻대로 잘 안 된대. 혜민이던가, 걔도 이제 중반이잖아.”
그러면서 윤상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을 가는 것 같아 나도 따라 일어섰다. 그제야 비로소 용기를 좀 내볼 수 있었다. 기껏해야 한두 번 학교에서 마주친 것이 전부일 텐데도 친구의 여자친구, 아니, 아내의 이름까지 용케 기억해낸 녀석한테 갑자기 신뢰가 생긴 탓인지도 몰랐다.
나는 최대한 완곡한 표현을 써서 그 때 일이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윤상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휴, 동훈이 너도 웃긴 놈이다. 그 옛날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냐?”
“그게 말이지, 네가 그 꿈 얘기를 해준 뒤에 내가 그 꿈을 꾸게 됐거든.”
“뭐?”
“왜 감기를 산다는 말 있잖아? 그렇게 너한테 꿈을 산 것 같더라니까.”
나의 곤혹스러운 표정에 친구 역시 꽤 심각한 표정으로 화답하며 그 나름의 고백을 했다.
“사실, 동훈아, 그때 나 병원에 좀 다녔어. 후유증이 꽤 오래 가더라고. 너한테는 왠지 말을 못 하겠더라. 네가 괜히 미안해할까 봐 신경도 쓰이고. 아니, 솔직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너 그때 왜 나보고 같이 가자고 했었냐?”
나는 윤상원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절절맸고, 윤상원은 잠깐 멋쩍은 웃음을 짓긴 했지만 쌓인 말들을 줄줄이 쏟아냈다.
“그때 네가 뭐더라, 기말 리포트를 대신 써준다고 했던가? 여하튼 뭔가 있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그런 델 따라 갔을 턱이 없잖아? 야, 그런데 그때 너 엄청나게 씩씩했었어. 그거… 그러니까 그거도 네가 거의 다 닦았잖아. 진짜 대단한 놈이야. 술이 안 먹혀서 완전히 맨 정신이었을 텐데, 그거… 저어기 그 얼굴을 닦은 것도 너였잖아.”
“어, 그랬었나….”
나는 이렇게 말을 얼버무렸다.
동일한 순간, 동일한 사건에 대해 친구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완전히 정면으로 대치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어느 한 쪽이 무심결에 오해를 한 것일까, 아니면 아주 작당을 하고서 심리적 부담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기 편할 대로 과거를 재구성해버린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먼저 나한테 권유를 해놓고선 꼭 내가 자기를 억지로 끌고 간 것처럼 얘기를 하다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기억을 재구성함에 있어 오류를 범한 사람이 윤상원이 아니라 나일 수도 있다. 게다가 아무리 내 용건이 급했기로서니, 결혼식 날 친구한테 좋은 얘기는 못할망정 흉흉한 얘기나 상기시키다니. 헤어질 때 윤상원은 병원에 한 번 가보라는 충고를 제법 진지하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