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퍼런 빛이 식칼의 서슬처럼 깔려 있는 싸늘한 방. 긴 탁자 위에 내가 죽어 누워 있다. ‘가 내 곁으로 다가온다. 무심한 시선을 한 번쯤 주기도 한다. 곧 뭔가가 내 몸에 닿는다. 싸늘하면서도 부드럽고 축축한 감촉. 내 몸이 닦이기 시작한다. , 종아리, 무릎, 허벅지손을 놀리는 솜씨가 제법 노련하다. 떨림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 손길이 나의 허리께에 닿는다. 이어, ‘는 다소간 힘을 주어 내 다리 하나를 들어올린다. 그렇게 엉덩이까지 닦인다. 이제 나의 하복부를 건드린다. 그 다음, 배꼽을 스쳐지나간다. 배꼽 근처에서 가 잠깐 숨을 가다듬는다. 그러곤 손에 힘을 잔뜩 주어 배를 누르다시피 훔쳐낸다.

-.

죽어 누워 있는 내 배에서 꺼-억 소리가 깊은 울림을 내며 올라온다. 트림? 설마! 하지만 싸늘한 방이 위액이 뒤섞인 시큼한 음식 냄새로 가득 찬다. 순식간에 서슬 퍼런 빛이 와장창 깨진다. 나도 모르게 몸뚱어리가 나무토막 마냥 진동한다. 또 한 번 꺼-억 소리가 흘러나온다.

 

-억 소리는 자명종 소리에 묻혀버렸다. 눈을 떴다. 속이 쓰리다. 머리도 묵직하다. 또 이 꿈이라니. 나를 향해 돌아누운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내는 내 가슴팍에 손을 댄 채 어린아이처럼 곤히 자고 있다. 아침 630. 아내에겐 한밤중이나 다름없는 시간이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다시 방으로 왔을 때도 아내는 똑같다. 그래도 내가 옷을 입는 동안엔 잠시나마 눈을 떴다.

출근하는 거야?”

반쯤 감긴 눈엔 배시시 미소가 감돌고 목소리는 졸음에 겨워 나른하다.

빨리 들어와. 맛있는 거 해놓을게.”

두 번째 말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아내는 언제 잠에서 깼었냐는 듯 다시 곯아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내가 쉬는 날이다. 보나마나 정오까지 침대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허리가 아플 때까지 누워 있을 것이다. 그렇게 중간 중간 끊기는 몇 개의 꿈을 이어서 웬만한 시나리오 하나쯤은 거뜬히 구성한 뒤 남은 잠마저도 싹 소진시켜버리는 게 아내의 해묵은 습관이었다.

 

문을 한 번 확인한 뒤 나는 집을 나섰다. 몸은 아까 꿈속에서와는 달리 자동인형처럼 빈틈없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차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자, 간밤에 축적된 뉴스가 내 귓전을 단조롭게 맴돌았다. 얼마 뒤엔 대로로 나왔다. 신호등 앞에 이르러, 차가 섰다. 순간, 지금까지의 기계적인 움직임을 바꾸려는 듯 몸이 움찔했다. -. 아침을 너무 급히 먹었나?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 사이로, 또다시 그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내 뱃속에서 올라오는 트림인지 내 귓전을 맴도는 꺼-억 소리의 환청인지 나도 헷갈렸다. 신호가 바뀌었고 다시 차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억 소리는 집요하게 내 귀를 후벼 파서 급기야 뇌수로까지 잠입한 미국 대선 뉴스에 묻혀버렸다.

 

845. 사무실로 들어가 커피 한 잔을 타서 책상 앞에 앉았다. 다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꿈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간헐적으로 계속 나의 무의식 속을 찾아들어선 나의 의식을 흩뜨려놓곤 했다. 하지만 한동안 뜸했던 그 꿈이 결혼 이후에 더 빈번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그보단 15년쯤 전에 한 친구한테서 그 꿈을 넘겨받은 것 같은 기괴한 느낌이 왜 자꾸 드는 걸까.

 

2.

 

대학교 1학년 때였다. 한 친구가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를 해보지 않겠냐고 권했다. 학과 동기라는 인연 탓에 함께 수업을 듣고 간혹 모임에서 술을 함께 마시곤 하는 사이, 전화를 하려면 번호 두어 자리가 생각이 안 나 수첩을 뒤적여 봐야 하는 그런 사이였다. 나는 선뜻 그러자고 했다. 특별히 용돈이 부족해서도, 인생의 경험을 쌓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돈이야 급하면 부모한테 갈취할 수도 있고 경험이란 원래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축적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니까. 한마디로, 친구 따라 강남 간 꼴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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