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욕실 문이 닫힌다. 따뜻한 물이 흘러나와 욕조를 데우며 사라진다. 무더운 여름임에도 물은 따뜻한 것이 좋다. 욕실에 뽀얀 증기가 어린다. 닫힌 공간에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바로 알몸으로 욕조 안에 앉아 샤워기의 물세례를 받는 이 시간이다. 그 끝을 최대한 연기하고 싶다.
청신한 초록빛의 뽕나무 숲 위로 검푸른 어둠이 내린다. 시커먼 천정에 환한 구멍처럼 뚫린 달의 비호를 받으며 칠순을 넘긴 촌부가 오디를 따고 있다. 촌부의 밤은 어느덧 거창의 밤으로 바뀐다. 시퍼런 어둠이 내린 산비탈, 저승사자처럼 우뚝 선 나무들을 바라보며 초로에 이른 영문학도가 희랍어 알파벳을 외우고 있다. 그 풍경화 속의 나무, 그 나뭇가지 사이에 코알라가 매달려 있다. 엄마 코알라가 아기 코알라를 등에 업고 있는, 판에 박힌 인물 구성에 판에 박힌 자세이다. 왕년의 영문학도의 고독을 완성해준 침엽수는 어느덧 유칼립투스로 바뀐다.
모자인지, 모녀인지 하여간 코알라 가족은 나무의 몸통과 나뭇가지 사이에 용케 매달려 우아한 춤을 추고 있다. 저도 모르게 슬며시 잠이 드는 듯, 깊이 들었던 잠에서 살포시 깨어나는 듯, 무심히 죽어가는 듯, 죽었던 삶에서 그렇게 무심히 부활하는 듯 우아한 춤이다. 기실은 유칼립투스 잎에 포함된 알코올 성분 때문에 정신이 혼미한 것이지만, 그마저도 코알라의 생태에 대한 동경을 부채질한다. 코알라가 잠의 춤을, 죽음의 춤을 출 때마다 고약한 냄새가 풍겨 나온다. 여느 때보다 더 독한 냄새를 풍기며, 평생에 한두 번 하는 이사에 나선다. 등에 아이를 업은 엄마 코알라는 땅바닥을 몇 발짝 걸은 다음 새로운, 아마 이후 평생의 거처가 될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 그들이 새로운 유칼립투스 잎을 먹고 있을 때 옆집 친구가 나무를 갈아탄다. 한 유칼립투스 나무에서 다른 유칼립투스 나무로 옮겨 가는 기술이 거의 신공, 공중부양 수준이다.
그 못지않게 탄복할 만한 명기를 뽐내며 칠순을 넘긴 촌부가 아마 칠십년은 족히 탔을 법한 뽕나무 사이를 누비며 오디를 따서 플라스틱 박스에 담는다. 이제 슬슬 내려가려는 찰나, 우간다와 네팔과 페루 어딘가에서 열기와 싸우며 커피콩을 고르는 옛 남자 친구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가 얼핏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는, 그리하여 얼굴을 보여주려는 그 찰나.
*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욕실 문이 활짝 열리면서 우진이가 뛰어 들어온다. 문 바로 앞, 깔개 위에는 건우가 엄마를 기다리며 떡하니 앉아 있다. 누나가 공습경보를 발령하자 즉시 두 손을 들고 엉덩이를 든 채 무릎을 세운다. 곧 일어설 기세, 아니 일어서다가 앞으로 꼬꾸라질 기세이다. 문지방 너머 딱딱하고 미끄러운 욕실바닥에 얼굴이라도 찧는다면! 이런 말들이 머릿속을 획획 오가는 짧은 순간, 내 입에서는 욕설 같은 고함이 터져 나온다.
“애들 안 보고 뭐해, 정말!”
희뿌연 증기가 의식의 흐름처럼 자욱이 드리워진 가운데, 내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칠순을 넘긴 촌부와 희랍어를 공부하는 초로의 영문학도와 아이를 등에 업고서 유칼립투스를 갈아타는 코알라와 커피콩을 고르는 남자는 온데간데없다.
알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수건으로 닦아내는 둥 마는 둥 나는 얼른 건우를 안아 올린다. 마루에는 한동안 아이의 신경을 책임져 주었을 장남감과 주방도구와 걸레통과 옷가지가 한껏 널브러져 있다. 계속 졸다가 이제 막 눈을 번쩍 뜬 남편은 아직도 마누라의 호통이 잘 접수되지 않는 눈치이다. 누적된 피로와 수면 부족 때문에 시뻘겋게 충혈 된 그의 눈에 문자와 부호 몇 개가 흐리멍덩하게 어린다.
“여기가 묵시록이다” 혹은 “Welcome to the real world”. 덧붙여 헐렁한 말줄임표와 맹맹한 이모티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