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가 처음 약을 먹은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는 같은 기숙사 건물, 같은 방에 살고 있었다. 한밤중에 수아가 배를 붙잡고 우는 소리를 하며 나를 깨웠다. 당최 왜 쥐약을 골랐는지 알 수 없었다. 자살을 하려고 했던 이유는 더 당최였다. 구태여 이유를 캐보자면, 그냥 자살을 하고 싶었다는 것밖에 없을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쥐약이 무슨 맛인지 궁금해서, 즉 미학적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 무렵 우리는 둘 다 평범한 삶을 혐오했고 카인의 표식을 달고 싶어 안달했다. 실상 그래본들 우리는 우리가 모범생 콤플렉스에 갇혀 아주 조금씩 변덕을 부려보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청춘의 한가운데를 갈라놓을 각혈의 기습을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쥐약이 두려웠던 나머지 수아는 아주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솔직히, 진짜 맛만 봤다고 해도 되겠다. 덕택에 위세척을 하고 다음날 바로 병원을 나왔다. 이번엔 수면제를 골랐기 때문에 좀 많이 먹어버렸다. 내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동네 약국을 이곳저곳 돌며 수면제를 사 모으는 수아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어, 의식이, 생명이 끊어지길 기다리다가 , 이건 아니야!’하며 느닷없이 핸드폰 버튼을 누르는 수아의 모습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무 살적 수아가 이른바 미학적 고뇌로(, 아무 이유 없이!) 자살을 기도했다면, 스물일곱의 수아는 사물의 세계에 좀 더 가까이 가 있었다. 희망이라는 괴물이 얌체 같이 꼬리만 잘라놓고 도마뱀처럼 싹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간단히, 실연이었다.

 

수아 덕분에 예의 그 시골 의사를 한 번 더 볼 수 있게 됐다. 그는 수아와 내 얼굴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허허, 이번엔 친구야? 거참, 골치 아픈 처자들이구만.”

수아는 또 위장을 말끔히 씻어냈다. 하지만 세척액이 수아의 마음속과 머릿속까지 비워주지는 못 했다. 그 속의 자갈들까지 모조리 쓸어갔으면 좋으련만. 그게 쉽지 않아 수아는 사흘을 병실에 누워 있었다. 요양이 따로 없었다.

 

시골 의사는 아침마다 수아를 보러 왔다. 그때마다 그는 혀를 끌끌 찼다. 한 번은 저녁 무렵, 병원 건물 옆에 서 있던 나를 슬쩍 불렀다.

저 친구, 대체 무슨 일이야?”

수아의 위신을 생각해 스물일곱 살이오오월이오불면이다여서 그랬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수아의 작태가 왠지 나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심술이 났다. 게다가 이 좋은 5월을 내도록 병원을 들락날락하며 보내고 있잖은가.

남자 친구한테 차였어요.”

아이쿠, 연애 문제야?”

시골 의사의 얼굴에는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퇴근길이었음에도 나를 붙잡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나는 이야기를 최대한 미화했다. 그 이야기 속의 수아는 정녕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 7년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며 연모해 온 남자, 그 남자와 함께 한 선운사에서의 달콤한 하룻밤, 다시 옛 여자에게로 돌아간 그 남자, 그 남자의 뒤태를 바라보며 한숨짓고 눈물짓는 이 여자, 사경을 헤매다 이제 간신히 깨어나 병상을 지키는 이 여자.

 

저런, 저런.”

뒤돌아서는 시골 의사의 눈에는 눈물마저 고였다. 너무 웃겨서 나는 혼자 키득댔다. 사귀던 여자 친구와 잠깐 다툰 틈에 질투 작전을 펴보고자 수아에게 접근한 그 남자 녀석은 차라리 충분히 진지했다. 하지만 수아는 뭔가. 그 빤한 수작을 다 알면서도 지고지순한 사랑의 관념을 떠받드는 관대한 연인의 역을 맡으려고 안달복달하다니.

 

다음 날 오전, 퇴원을 하면서도 수아는 헛소리를 지껄여댔다.

, 정말 나도 평범한 여자처럼 살고 싶은데, 연애 한 번 하기 힘들다!”

지랄, 네가 무슨 마릴린 먼로 쯤 되냐? 이제 우리도 애 엄마가 돼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야, 정신 차려. 아니, 어차피 너한테 별로 마음 없는 거 안 보이디?”

마음이 영 없지는 않았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눈치였지만 수아는 입을 닫았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병원을 나온 뒤였다. 어조도 사뭇 달랐다. 오랜만에 따사로운 봄볕의 세례를 받은 덕분이리라.

감자탕 사줘.”

먹자도 아니고 사줘는 또 뭐야? 속 부대낄 텐데 괜찮겠어?”

이렇게 물은 건 실은 퇴원 후 열흘 째 육식을 삼가고 있는 내 뱃속이 걱정된 탓이었다.

돼지 등뼈도 다 씹어 먹을 것 같은데.”

그럼, 나도 슬슬 시작해볼까?”

우리는 룸메이트 시절부터 다니고 있는 감자탕 전문집으로 들어갔다.

 

감자탕 중자를 다 바닥내고서 우리는 식당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물론 등뼈는 먹지 못했지만 감자 조각 하나, 무청 줄기 하나 남지 않았다. 음식물이 우리의 뱃속에 무사히 자리 잡았음을 증명하듯 거나한 트림이 올라왔다. 우리 둘 다 이 트림이 반가웠다. 그것은 뭔가가 새로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다. 서른을 앞두고 또 한 번 살아봐도 될 것 같았다. , 이번에는 그저 마냥 사는 거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과 머릿속에 숨겨두었던 냉소와 위악과 가식의 약병을 슬그머니 치워버렸다.

 

*

 

스물일곱 살이오오월이오구토다.

 

 

20109월 // <문학과 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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