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관념론자의 고백:

말과 사물 사이의 심연을 뛰어넘다

- 사르트르, <말>

 

 

 

 

 

사르트르는 <구토>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실상 세기의 지성이라는 수식어가 조금도 아깝지 않은, 철학과 문학의 육화 그 자체였다. 그런 그가 고맙게도 자서전을 한 권 써주었다. 경쾌하고 까불까불하는 문체 덕분에 사르트르라는 이름이 주는 위화감도 잠시나마 불식되는 것 같다.

 

 

 

 

 

 

 

 

 

 

 

 

 

 

 

여느 자서전처럼 <말>은 유년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외조부 집에서 기식한 만큼 할아버지 놀이를 즐겼던 외조부, 누이와 같았던 젊은 엄마에 관한 얘기가 많다. “나와 인사를 나누는 기쁨마저 베풀지 않고 살그머니 달아나 버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제법 양가적이고 때론 무척 냉소적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삶을 두어 줄로 요약하는 그의 문장은 담백하면서도 눅눅하다. “그 역시 사랑했고 살려고 애썼고 그러다가 죽음을 체험한 사람이다. 그만하면 한 인간의 역사는 충분히 이루어진 셈이다.” 어떻든 이 책 속의 모든 얘기가 결국 하나의 주제로 귀결된다. 바로,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이다. 이 점이 기존의 자서전과 <말>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말>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고 각각 읽기쓰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다소 도식화하면 전자는 공부의 과정을, 후자는 습작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외할아버지의 총아, 착한 아이신동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던 어린 사르트르는 엉터리 꼬마 작가로 거듭난다. 이 과정의 핵심은 무엇인가. 달리 말해, ‘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축자적으로 접근해보자.

보통의 경우 아이는 현실 속의 사물을 먼저 인지하고 그 다음에 말을 배운다. , 내 눈앞의 구체적인 꽃 한 송이, 꽃이라는 말, 책 속의 그림-글자 꽃, 하나의 원형으로서의 꽃, 이런 식의 이월 내지는 확장을 경험한다. 명징한 구체의 세계(사물)와 모호한 추상의 세계() 사이에 놓인 간극을 좁혀가며 후자에 가까이 가는 과정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말을 배운 방식은 정반대이다.

 

나는 그 속에서(<라루스 대백과사전>) 진짜 새집을 털고 진짜 꽃 위에 앉은 진짜 나비를 잡았다. 사람과 짐이 모두 진짜로거기 있었다. 삽화는 그들의 몸이고 글은 그들의 영혼이며 독특한 본질이었다. 밖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짐승은 그 원형(原型)과 다소간 닮은 점은 있지만 원형의 완전성에는 못 미치는 흐리멍덩한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 동물원의 원숭이는 진짜 원숭이답지 않고 뤽상부르 공원의 사람들은 진짜 사람답지 않았다. 정신 상태로 보아 플라톤주의자가 된 나는 지식에서 출발해서 사물로 향했다. 나로서는 사물보다도 관념이 한결 현실적이었다. 왜냐면 내게는 관념이 먼저 주어졌고, 더구나 사물로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세계를 만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56)

 

그에게는 실제의 꽃 이전에 원형-관념으로서의 꽃이 먼저 있었다. 마찬가지로 책 속의 원숭이와 사람이 진짜였고, 현실 속의 그것은 플라톤의 동굴 속 수인의 눈에 비친 그림자처럼 가짜에, 어설픈 모조품에 불과했다. 말의 현실과 실제 현실 사이의 결렬, 이것이 곧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세상을 배운 사르트르의 관념론의 기원이다. “그것을 청산하는 데 30년이 걸렸다라고 그는 고백한다. 이 관념론에 침윤된 채, 어쩌면 그것과 사투를 벌이며 쓴 작품이 <구토>일 터이다.

 

나는 서른 살 때 멋진 솜씨를 발휘했다. <구토>를 쓴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확언하지만 아주 진지하게, 내 동족들의 정당화될 수 없는 씁쓸한 존재를 묘사하고, 나 자신의 존재는 시비의 대상에서 제외해 버렸다.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로캉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내 삶의 곡절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이었다.(267-268)

 

우리는 로캉탱이 아무 이유 없이 수시로 경험하던 구토를 기억한다. 가령 바닷가에서 아이들을 따라 물수제비를 뜨기 위해 조약돌을 집어 들 때 그는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참을 수 없어한다. 그의 구토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은 것은 우리 대부분이 사물의 세계에서 말의 세계로 옮겨가며 성장한 탓이다. 반면, 일찌감치 플라톤주의자였다면 상황이 전혀 다르다. 말이 구축한 이상(理想), 그 합리와 논리에 맞서 사물은 무질서와 부조리를 부르짖는다. 사물과 말은 두 평행선처럼 아슬아슬한 접근만을 반복할 뿐, 절대 완벽하게 만나지 못한다. 그 결렬을 목도하는 순간, 구토는 불가피하다. , 그럼 어찌할 것인가.

<말>을 쓸 무렵 사르트르는 환갑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안짱다리에 짜리몽땅하고 사팔눈에 퍽이나 못 생겼던 남자. 이 희대의 추남은 말과 사물 사이의 심연을, 그리고 그로 인한 구토를 처음 발견했을 뿐더러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까지 가르쳐주었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이보다 더 숭고한 실존이 있을 수 있을까.

 

한 줄이라도 쓰지 않은 날은 없도다.”

이것이 내 습성이요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쓸 필요가 있다. 그래도 무슨 소용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교양은 아무것도, 또 그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270)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사르트르 사진입니다. 유명한 사진이지요? 사르트르는 얼굴 자체가 철학인 것 같습니다(나는 -- 철학이다!) ^^; 

 

 

- 네이버 캐스트  

 

 

* 개인적으로 <구토>에 원한(!)이 있습니다. 너무 어려웠던 기억 때문이지요. <말>의 유려한 번역에 탄복했는데, <구토>도 좋은 번역으로 새로 출간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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