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문지의 술집 모임에서 오다가다 마주쳤다. 몇 마디 대화도 했을 법하다. 길고 마른, 굉장히 건조하고 지적인 느낌의 여자. 삼십대, 또한번 마주쳤다. 만났다, 라고 해도 될 만큼 그녀의 느낌, 말들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아파서 담배를 끊었는데 다시 피우고 싶다고. "담배를 좋아했던 거죠."(-가봐요.) 나는 그때 완전 골초였다. 세월이 흘러흘러, 사십대 또 그녀를 봤다. 짧은 스침이지만 인상은 강렬했다. 그녀는 여전히 말랐고 길었고 건조하고 조용하고 이지적이고, 무엇보다도, 또 몸이 좋지 않았다. 많은 여성 시인들이 여성성을 한껏 뽐낼 때 진은영은 뭔가 딴 세상 사는 사람인 듯(실제로도 그런가?!^^;) 이런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두 시집 중 잘 쓴 걸 꼽으라면 <우리는 매일매일>일 테지만, 왠지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에 더 정이 가는 것은, 글쎄, 이십대의 치기^^가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몸의 느낌과 비슷하게, 손가락도 길고 가늘어 인상적이었는데, 시에도 곧잘 등장한다. 분석할 재간은 안 되고 스마트폰으로도 수시로 읽어 볼 수 있게, 여기다 옮겨둔다.
(2003년, 33세.)
<서른 살>
(...)
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
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렸다는 듯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
죽을 때까지 기억난다
<봄이 왔다>
사내가 초록 페인트 통을 엎지른다
나는 붉은색이 없다
손목을 잘라야겠다
<견습생 마법사>
대마법사 하느님이 잠깐
외출하시면서
나에게 맡기신 창세기
수리수리 사과나무 서툰 주문에,
자꾸만 복숭아, 복숭아 나무
(...)
복숭아나무 아래 떨어지는 분홍 꽃잎, 꽃잎
뉴턴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도 상대성 원리도 우주선도 사라진다
(...)
그래도 나는 오늘, 한 그루 말[言]의 복숭아나무를 심으리라
(사족: 말도 많고 장난기도 느껴지고 이른바 현학취도 보인다, 그녀에게도 이런 것이 있었나 보다.)
<대학시절>
내 가슴엔
멜랑멜랑한 꼬리를 가진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
살고 있어
종일토록 종이들만 먹어치우곤
시시한 시들만 토해냈네
켜켜이 쏟아지는 햇빛 속을 단정한 몸짓으로 지나쳐
가는 아이들의 속도에 가끔 겁나기도 했지만
빈둥빈둥 노는 듯하던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며
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던 시절
(사족: 처음에 '멜랑꼴리한'이라고 읽었는데 옮기면서 보니 '멜랑멜랑한'이다. '-꼴리'는 뒤에 따라오는 단어 '꼬리'에 표현된다. 꼬리, 우울, 염소, 시시한 시, 종이, 고흐, 담배 등 여러 이미지가 너무 좋다, 진은영스럽다.)
<긴 손가락의 詩>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목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사족: 이 시는 내용보다 제목이 좋다. 시인 자신의 길고 척박해 보이는, 그러나 또 단단해 보이는 손가락과 잘 어울린다. 아무나 쓸 수 없는 시. 오직 손가락이(그리고 몸도!) 긴 시인만 쓸 수 있는 시. 겸사겸사, 사십이 넘으니 손가락(정확히 관절)이 상하는 일이 많아, 그것의 중요성을 알겠다. 사람이란 수족, 특히 손을 못 쓰면 제 뒤처리도 못하는 그런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