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1869)와 생활-일상의 힘
(...)
IV. 평화: 나타샤 로스토바의 형상과 입지
(...)
문제는 어떤 여성이든 19세기 러시아 귀족사회라는 시공간적 특수성 때문에 ‘결혼 상품’으로서의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들 중에서도 나타샤가 단연코 돋보이는 것은, 첫째 예쁘고 사랑스러운 귀족 여성이며, 둘째, 삶에 대한 반성적 사유 없이 오직 삶을 사는 데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귀족 작가로서는 우선 전자가 중요하다. 번역본에서는 전혀 표현되지 않았지만 <전쟁과 평화>의 상당 부분이 프랑스어로 쓰였음이 강조되어야(김진영, 19-40) 한다. 한마디로, 이것은 귀족(혹은 그런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작가가 직접 첨부한 러시아어 번역의 도움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언어적 진입장벽이 높은 소설이다. 나타샤의 태생이나 가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그녀의 성격이다. 소설의 에필로그까지 염두에 둔다면 남성적 원칙(‘전쟁’)이 여성적 원칙(‘평화)에 의해 극복된다는 것, 여성성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 핵심이다. 나타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다산한(아이를 잘 낳는) 암컷 плодовитая самка’이라는 점은 그래서 중요하다.
나타샤는 1813년 이른 봄에 결혼했다. 그리고 1820년 그녀에게는 이미 세 딸과 그녀가 간절히 바라던 아들이 있었다. 요즘 그녀는 아들에게 직접 수유를 했다. 그녀는 살이 찌고 펑퍼짐해졌다. 이 강인한 어머니에게서 예전의 날씬하고 발랄한 나타샤를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얼굴선은 또렷해졌으며, 차분하고 부드럽고 맑은 표정을 띠었다. 얼굴에는 예전에 그녀의 매력을 이루던 그 끊임없이 타오르는 생기의 불꽃이 없었다. 지금은 종종 얼굴과 몸만 보일 뿐 영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직 강인하고 아름다운 다산의 암컷만 보였다.(4, 528)
예전의 불꽃이 타오르는 경우는 아픈 아이가 회복되었을 때, 마리야와 함께 안드레이를 회상할 때, 그리고 지금처럼 남편이 오랜 출장에서 돌아왔을 때이다. 이어, 소설은 어린이 방의 부부를 포착한다. 청년 루카치는 유럽의 '환멸적 낭만주의' 소설(<돈키호테>, <마담 보바리> 등)의 마지막에 톨스토이의 소설을 위치시키고 ‘위대한 순간’의 허허로움을 지적하면서 <전쟁과 평화>, 특히 에필로그 부분에 주목한다. “모든 정열과 찾음의 시도가 그 종말을 고한 뒤의 아기방의 조용한 분위기는 문제적인 환멸 소설의 종말보다도 더 서글프고 더 우울한 것”(루카치, 199)이라고 그는 쓴다. 모든 정신적인 것이 동물적인 자연에 완전히 흡수되어 완전히 ‘무(無)’가 되기 때문이다. 전일성과 총체성(서사시의 시대)의 강박에 사로잡힌 채(Lukacs, 78-94) 분열(소설의 시대)을 읽어냈던 젊은 루카치의 환멸과 권태가 보이는 대목이다. 과연 ‘위대한 순간’ 이후 자연과 관습(사회)의 세계를 굳이, 청년 루카치의 감상대로 따분함과 지루함의 극치로 봐야 할까.
소설을 마저 읽어보면 요절한 안드레이의 아들인 니콜렌카가 나온다. 즉, 피에르를 좋아하고 또 동경하는 그의 마지막 말이 사실상 이 기나긴 소설의 마지막이다. “하지만 피에르 아저씨! 아,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그런데 아버지는? 아버지! 아버지! 그래, 난 그분조차 흡족해하실 그런 일을 해내고 말 테야….”(4, 588) 여기서 환멸적 낭만주의-사실주의 소설의 최고봉인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떠올려 보면, 러시아 귀족 작가의 시선이 냉혹한 만큼이나 따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영미권 연구자의 도식대로 <전쟁과 평화>는 픽션과 역사와 메타역사, 현재와 과거와 영혼의 세 차원을 아우르는(A. Wachtel, 180) 방대한 소설이다. 달리 말해, <전쟁과 평화>는 역사소설(과거)의 외피 밑에 현재의 찬미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얘기하는 소설이다. 여느 유럽 환멸 소설에는 아예 없거나 소품처럼 취급되는 ‘아이(들)’가 여기서는 큰 의미를 지닌다. 작가 자신처럼 조실부모한 니콜렌카는 (다른 아이들과 더불어!) 이 불멸의 걸작의 유일한 희망이자 가능성이다. 아이 없이, 시간-성장 없이 소설의 2부는 쓰일 수 없다. 톨스토이가 ‘고슴도치’였든 ‘여우’였든(벌린, 21) 바로 이 점을 소설화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
논문 쓸 준비를/공부를 하는 동안, 논문을 쓰는 동안 절실히 깨달았다. 이 글은 <전쟁과 평화>, 어쩌면 그보다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어쩌면 마지막으로?) 다시 읽기 위해 쓰였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