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을) 놈 걱정 말고 산(살) 놈 걱정을 하자. 지난 여름에 사두고 (지금 읽으려고) 벼르는 책도 있고, 이제 막 나와서 주문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은/는 책도 있다.

 

 

 

 

 

 

 

 

 

 

 

 

 

 

 

박상영은 지난 번에 썼는데, 아이들이 좋아해서(=많이 씹어서^^;) 소설집도 샀다. 김금희는 이전 소설집이 참 좋았는데, 장편이 조금 지루해서 실망했다가, 신작 작품집을 사보려고 한다. 조금 '올드'(^^;;)한 작가로는 이번에 김승옥문학상을 받은 윤성희 장편(혹은 다른 소설). 그 다음 <새의 선물>의 작가가 20대 대학생으로 분한(그렇게 이해되는데) <빛의 과거>.

 

 

 

 

 

 

 

 

 

 

 

 

 

 

 

엥, 이것이 전부인가? 목록이 현저히 짧은 것 같은 느낌에, 곰곰 생각해보니 1학기에 곧장 붙여서 강의를 하게 됐음이 상기되었다. 즉, 항상 있던 반년 정도의 텀이 없다보니 아무래도 지난 학기에 다룬 소설도 좀 더 들춰볼 수 있겠다. 책을 아예 사는 쪽이라, 그때 다 못 읽은 작품도 마저 볼 수 있겠다. 가령,

 

 

 

 

 

 

 

 

 

 

 

 

 

 

 

 

의도한 것이 결코 아니다!!! 90프로가 여성작가다. 언제부터 우리 문단이 이렇게 되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적어도 문학판에는 '남성할당제'(?)가 절실히 요청된다. 그래도 안 올 텐가, 이 문학으로? 시는 어떤가. 

 

 

 

 

 

 

 

 

 

 

 

 

 

 

 

이번 학기에는 시와 희곡도 한 주씩 할당하려고 한다. 물론 수업에 다루는 작품은 고전이지만, 얼씨구나 이참에 시집도 좀 주문하였다. 기대된다! 80-90년대 기형도,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 등등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가.  

 

*

 

어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다 보았다. '다' 보았다 함은 그저께 절반쯤 보고 어제 마저 보았다는 의미다. 보고 싶은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호사이고, 그나마도 쪼개서 봐야 하는 신세,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막상 당해 보니, 알겠다. 무엇보다도, 이 희소성(!) 덕분인지 영화가 넘나 재미있었다! 봉준호의 영화는, 너무 놀라운데, 사실상 거의 처음 보는 듯하다. <살인의 추억>은 무서울까봐 못 봤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의 필모그래피를 모르지는 않는데, 이런 식의 그로테스크한 미감을 소유한 분인줄 몰랐다, 감탄했다. 블랙잔혹코미디?

 

봉감독처럼 소위 금수저에 훌륭한 미학과 재능을 지닌 사람이 이런 사회적 대립구도에, 거시적 문제와 주제에 관심을 주는 것이 참 고맙다. 그의 출신성분(이 말이 불편한가?^^;)과 훌륭한 유전자의 특성상, 장르가 코미디인 건 당연하다. 혹은, 감독의 그런 선택이 아주 탁월하다고 생각된다. 코미디에서 한 단계 올려 '부조리'라고 해도 되겠다. 웃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콘트라스트, 대조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거쳐 우리가 보게 되는 최후의 대조(체육관의 이재민과 저택의 가든 파티) , 피칠갑 장면, 마지막 '기생충'의 지하실(거의 카타콤베 수준, 감독의 명민함에 다시 놀람!)은  더더욱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 아빠 무엇보다도 돈을 벌어서, 이 집을 사고, 아버지는 그냥 올라오기만 하세요...

 

하지만 아들(이름이??)이  말쑥한 차림으로 집 구경을 하는 장면은 역시나 꿈일 뿐이다. 님아, 꿈 깨시라!!! 뭔 수로 저 집을 살만한 돈을 벌겠나. 니들은 있을 곳은 저 아래(정원)도 아닌, 더 저 아래(지하)이다. 사람은 절대로 선을 넘지 말아야 되는 법! 자신의 냄새-스멜(smell)을 절대 없앨 수 없는 법! 개천의 용이 되지 말고 개천의 가재로, 붕어로 행복하시라!

 

작년 여름에 본 이창동의 <버닝>을 떠올려보면, 여기서는 감독이 '안'-금수저(설마 흙수저?)라 유산계급, 소위 가진 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노골적이다. 그는 권태에 절어 있고 살인자이고 자기가 잃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전적으로 가해자. 하지만, <기생충>은 다르다. 그 사회 속에서 들여다 봤다는 것이 느껴지는 대목, 즉 자기 아이러니의 정점. 넘나 화목한 집안: 부부 금슬 좋아(그래서 저 소파신이 필요한 듯, 대화도 많이 해), 아들딸 다 잘 자라(이 정도 문제야 누구나 있고), 집안 사람 관리 하기 힘들어(역시나 이들에겐 일상), 그러면서도, 적당히 맹하고 착해, 마지막, 그들 역시도 가장 소중한 것(가족-가장)을 잃게 돼~. 대단히 희화되었지만, 어쨌든 이들도 사람이다, 라는 것은 충분히 보여준 듯하다.

 

덧붙여. 봉준호 vs. 송강호. 

내 생각엔 봉준호 없는 송강호는 가능하지만, 송강호 없는 봉준호는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좀 부실할 것 같다. 이게 참 아이러니인데, 감독은 스스로 영화에 나갈 수 없으니(물론 출연하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 들어가는 순간 그는 감독이 아니라 배우다! 하다못해, 신문 기사 속의 히치콕 사진^^;) 항상 가면-페르소나를 필요로 한다. 봉-에게 송-은 정말 환상의 가면인 것 같다. 마치 레오카락스 - 드니라방, 구로사와아키라 - 토시로미후네 등등처럼. 신은 세계 속에 나오면 안 된다. 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려면 육화되어야 한다. 송강호는 봉준호의 육화, 즉 인카네이션.  

 

*

 

참 바쁘다. 영화도 마저 봐야 해, 아이 문제집도 채점해줘야 해, 정치에 무관심함에도 청문회도 한 번씩 클릭해줘야 돼... 어제 청문회를 잠깐잠깐 보다가 광의의 토론 문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조국 선생님은 이 점에서는 상당히 훌륭한 것 같았다. 경상도(부산) 사투리를 무척 싫어하지만 그 사투리조차 점잖을 수 있음을 그의 강연 같은 것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다음, 남의 말을 좀 들어라.  그 다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말만 해라. 이렇게 쓰는 이유는 나 역시 이것이 넘나 안 되기 때문이다. 나 개인의 성격도 있지만, 우리의 토론 문화가 성숙하지 않은 탓도 있다.

 

80년대, 한 교실에 학생이 50명도 넘었다. 발표할 일 거의 없었고, 발표하면 그건 튀는 일이거나 아니면 너무 잘난 일이거나 그렇다. 이러나저러나 너무나 유표이다. 그 다음, 사람이 많으니 무조건 목소리가 커야 한다, 흑. 바로 이것. 큰소리로 마구 떠들어 상대방 제압하기. 혹은 아예 발표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장악하기. 이런 문화 속에서 우리는 자랐다.75년생인 내가 그렇다. 어제 청문회 장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보다 10살 이상 많을 텐데, 토론이 더 먼 나라 얘기인 시절을 사신 분들이다. 참, 유감스럽다. 당장 떠오르기론, 영국의 <PMQ>(총리질의~)와 비교해도 '질 떨어진다', '수준 낮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대부분이 악다구니의 향연이다! 조국만(혹은 박지원 의원이나 등등) 사람의 말을 한다. 

 

// Order! Order! ***  must be heard! // 정녕, 말을 좀 들으라! //

 

그러나!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좀 다르다. 한 반에 스무명 안팎, 많아야 서른 명이라던가.  "누가 얘기해볼래요?" 라고 하면 적어도 반 이상이 손든다. "저요, 저요!" 그 중에서 호명 받은 아이가 발표한다. 선생님도 그 아이의 발표를 듣도록 독려한다. '말하는 것'보다 저것, (친구의 말을/발표를)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여기서 아이들의 지능(!)이, 발달 수준이 드러난다. 우리 아이 같은 띵돌이들은 딴짓하거나 멍때리거나 자기 하고 싶은 말 혼자 떠든다. 남한테 관심 끌려고 더 큰 목소리로 떠들거나 심지어 노래 부른다. 똘똘이들이야말로 남의 말을 잘 듣는다.   

 

*

 

 

 

 

 

 

 

 

 

 

 

 

 

 

조국이 굳이 공직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면 지금의 일들은 사실상 '깜'도 아니었을 것이다. 봉준호는 아시다시피 소설가 박태원의 외손자다. 금수저의 '금'보다 더 무서운 유전자 강적이랄까. 나보코프도 그렇지만, 유전자는 혁명으로도, 총칼로도 뺏을 수 없는 것이라, 남의 나라로 쫓겨나서도 승승장구한다. 그러게 참, 세상 불공평하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 리얼리즘이다! 빛나는 유전자를 받은 것이, 화려한 전두엽을 타고난 것이 죄인가. 그들도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것조차 인정 못 할 만큼 우리가(나 - 흙수저, 아니 심지어 수저도 없는 그냥 손!) 그렇게 배알이 꼴려 있는가. 그들을 인정하지 못한 채 게거품 물면 결국 우리만 불행해진다. 왜냐면 계속 남의 말 안 듣는 '천출'에게 정치를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참에 다시금, 그리워지는 그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시절 청문회 장면을 다시 돌려보았다. 신파 같지만, 우리의 성장기도 생각나고,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장면들이다. 화면 속 노무현도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거칠다, 간혹 핏대도 세운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어조는 나지막하고 조근조근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한 번 욱하면서 "증인, 저는 증인한테 할 말이 정말 너무, 너무 많습니다~' 등의 말을 '토할 때'는 우리도 같이 토하게 되는 것이다.  토론의 기법이 따로 있나. 무슨 장르든 그렇지만, 물론 기법이 따로 있다. 하지만 기법에 앞서 정신-내용이 똑바로 박혀야 한다.

 

*

 

태풍 온다. 링링. 발표하는 것이 너무 무서운 아이의 이야기를 담은 동화 속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지난 1학기초 공개 수업 선생님이 이 동화를 읽어주셨는데, 우리 아이를 비롯한 두 서너 명이 집중력이 짧았다. 중간도 못 가서 엉터리 질문하고 혼자 흥분하고 웃고 등. 그러게 듣는 능력! 자, 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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