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마지막 수업 준비차 살트이코프-셰드린의 장편소설을 읽는다. 러시아에서 수업 들을 때는 작품 제목이며 내용(요약본-_-;;)이며 공부를 좀 했지만 한국 와서는 제대로 읽을 기회가 없었다. 반 정도 왔다. 아, 이런 소설이었구나. 제목 그대로, 골로블료프 집안의 삼대에 걸친 이야기. 우선 여주는 여지주 아리나.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으나, 딸 안나가 딸 둘만 낳고 죽었다. 그래서 사실상 세 아들(+두 외손녀)의 이야기가 된다. 응당 <카라마조프>가 생각난다. 아닌 게 아니라, 여지주 아리나는 그 탐욕과 이기주의에 있어 과연 여자 표도르(카라마조프)라 할 만하다. 그 다음, 이렇게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가족서사, <전쟁과 평화>를 떠올릴만하다.(19세기 후반, 러시아 문학의 한 풍경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요약상에서만 그렇고, 소설 속을 깊이 들여다 보면...
이건, 아주 부정적 의미로,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소설이다. 아리나는 물론 악덕의 덩어리지만, 표도르의 경우와 같은, 긍정의 모멘트, 하다 못해 웃음의 모멘트도 거의, 전혀 없다. 모성이 거의 없는 것처럼, 그래서 돈 몇 푼(이른바 "한 조각")만 던져주는 식으로 나오는데, 아니 세상에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이런 계기들을 조금씩 다른 관점에서 포착, 묘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작가는 시종일관 매몰차다. 왜 그런지. 셰드린을 잘 몰라서 잘 모르겠고 앞으로도 계속 모르고 싶다.^^; 이게 대표작인데, 대표작이 이러니 누가 2작, 3작을 읽나.
여지주 아리나에 가려, 남지주(즉 주인어른)는 거의 나오지도 않는다. 그 다음 바톤을 받는 자들은 세 아들, 특히 못됐고 그렇기에(꼭 그런 양 나온다) 승승장구하는 차남이다. 장남과 삼남은 방탕하거나 멍청하거나 나약하거나 모두인 부정적 캐릭터다. 후반부 얘기 역시, 전반부와 비슷하게 읽기 불쾌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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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불쾌한 독서. 불편함과는 좀 다르다. 그냥 기분 나쁘고 기분 더럽고 읽기 싫은 거다. 과연 '부정'(No!)의 파토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 깨닫는다. '부정'이 의미가 있으려면, 오직 또 다른 '긍정'이 담보될 때이다. 이 상호작용을 잘 쓰면 카타르시스, 숭고미, 변증법적 지양 등등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쉽지 않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와 더불어) 어느 시대에도, 어느 세상에도 다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