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에 바흐친을 잠깐 생각한다. 그를 잠깐 다시 읽었다. 아니, 훑어보았다. 대학, 대학원 시절에는 번역이 많지 않았고 원서를 읽는 데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지금은 번역이 많다, 그런데 이제는 많이들 읽지 않는다. 그런 것이다.
이미지가 중구난방인데 아무튼 그가 쓴 책도, 그에 대해 쓴 책도 적다고는 할 수 없지 싶다. 공부를 하려면 이전보다 더 좋은 여건이 되었음에도, /소년이로 학난성, 이라는 말이 왜 떠오르냐 ㅋㅋ/ 그를 다시 읽기에는 너무 늙어버렸다. 잠깐 들춰보니, 또 대학원생들의 발제문을 보니 그 옛날이 떠올랐다. 그의 말들, 그를 좋아했고 나름 탐독했던(나는 물론 '도..키 시학'을 제일 좋아했다) 시절 속의 나.
아마 한국어로 제일 먼저 읽은 그의 책은 물론 <도..키 시학...>이고, 그 다음은 창비판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이다. 무척 절묘한, 놀라운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당시 한창 소설을 쓰고 또한 소설 이론 공부에 열을 올리던 때라, 루카치, 골드만은 물론 각종 서사학 책들을 마구잡이로 들추던 시절이라, 뭔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_-;;) 힘차게(!) 읽었던 듯하다. 다시 보니...
글쎄, 소설을 쓰는 데 있어 소설론 공부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론과 실제. 소설을 잘 쓰려면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한다, 이건 맞지만, 소설론까지? 글쎄, 그건 오히려 시간 낭비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십대후반, 이십대의 나는 소설가를 꿈꾸었지만 동시에 인문학자를 꿈꾸었기에, 그 점에서는 또한 그런 공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즉, 소설을 잘 쓰기 위해서, 이기도 했지만, 그저 이론적으로 소설에 대한 표상을 갖고 싶었기에 공부한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대략 내가 유학 가 있을 때 나온, 나의 동기의 석사 논문이 바흐친의 라블레론에 관한 것이었다. 겸사겸사 읽어보려고 다운 받았다. **일까지 볼 수 있다고 기한이 정해져 있다. 좀 읽었으나 컴퓨터(혹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는 것이 힘들어, 도서관에 가서 열람을 요청했다. 아, 이제는 학위논문 종이책은 오직 보관용이고, 열람(읽기)은 오직 파일 형태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종이로 보고 싶으면 그 파일을 출력해야 한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이다. 이제야 안 것이 오히려 놀라운가.
바흐친의 라블레론은 번역본으로 러시아에서 읽은듯하다. <가르.. 팡타...>는 귀국해서 읽은 듯하다. 생각만큼 흥겹지도, 재미있지도 않아서 놀랐다! 저 책에서 그로테스크, 웃음, 생성, 민중, 생명, 유쾌한 뒤집기, 패러디 등을 본, 그리고 그것에 대해 쓴 바흐친의 지성과 필력이 오히려 감탄스러웠다. 최근에 나온 바흐친 연구서도 들추어 보았다. 무척 공들여 쓴 책, 잘 쓴 책이다. 문제는 사랑인데, 연구 대상에 대한 사랑이 절절이 느껴졌다. 저자 역시 나의 동학(학번으론 후배)이다. 우리가 얼마나 힘든(쓸모 없는 -_-;;) 학문을 하고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학문이란 본디, 외로운 것이다. 그 고독 속에서 찬연한 연구-공부의 꽃을 피워야 하는데...음...
힘.내.자.